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것이힘이다/고려역사

고려 고종과 최충헌의 후손들

GoodFortune 2019. 8. 9.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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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충선-충숙-충혜-충목-충정-공민-우-창-공양

 

고종 (고려 23대 왕)

1192-1259

재위 1213-1259

 

 

최충헌

1149-1219

무신집권 1196-1219

 

최우

1166-1249

무신집권 1219-1249

 

최항

1209-1257

무신집권 1249-1257

 

최의

1233-1258

무신집권 1257-1258

 

고종은 고려 22대왕 강종과 원덕왕후 유씨의 맏아들로 1212년(강종1)에 태자에 책봉되고 1213년 강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당시 최충헌이 실권을 잡고 있을 때였다. 명종, 신종, 희종, 강종이 모두 최충헌에 의해 폐위되고 왕위에 올랐다.

 

최충헌은 1170년 무신정변을 일으키고 의종을 폐휘시키고 명종을 즉위시킨 무신 집권자이다. 이의민을 제거하고 집권한 다섯번째 무인 집권자였으며 신종, 희종, 강종에 이르는 시간동안 고려 왕조의 실권을 맡았다. 고려는 1196년부터 1219년까지 23년간 최충헌의 나라였다.

 

 

 

고종이 재위한 1213년부터 1219년까지는 최충헌이 실권하였고 1219년부터 1249년까지 최우가 실권하였으며 1249년부터 1257년까지 최항이 실권하였다. 1258년(고종45) 최의가 살해되자 류경이 8개월간 실권을 맡았다가 이후 김준이 실권을 맡았다. 이렇듯 고종이 재위한 46년간 무인 집권자가 실권을 갖고 있었다.

최충헌은 부왕 강종의 서녀를 첩을 맞았기때문에 고종은 취충한의 적매형이었다. 또한 고종의 아들 원종의 장인 김약선은 최충헌의 아들 최우의 사위였다.

 

고종의 왕비는 21대 왕 희종의 딸 안혜태후 류씨이다. 고종과는 친6촌간으로 고려 후기에는 드물게 보여지는 근친혼이었다. 1211년(희종7)에 고종과 결혼하였고 1219년 아들 원종을 낳았다. 1232년(고종19)에 사망하였는데 고종은 그뒤로 따로 왕비를 두지 않았다고 한다.

 

고려 고종 가계도

 

 

최충헌에게는 두 아들 최우와 최향이 있었는데, 병석에 누운 최충헌은 두 형제간에 권력 다툼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자신의 곁에서 돌보던 아들 최우를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였다. 최우 역시 병을 핑계로 아버지를 찾지 않았다. 차남인 최향의 벼슬이 장남인 최이보다 높았으나, 최우가 최향의 부하들을 죽이고 최충헌 뒤를 이어 무신정권을 잡았다. 최충헌은 1219년(고종7)에 사망했는데, 당시 그의 장례식은 고려 임금의 장례식과 다를 바 없었다 한다.

 

최충헌의 뒤를 이은 아들 최우는 최충헌의 장남으로 최충헌이 죽자 뒤를 이어 집권했다. 인심을 얻기 위해 아버지가 모은 재산을 왕에게 바치고 아버지가 탈취한 공사의 전민과 재산들을 모두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어 민심을 얻었다. 최우는 1219년부터 1249년까지 30년 동안 고려 왕조의 실권을 맡았다. 원종의 장인 김약선이 최우의 맏사위이므로 충렬왕의 외외증조부가 된다.

 

드라마 무신 최우

 

1222년(고종9)에 최우는 북변의 여러 성과 개경의 황라성을 수축하여 몽고의 침입에 대비했다.

최충헌 사후 문신들과 왕실이 인사권을 장악해 나가자 1225년(고종12)에 정방을 자택에 설치하여 문신과 왕실로부터 관료의 인사권을 탈취하여 장악하였고 1227년에는 자택에 서방을 두어 문객 중 이름난 선비를 포섭하여 정치에 이용하였다.

 

1231년(고종18)부터 여러차례 몽골의 칩입을 받고 강화도에 천도하여 28년간 몽골에 항쟁하였다.(강화천도) 이때 최씨 집권자인 최우는 자기 재산을 강화에 옮긴 뒤 강화 천도를 단행하도록 하였다.

1235년(고종22) 3차 침입시 원은 남송을 공격하는 길에 따로 당올태에게 대군을 주어 다시 고려를 치게 하였다. 당시 권력집단인 최씨무인정권은 강화도에서만 방위에 힘쓰는 한편 부처의 힘을 빌려 난을 피하고자 대장경의 재조를 시작하였다. 팔최우는 개인 재산을 희사하여 대장경판 재조를 하였다 하는데, 이후에 전횡을 자행하고 횡포가 심해져서 백성의 원망을 샀다. 백성들이 몽골군의 침입으로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강화도에서 어용문신들과 더불어 연회를 즐기고 사치를 부렸다고 한다. 1249년 최우는 몽골과의 전쟁을 준비하다 그해 갑자기 사망했다.

 

 

 

최충헌 집권기인 1236년(고종23)에 강화에서 조판에 착수한 팔만대장경은 16년에 걸쳐 1251년(고종38)에 완성하였다. 팔만대장경은 대한민국 국보 제32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존하는 세계의 대장경 중 가장 오래된 것일 뿐 아니라 체재와 내용도 가장 완벽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최우가 죽자 최우의 서자인 최항이 집권하게 되었다. 원종의 비 정순왕후의 외삼촌으로 왕실의 외척이었다. 송광사에서 승려가 되어 쌍봉사 주지로 있다가 1248년 최우가 병이 들자 속세로 나왔다. 1249년 최우가 죽은 뒤에 정권을 인수하였는데 1251년 계모 대씨를 독살하고 그 일당을 죽였다. 다른 사람을 헐뜯는 말을 잘 믿어 무고 받은 자를 가차없이 추국하여 엄벌에 처했다고 한다. 1250년 주숙, 장군 김효정 등을 귀양 보내는 중 죽였으며 장군 최종필, 나주 부사 이균 등을 귀양보냈다.

 

1252년(고종39) 몽골의 사신 다가 등이 오는데 고종이 강화도에서 나와 육지로 올라와 사신을 맞으라고 요구하자 모든 신하들이 다 그대로 시행하기를 결의하였으나 최항이 홀로 거부하고 대리를 보내 맞이하게 하였다 한다.

 

 

 

1254년(고종41) 5차 칩임을 받았을 때 포로가 무려 약 206,820명이나 되었고, 원나라 황실에 태자의 입조를 약속하였다. 이로써 고려는 몽골에 굴복했다. 왕의 친조와 태자 왕전을 볼모로 보내며 강화가 성립되어 이후로 고려는 원나리의 속국으로서 공민왕 때까지 굴욕을 겪은 것이다.

 

1257년(고종44)에 최우는 갑자기 사망했다. 최우에게는 적자가 없었기에 송서의 종이 낳은 최의로 후사를 삼았다. 최의는 최씨 정권의 마지막 집권자였다. 1257년 아버지 최우가 죽자 교정별감이 되어 정방 정치를 인수했다. 최의는 현량한 선비를 잘 대우하지 않고 경박한 유능, 최양백 등과 사귀어 그들의 참소를 듣고 살육을 함부로 하여 나날이 비난이 높아갔다. 1258년 대사성 유경, 낭장 김인준, 별장 차송우 등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국정을 고종에게 돌리니 최씨의 60년 정권이 끝이났다.

 

1258년(고종45) 동북 지방에 쳐들어 온 몽고군에게 조휘와 탁청이 투항하면서 철령 이북 지역이 몽고의 쌍성총관부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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