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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대표작품

GoodFortune 2023. 6. 5.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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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

1452.4.15~1519.5.2

화가, 조각가, 발명가, 해부학자, 지리학자, 음악가로 기억되는 그의 대표작품을 정리해본다.

 

작품 완성 순서대로

암굴의 성모(1483, 1508) - 최후의 만찬 (1490년대) - 비트루비우스적 인간(1490년대) - 모나리자 (1500년대) - 성모와 아기 예수 (1510)

 

암굴의 성모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암굴의 성모는 1483년 암굴의 성모(루브르 박물관 소장)와 1508년 암굴의 성모(영국 박물관 소장) 두 작품이 있다. 

1483년 다빈치는 밀라노 형제회로부터 산 프란체스코 그란데 예배당의 제단화를 주문을 받아 그렸다. '왕관을 쓴 마리 아가 예수를 데리고 황금 제단에 앉아 있을 것, 두 예언자가 나올 것, 하늘에서 푸른색과 금색으로 차려입은 하느님이 그들을 바라볼 것, 두 천사가 나올 것, 모든 이에게 후광이 비칠것" 이라는 내용이 담긴 계약서가 현재에도 남아있다고 한다.

촉박한 8개월의 계약기간 후에 확인된 그림은 계약서의 내용이 표현되어 있지 않았고 소송을 걸게 되면서 약 20년 후 1506년 판결에 의해 다빈치는 두번째 암굴의 성모를 그리게 되었다. 그러나 두번째 암굴의 성모도 첫번째와 큰 차이가 없다. 어린 세자 요한이 십자가를 들고 있고, 천사 우리엘의 손짓이 없어진 것, 성모의 옷 색깔이 밝아진 것 정도이다.

 

왼쪽이 1483년 암굴의 성모(루브르 박물관), 오른쪽이 1508년 암굴의 성모(영국박물관) 작품이다.

 

두번째 암굴의 성모가 완성되었을 때 형제회는 그의 그림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지만 다빈치의 높아진 위상으로 미술 애호가들은 이 작품에 찬사를 보내었고 형제회는 이 그림을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한다.

두 작품이 함께 전시되고 있으면 더욱 좋았을 텐데 한 작품은 프랑스, 한 작품은 영국에 있어 아쉽다.

 

 

최후의 만찬

1490년 작품으로 이탈리아 밀라노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식당 벽화이다.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에 가면 예약한 후에 벽화를 볼 수 있다.

후원자 루도비코 스포르차 공의 요청으로 그린 그림으로 가로 880cm, 세로 460cm의 거대한 작품이다. 1495년부터 1498년까지 3년에 걸쳐 완성된 작품으로 레오나르도의 그림 중 몇 안되는 완성작이다.

1495년 밀라노 군주 '루도비코 스포르차'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 수도원 식당 벽화를 의뢰하여 그려진 그림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템페라 화법'으로 벽화를 그렸는데 계란 노른자와 안료를 섞어 그리는 기법으로 보통 목판화에 많이 쓰이는 방식이었다. 안료와 섞은 계란이 곰팡이에 취약하고 벽화는 시간이 가면서 훼손이 심하게 생겼다. 많은 과학기술로 작품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사라질 수도 있다고 한다.

1977년부터 22년간 복원작업이 이루어지며 복원 화가들이 80%를 그리고 다빈치가 20%를 그렸다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댄 브라운의 베스트셀러 '다빈치 코드'에서 예수 오른쪽 인물이 '사도 요한'이 아니라 '마리아 막달레나'로 나오기도 하지만 이 그림은 예수와 열두 제자를 그린 그림이다.

 

비트루비우스적 인간

1490년경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스케치로 인체비례도라는 이름으로 알려져있다. 고대 로마 건축가 마르쿠스 비트루비우스 폴리오에게 영감을 받은 작품으로 작품명이 비트루비우스적 인간이다. 비트루비우스는 로마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새로운 로마의 설계를 맡은 건축가로 인간을 하나의 우주로 생각했고 인체의 비례를 새로운 로마의 설계에 적용했다.

다빈치가 비트루비우스의 저서에 영감을 받아 작업을 시작하였으나 다빈치는 인체의 정확한 비례를 실측해서 인체 비례도를 완성했으며 1000여 점의 인체 해부도를 남겼다.

 

 

 

모나리자

 

1503~1506년 사이의 작품으로 현재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 중이다. 세로 77cm, 가로 53cm로 실제로 보면 작은 크기에 이 그림이 왜 이렇게 유명해졌지?하는 의문이 생긴다. 세계에서 가장 널리 알려지고 이 작품을 보기 위한 방문객이 가장 많다고 한다.

모나리자의 모나는 이탈리아어로 유부녀에 대한 경칭이고, 리자는 피렌체의 부유한 상인 조콘다 부인 이름이다. 그림의 주인은 리사 게라르디니로 판명되었다.

모나리자의 초상화는 눈썹이 없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에는 여러가지 해석이 있다. 넓은 이마가 미인을 상징하여 여성들이 눈썹을 뽑았다는 설도 있고, 미완성작이라는 설과 눈썹이 있었으나 복원 과정에서 지워졌다는 설도 있다.

1911년 대낮에 루브르박물관에서 모나리자 작품이 도난 당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범인은 루브르 박물관 직업으로 작품의 유리 케이스 만드는 일을 하던 빈첸초 페루자였다. 빈첸초 페루자는 이탈리아인으로 레오나르도의 작품이 이탈리아에 반환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범죄를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모나리자는 페루자의 집 난로 밑에 2년간 숨겨져있다가 이탈리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의 관리인에 팔려고 하다가 잡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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