태종의 아들들 양녕대군 효령대군 성녕대군
양녕대군
1394-1462
양녕대군은 1394년 태종 이방원과 어머니 원경왕후 민씨의 장자로 출생하였다. 태종의 장남이며 세종의 형이다.
양녕대군의 부인은 광신 김씨 김한로의 딸이다.
태종은 원경왕후 사이에서 4남 4녀를 두었고 효빈 김씨 등 18명의 후궁에게서도 8남 13녀라는 많은 자녀를 두었다. 양녕대군은 태조3년(1394)에 태어났는데 아버지 이방원은 정안대군이었다. 제 1, 2차 왕자의 난을 겪고 이방원이 조선 3대 임금으로 오르자 정비의 장남으로 태어난 양녕대군은 태종을 이어 조선 4대의 임금이 될 행운을 갖게 된다.
양녕대군은 태종2년(1402) 원자에 책봉되었고, 태종4년(1404) 10세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13세에 김한로의 딸과 혼인하였고, 왕세자로서의 역할을 잘 해나갔다. 그러나 성인이 되면서부터 부왕의 기대에 어긋나는 행동들을 저질렀는데 이런 일들이 계속 반복되었다.
양녕대군은 성품이 자유분방하여 유교적 교육과 엄격한 궁중생활, 왕세자로서 지켜야 할 예의법도를 지키는 일을 어려워했다. 사냥을 좋아하고 기생을 탐하여 궁궐 내 처소에 여자를 불러들여 태종의 노여움을 사기도 했다. 태종은 물론 유햑자들의 우려 대상이었고 부왕은 세자로서 모범을 보이도록 타이르고 벌을 내리기도 하였다.
태종16년(1416) 선공부정 구종수와 악공 이오방은 여색을 밝히고 사냥을 좋아하는 세자에게 미녀와 매를 바쳤다가 탄로나 유배당하는 일도 있었다.
태종17년(1417) 중추 곽선의 첩인 어리 라는 여자와 간통한 일이 발각되었다. 태종은 세자를 처가 김한로의 집으로 쫓아보냈다. 세자는 맹세문을 종묘와 부왕에게 올렸고, 태종은 세자가 잘못을 뉘우치고 있다며 용서했다. 그러나 태종18년(1418)에는 어리 라는 여자를 또다시 탐하여 임신시키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궐 밖에서 아이를 낳았다. 이를 감추다 장인 김한로는 귀양을 가게되었고 황희도 세자를 옹호하다가 처벌받았다.
1417년 맹세문은 당시 대표 문장가였던 변계량이 대신 작성했는데, 이때는 세자가 자신에게 내린 부왕의 처벌이 부당하다는 반론을 직접 장성해 올렸다. "이 첩 하나를 금지하다가는 잃는 것이 많고 얻는 것이 적을 것이며, 이제부터는 조금이라도 새 사람이 되어 부왕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는 요지였다.
태종은 이 글을 영의정 유정현, 좌의정 박은 등에게 보였는데 의정부, 삼공신, 육조, 삼군도총제부, 각사 등 모든 주유 신하들이 폐세자를 주장하였고 양녕대군은 폐세자되고 태종은 셋째 아들 충녕대군(세종)을 세자로 책봉했다.
양녕대군이 강화로 거처를 옮겨갔고, 태종은 두달 후 세자에게 전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당시 양녕대군은 자신의 문제를 충녕대군이 태종에게 고한 것으로 알고 충녕대군을 원망하였다. 하지만 이후 세종은 양녕대군을 탄핵하는 상소는 모두 받지 않았고 1년에 한번 정도는 양녕대군을 궁으로 불렀다고도 한다.
양녕대군은 주로 이천에서 거주했는데 시, 서예, 음악 등 예술에 관심을 가지며 한량으로 살아갔다. 술을 좋아하고 기생들을 좋아하여 여러 간통사건들이 많았으며 양녕대군의 자녀들도 방탕한 생활로 세간에 회자되었다. 이러한 일들이 세종에게 여러차례 상소로 올려지기도 했다.
정치에 떠나있던 양녕대군은 문종이 사망하고 어린 단종이 보위에 오르자, 양녕대군은 수양대군을 지지했는데 계유정난 당시 양녕대군은 종친의 가장 어른이라는 위치에 있었다. 세조의 강력한 정적인 안평대군의 사사를 강력히 주청했고, 영의정 정인지 등과 함께 단종과 금성대군의 처단을 강력히 주청했다. 이후로는 세조의 지원을 받으며 편하게 노후를 지내다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동작구 상도동에 양녕대군의 사당과 묘가 있다.
효령대군
1396-1486
효령대군은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2남으로 태어났다. 부인은 정역의 딸 예성부부인이며 6남1의 자녀를 두었고 첩에게 1남 1녀를 두었다. 독서를 즐기고 활쏘기에 능해 태종을 따라 항상 사냥터에 다녔으며 효성이 지극했다. 형인 양녕대군이 세자에서 폐위되자 자신이 세자로 책봉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동생 충녕대군에게 세자 자리가 정해지자 불교에 심취하였다. 세종이 효령대군의 집에 들르게 되면 밤이 깊도록 국사를 의논했다고 전한다. 불교에 독실하여 수많은 유신들이 반대했으나 승도를 모아 불경을 강론하도록 했다.
효령대군의 기록은 불교와 관련된 기록만이 남아있다.
세종11년(1429) 관악사를 삼창하고 약사여래상 미륵존상 및 삼층석탑을 조성했다. 월출산 무위사의 중창을 지유하고 만덕산 백련사 중창의 시주가 되었다.
세종12년(1430) 왕명을 받아 어용과 선원록을 새로 조성한 선원전에 봉안하였다.
세종14년(1432) 한강에서 7일간 수륙재를 개최하였다.
1435년 화암사 중수를 건의했고 1464년 원각사를 창건하게 되자 조성도감 제조가 되어 역사를 친히 감독했고 원각경을 국역하여 간행하였다.
성격이 원만하여 친족들과 우애가 깊었고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까지 거치면서 91세까지 장수했다.
성녕대군
1405-1418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4남으로 어려서부터 태도가 의젓하고 총명하여 부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14세에 홍역에 걸려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