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혜-정-광-경-성-목-현-덕-정-문-순-선-헌-숙-예-인-의-명-신-희-강-고-원
-충렬-충선-충숙-충혜-충목-충정-공민-우-창-공양
순종 (고려 12대 왕)
1047-1083
재위 1083년 (3개월)
선종 (고려 13대 왕)
1049-1094
재위 1083-1094
순종은 문종과 인예왕후의 장남 왕훈이다. 1054년 8세의 나이로 태자에 책봉되었다가 1083년 7월 문종이 죽자 37세의 나이로 12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순종은 어려서부터 질환이 있었고, 아버지 문종의 죽음을 너무나도 슬퍼한 나머지 심신이 쇠약해져 재위 3개월만에 승하하였다.
순종은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서인지 소생이 없었다.
1왕비는 정의왕후 왕씨로 고려 8대 왕 현종과 원혜왕후 소생의 평양공의 딸이었다. 문종과 평양공은 동복 형제사이로 정의왕후와 순종은 친사촌간 혼인이었다.
2왕비는 선의왕후 김씨로 김양검의 딸이다. 순종이 태자로 있던 시절에 후비로 뽑혀 입궁하여 태자의 총애를 받았으나 시아버지인 문종이 선의왕후를 매우 미워하여 문종에 의해 쫓겨났다.
3왕비는 장경궁주 이씨로 문종 때 문하시중에 올랐던 이자연의 손녀, 이호의 딸, 이자겸의 누이이다. 순종이 즉위 3개월만에 사망하면서 궁 밖에서 살게 되었는데 이때 궁 안의 궁노와 간통한 일이 발각되어 폐비되었다. 오빠인 이자겸은 당시 왕비의 오빠라는 이유로 음서로 관직에 올라 합문지후의 직책에 있었는데, 장경궁주의 간통으로 이자겸도 연좌되어 파직되었다. 이자겸은 1108년 예종 3년 그의 딸이 예종의 왕비 문경왕후로 책봉되면서 복귀하였다.
순종이 후사없이 3개월만에 죽자 동생 왕운(=선종)이 즉위하였다. 순종은 문종과 인예왕후의 차남이었다. 선종의 집권기에는 불교와 유교의 균형적인 발전을 토대로 매우 안정되었으며 외교에서도 거란을 포함한, 송, 일본, 여진 등과 광범위한 교역을 추진하여 주도권을 행사했다. 1084년 승과를 설치하고 불교를 장려하였다.
순종의 1왕비는 정신현비로 이자연의 동생인 이자상의 손녀이다. 정신현비의 딸은 경화왕후로 훗날 고려 16대 왕 예종의 왕비가 된다. 2왕비는 사숙왕후로 이자연의 셋째아들인 이석의 딸이었다. 1094년 선종이 승하하고 아들인 헌종이 즉위하자 11세의 어린 헌종을 대신하여 섭정을 하였다. 사숙태후는 자신이 살던 궁전을 중화전이라 부르게 하고 자신의 독자적 정치 기구인 영녕부를 설치하였는데 이로 인해 왕권이 약화되고 이자의가 반란을 일으키는 등 국가적 혼란이 일으나게 되어 섭정을 거두는 일이 있었다. 3왕비는 원신궁주로 이자연의 손녀이다. 후에 계림공(=숙종)의 정변에 오빠인 이자의가 처형되면서 출궁당했다. 이렇듯 순종의 3명의 왕비는 모두 이자연 집안의 딸들이었다.
왕윤의 어머니인 선종의 3왕비 원신궁주는 입궁 초기 아이를 낳지 못하여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원신궁주의 꿈에 두 도승이 나타나더니, "우리는 장지산 남쪽 기슭 바위 틈에 사는 사람들인데 배가 몹시 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 고 하고는 이내 사라졌다. 한편 꿈에서 깬 원신궁주는 이를 이상하게 여기고 선종에게 고하였다. 선종은 즉시 장지산 쪽에 사람을 보내어 알아보았는데, 다녀온 자가 보고하기를, "장지산 아래쪽에 커다란 바위 두개가 나란히 서 있다." 고 하였다. 이에 선종은 두 바위에 원신궁주의 꿈에 나타난 두 도승을 새겨넣게 하고, 인근에 절을 지어 불공을 드리게 하였다. 그러자 얼마 안 되어 원신궁주가 임신을 하고 아들을 낳았는데, 이때 태어난 아들이 곧 왕윤이었다는
그러나 해당 불상은 정작 조선 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이를 증명하는 1471년(조선 성종 2년)에 쓰여진 조성문이 남아있다. 이를 두고 동국대학교의 교수 이한성은,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조선 세조의 이야기를, 역시 조카의 왕위를 찬탈했던 고려 숙종의 이야기에 빗대어 그 속내를 표현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 라는 추측을 하기도 하였다[10].
1085년 동생인 의천(문종의 4남)이 몰래 송나라에 들어가 2년간 불법을 공부하고 돌아오자 송나라에서 항의하였으나 선종은 사절을 보내 이를 무마시켰다. 의천을 태운 배가 예성강 포가에 도착하자 선종은 친히 나가 환영의식을 성대하게 하였는데 의천은 불경과 경서 1000권을 바쳤고 흥왕에 교장도감을 세울 것을 건의하였다. 송, 요, 일본 등지에서 서적을 사들여 거의 4000권에 달하였는데 모두 간행하게 하였다.
1089년 회경전에 13층 금탑을 세우고, 인예왕후의 청에 따라 천태종의 중심사찰인 국청사를 짓게 하였다
1092년 병이 들어 의원이 처방한 약을 먹고 시를 지었는데
"약효가 있고 없음이야 무엇을 염려하랴.
덧없는 인생 시작이 있었으면 어찌 끝이 없으리.
오직 원하는 것은 여러가지 선행을 닦아
청청한 곳에 올라 부처에게 예를 드림이네"
라는 구절이 있어 만백성이 안타까워 하였다.
1094년 열병을 한 뒤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 헌종이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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