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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황실 역사 - 네르바 안토니누스 왕조

GoodFortune 2022. 9. 27.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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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르바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

30~98 재위 96~98

 

네르바는 카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와 세르기아 플라우틸라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와 이름이 같은가...) 아버지는 3대 황제 칼리굴라 시절 보좌 집정관을 지냈다. 그의 집안은 이탈리아계 귀족 출신이었으나 선조들은 집정관을 지내고 황제들과 가까이 지내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와 연결되어 있다.

네르바는 플라비우스 왕조의 지지자였으며 71년 베스파시아누스 치세, 89년 도미티아누스 치세에 집정관에 임명받았다. 96년 도미티아누스가 궁중 관리들이 꾸민 음모로 암살되었는데 이후 원로원에 의해 네르바는 황제로 선포되었다. 네르바는 당시 66세로 나이가 많고 정치 경력이 부족했기에 그가 음모에 연루되었을 거라 추측되고 있다. 

네르바가 황제로 즉위한 후, 원로원은 도미티아누스의 조각상을 논이고 모든 공공 기록물에서 이름을 제거하는 기록말살형을 내린다. 도미티아누스 치세에 가혹한 처벌을 받은 원로원은 네르바를 환영하였고, 네르바는 그의 치세에 사형을 처하지 않을 것을 선포했다.

그러나 도미티아누스 지지가 군부에는 남아 있었고, 친위대 병사를 달래려는 시도에서 도미티아누스 암살 공모자인 새로운 사령관을 해임하고 옛 지휘관 카스페리우스 아일리아누스를 다시 임명했다. 그럼에도 친위대에서는 도미티아누스 암살 공모자들의 처형을 요구했고 네르바는 거절하였는데 이러한 상황으로 혼란이 계속 되었다. 네르바는 노령에 친자식이 없었기에 후계자 또한 문제가 되었다. 97년 카스페리우스 아일리아누스 주도로 친위대가 황궁을 포위하고 네르바를 인질로 잡으며 네르바는 도미티아누스 암살에 책임이 있는 자들을 넘기기로 동의하였다. 네르바는 군사적 지지를 얻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트라야누스 입양을 선포했다.

얼마 후 네르바는 뇌졸중으로 사망하였고 양자 트라야누스가 황제 자리에 올랐다.

 

 

트라야누스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

53~117 재위 98~117

 

플라비우스 왕조 티투스의 처형 마르키아와 울피아 씨족의 원로원 의원 겸 장군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의 아들이다. (역시나 아버지와 이름이 같다...) 아버지는 유대-로마 전쟁에서 베스파시아누스와 함께 했다.

트라야누스는 로마 제국 국경에서 복무하며 76~77년경 군사 호민관으로 있었다. 86년 즈음, 친척 아일리우스 아페르가 어린 자녀들 하드리아누스와 파울리나를 둔 채 사망하자, 트라야누스와 푸블리우스 아킬리우스 아티아누스가 공동 후견인이 되었다.

아버지가 플라비우스 왕조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덕분에, 프라야누스는 91년 30대 후반 이른 나이에 집정관이 되었다. 폼페이아 플로티나와 혼인 했으나 자식은 없었다. (동성애 성향이 있었다고도 한다.)

네르바가 황제에 올랐으나 군대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친위대 사령관 카스페리우스 아일리아누스에게 포위되어 도미티아누스 암살 음모자들을 처형받도록 강요받았다. 후계가 없던 네르바는 군사적 지지가 필요하였기에 트라야누스를 양자로 삼으며 후계자로 선언했다. 98년 네르바가 사망한 후 황제에 올랐다.

그는 로마로 바로 가지 않고 국경지대로 장기간 시찰을 했다. 친위대 사령관 아일리아누스에게 자신이 있는 독일로 오라고 명령했고, 아일리아누스는 그곳에서 아티우스 수부라누스에게 처형당했다. 

99년 로마로 입성한 트라야누스는 원로원의 지지를 받으며 겸손한 권력을 펼쳤다. 원로원은 트라야누스에게 최고를 의미하는 '옵티머스'라는 경칭을 부여했다. 그의 치세에 지은 유명 건축물은 트라야누스 목욕탕, 트라야누스 포룸, 드라야누스 원주, 트라야누스 다리 등이 있으며 지금까지도 그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트라야누스 원주와 트라야누스 목욕탕

트라야누스는 빈민 자녀의 부양정책, 이탈리아의 회복시책을 추진하였고 다키아(현재 루마니아 일대), 나바타이왕국, 아시리아를 속주로 만들며 로마제국을 확장하였다. 파르티아 왕국(현재 이란)을 정복하였으나, 파르티아의 반격이 이어지고 이집트, 유대의 반란까지 겹쳐 아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남부를 포기하였다.

117년 트라야누스는 병이 악화되어 하드리아누스를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선언한 후 로마로 귀환 중 급사했다.

 

 

하드리아누스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76~138 재위 117~138

아버지 푸불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 아페르와 어머니 도미티아 파울리나의 아들이다. 친척인 트라야누스 황제가 후견인이 되며 로마로 거주지를 옮겼고, 18살부터 위원직을 맡아 업무를 수행했다.

101년 원수재무관에 취임하여 트라야누스 황제 곁에 있었으며 황제의 연설을 원로원에서 대변하는 역할을 했다. 105년 호민관에 취임하고 108년 황제 다음 관직인 보좌 집정관에 올랐다. 트라야누스 황제가 죽기 전 하드리아누스를 양자로 지명하고 급사하게 되어 117년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일부 원로원 의원들은 황제 계승에 반발을 하자 하드리아누스의 공동후견인이었던 푸블리우스 아킬리우스 아티아누스가 원로원 의원 4명의 살해했다.

하드리아누스는 제국 통일을 위해 제국의 방어력을 정비하였다. 군사적 요충지에 방벽을 세워 하드리아누스 방법이라고 불린다. 원로원과는 사이가 원만하지 못하였는데 즉위 초기 4명의 원로원이 살해된 일로 시작해 하드리아누스의 정책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드리아누스의 후계자 선출에서도 이견이 발생해 원로원은 하드리아누스의 의형제 율리우스 우르수스 세르비아누스와 그 손자 페다니우스 푸스쿠스를 자살로 몰아갔다. 하드리아누스는 루키우스 아일리우스를 양자로 삼았으나 먼저 사망해였고, 그 후 안토니누스를 양자로 삼아 자신의 후계자로 결정했다. 사후 원로원은 하드리아누스를 신격화하지 않고 기록말살령을 내리려 하였는데 안토니누스의 필사적 설득으로 원로원의 동의를 얻어냈다고 한다.

하드리아누스 치세에 판테온 신전의 재건을 착수하였다.

비비아 사비나와 결혼하였으나 자녀는 없었고, 아우구스투스 아내 리비아 이래로 로마와 속주에서 많은 존경을 받은 황후였다. 128년에 아우구스타 칭호를 수여받았다. 하드리아누스는 동성애인이 있었으며, 비비아 사비나를 노예보다 조금 나은 대우를 했다고 한다. 둘 사이에 자녀는 없었다. (기록을 보면 많은 로마 황제들은 동성애 성향이 있었고, 자녀가 없었다.)

 

 

로마 황실 가계도 - 네르바 안토니누스 왕조

 

안토니누스 피우스

86~161 재위 138~161

 

원로원 가문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풀부스와 티투스 아리아 파딜라의 아들이다. 아버지는 안토니누스가 어릴때 사망했고, 조부 그나이우스 아리우스 안토니누스에게서 자랐다. 그의 집안은 네르바 집권기 영향력이 강했던 원로원 가문이었다.

안토니누스는 집정관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의 딸 안니아 갈렐레아 파우스티나 마이오르와 결혼하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루팔리아 파우스티나로 황후 비비아 사비나의 이복 자매이기에 하드리아누스의 조카였다. 둘 사이는 좋았으며 2남 2녀를 낳았다. 아들은 일찍 죽었으며 딸 안니아 갈렐리아 파우스티나 미노르는 외가친척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결혼했다. 훗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뒤를 이어 16대 황제가 된다.

파우스티나가 죽은 후 재혼을 하지 않고 해방노예 갈레리아 리시스트라테와 동거하였다.

120년 집정관에 임명되었고, 하드리아누스의 총애를 받았다. 하드리아누스의 첫 양자 루키우스 아일리우스가 죽자 안토니누스의 양자가 되었다. 당시 아내의 이복자매 아들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루키우스 아일리우스의 아들 루키우스 베루스를 입양하는 조건으로 입양되었다. 안토니누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약혼을 파혼시키고 자신의 딸 파우스티나와 결혼시켰다. (딸 파우스티나 또한 루키우스 베루스와 약혼한 생태였으나 마르쿠스와 결혼하였다)

안토니누스 치세에 군사 업무는 기록이 거의 없고 평화로운 시기였다. 기독교 박해를 금지시키고 해방노예의 설립을 촉진하였고 원로원과의 사이도 원만했다. 161년 열병으로 사명하였으며 황제 자리는 두 양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루키우스 베루스가 공동 황제에 올랐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121~180 재위 161~180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 16대 황제이자 스토아 학파 철학자이다. 출생 당시 이름은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로 추정되며 안토니우스의 후계자 간택 당시 이름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이다. 아버지는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이며 어머니는 도미티아 루킬라이다. 아버지는 하드리아누스의 조카가 된다.

사촌지간인 파우스티나와 결혼하여 딸 도미티아 파우스티나, 쌍둥이 형제 등 13~14명을 낳았으나 아버지보다 오래 산 자녀는 한 명의 아들과 네명의 딸 뿐이다. 161년 안토니우스가 사망하자 루키우스 베루스와 함께 공동으로 로마 황제에 올랐다.

166년 마르쿠스는 쌍둥이 아들 안니우스와 콤모두스를 후계자로 선포했으나 안니우스는 169년 사망했다.

마르쿠스 치세에 로마 제국은 막대한 군사 분쟁을 맞이했다. 파르티아 제국, 아르메니아 왕국과 전쟁을 치루었고 마르코만니족, 콰디족, 사르마티아족계의 야지게스족을 제압하였으나 게르만족의 침임이 잇달았다. 안토니누스 역병이 166년에 발생하여 1000만명 중 500만 명이 죽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공동 황제였던 루키우스 베루스는 169년 역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본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5현제의 마지막 황제이다. 여러 외적의 침입으로 시달리고 페스트의 유행으로 제국이 피폐하여 마르쿠스 사망 이후 로마제국은 쇠퇴하게 된다.

 

루키우스 베루스

161~169

하이드리아누스의 최초의 양자이자 후계자인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들이다. 아버지 사망한 후 하이드리아누스의 양자인 안토니누스 피우스에게 입양되었다. 양부인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사망하자 161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함께 공동 황제로 올랐다. 원로원은 마르쿠스를 단독 황제로 올릴 계획이었으나 마르쿠스는 루키우스와 동일한 권한을 받지 않으면 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서 거부하였다. 이에 둘은 공동 황제가 될 수 있었다. 

명목상으로 공동 황제였지만 마르쿠스가 권위를 더 많이 갖고 있었다. 마르쿠스의 11살 딸인 안니아 루킬라와 루키우스는약혼을 하였고, 163~164년 사이 결혼식을 올렸다.

162년부터 166년까지 로마 동부에서 일어난 파르티아와의 전쟁에 출정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였다. 168년 마르코만니족이 로마 영토를 침입하여 다뉴브강 국경에서 전쟁이 발발했다. 루키우스와 마르쿠스는 전장에서 로마로 돌아오던 중, 루키우스는 식중독 증상이 나타나 사망했는데, 훗날 이 병은 안토니누스 역병인 것으로 추측한다.

 

 

콤모두스

161~192 재위 177~192 

 

마르쿠스 아우렐리스와 파우스티나의 아들이다. 14명의 자녀 중 성인까지 살아남은 1남 4녀 중 유일한 아들이었다. 

아버니 마르쿠스와 공동 통치자로 177년 공동 황제에 올랐으며 180년 아버지 마르쿠스 사망 후 단독 황제가 되었다. 즉위 후 누이 루킬라가 원로원과 공모하여 그를 암살하려는 시도를 하다가 발각되어 실패하였으며 이 때문에 원로원 의원들을 처형했다. 190년 발생한 화재로 로마의 반이 소실되었는데 콤모두스는 재건된 로마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을 붙여 '콜로니아 콤모디아나'라고 명명하며 스스로를 우상화했다.

콤모두스는 지나친 사치를 하며, 콜로세움에서 직접 검투사가 되어 735번의 시합을 벌이며 국가 정사는 돌보지 않았다.

192년 정부 마르키아가 콤모두스를 독살하려고 했으나 실패하였고, 독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을 때 그의 교관 나르키수스가 그를 목졸라 죽였다. 원로원은 기록말살형을 선고했지만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아우렐리우스 씨족의 호의를 얻기 위해 면죄하였다. 암살 후 군대가 국가의 권력을 잡고 페르티나스를 황제로 올렸으며 193년부터 197년까지의 로마제국 내전이 시작된다. 이를 다섯 황제의 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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