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중 한국 독립운동단체는 아래와 같이 사회주의 계열과 민족주의 계열로 나뉜다. 이번 포스팅은 민족주의계열의 정당들을 설명하고, 창당, 해체의 배경과 후에 어떻게 발전하는지 알아본다.
- 사회주의계열 :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민족전위동맹 조선혁명자연맹
- 민족주의계열 :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한독당) 1930-1935 1937-1970
초대 대표 : 조소앙
1930년 1월 상하이에서 결성된 대한민국 보수정당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여당이다.
조소앙, 홍진, 조시원이 중심이 되어 창립되었다. 1935년 해체를 선언한 뒤, 신한독립당, 의열단, 조선혁명당과 함께 민족혁명당(민혁당)으로 통폐합 되었다. 그러나 민혁당이 사회주의 계열의 김원봉과 의열단에 의해 주도되자 조소앙은 민혁당을 탈당하고 한국독립당을 재건하였다. 해체 당시 민혁당에 참가하는데 반대했던 김구는 한국국민당을 창당했다. 1937년 3월 지청천은 민혁당을 탈당하고 조선혁명당을 창당했다. 한국독립당은 한국국민당과 조선혁명당과 논의하여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하였고 1940년 한국국민당과 조선혁명당을 한국독립당으로 통합했다. 광복 후 한국민주당과 함께 양대 보수정당이 되었다.
1948년 5.10 총선거 당시 김구 중심의 한국독립당이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여 불참하자,이승만 계열의 한국민주당이 대다수 의석을 차지하였다. 1949년 주요 세력인 신익희가 민주국민당으로 갔고, 조소앙이 탈당하여 사회당을 창당, 이시영, 이범석 등은 이승만 진영으로 가며 와해되었다. 김구 사망 이후 조완구가 당 위원장으로 추대되었지만 한독당은 김구와 함께 사라져갔다. 1962년 한독당을 지키던 김홍일을 중심으로 한 일파에서 야당을 선언하면서 재건되었으나 지지를 얻지 못했다. 1970년 야당통합에 따라 신민당, 민주국민당으로 흡수되었다.
한국국민당 1935-1940
1935년 11월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엄항섭, 안공근과 함께 임시정부를 옹호기 위하여 임시정부의 여당격인 한국국민당을 창당했다. 1940년 한국독립당으로 통합되었다.
조선혁명당 1929-1935 1937-1940
1929년 일본 제국주의를 박멸하여 한국의 절대 독립을 이룬다는 목적으로 길림성에서 결성되었다. 현익철, 현정경, 이웅, 고이허 등이 출범 당시 간부로 활약했으며 1935년 민족혁명당으로 통합되었다가 1937년 조선혁명당이 재창당되었다. 이후 1940년 한국독립당으로 통합되었다.
정당들의 창당, 해체, 합당의 흐름은 아래 그림과 같다.
민족혁명당(민혁당) 1926, 1935-1947
상해 임시정부를 둘러싼 독립운동 단체들을 통일하여 5당이 모여 결성되었다. 1926년 창당시에는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단체였다. 1935년 해외단체를 통합하고 주의, 사상을 초월한 공동전선으로 단합할 것을 목적으로 김규식, 신익희가 중심이되어 한국독립당(김두봉, 조소앙 등), 조선혁명당(최동오, 김학규 등), 의열단(김원봉, 윤세주 등), 신한독립당(지청천, 신익희 등), 미주대한독립단(김규식)을 통합해 1935년 재창당했다. 2200여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참여하였다. 민족혁명당은 중국 국민당으로부터 받는 지원금 문제로 김원봉파와 지청천파 사이에 갈등이 생겼고, 1937년 지청천파 사람들은 사회주의자를 비판하게 되고, 지청천이 당에서 제명되었다. 이후 지청천은 조선혁명당을 재창당했다. 조소앙 일파도 탈당하여 한국독립당을 재창당했다. 신한독립당계의 홍진, 조성환도 탈당하여 한국독립당에 합류하면서 내부 분열에 시달렸고 의열단의 확대조직으로 변질되었다. 이후 194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가를 결의했고, 남아있던 사회주의계열은 조선독립동맹을 찾아갔다.
한국민주당(한민당) 1945-1949
미군정기와 대한민국의 보수주의적, 부르주아적 자유주의 정당이다.
광복 직후인 보수 인사들과 지주, 미국과 유럽 유학생 출신들이 각자 정당을 조직했다. 1945년 9월 고려민주당(조선민족당), 한국국민당 등이 조직되었는데 이를 하나의 조직을 만들기 위해 합당하여 조직된 정당이다.
초기에 송진우, 김성수, 장덕수, 조병옥, 윤보선 등이 참여했다. 초대 당수는 송진우였는데 3개월만에 암살되고, 다음 당수 장덕수 또한 2년 후 암살당했다.
한민당은 지주와 함께 친일파 세력을 상당수 포섭했기에 민중들로부터 지지기반이 약했다. 한민당은 창당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식 정부'로 맞이할 것을 다짐하고, 건국준비위원회를 비난 공격했다. '조선인민공화국의 타도' 성명서를 발표하여, 건국준비위원회를 타도하고 조선인민공화국과 인민윈원회,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 등의 좌익 집단을 성토, 타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45년 신탁통치에 반대하였으나 송진우는 신탁통치의 불가피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다. 12월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반도에 대한 남북한 분할 신탁통치가 결정되었고, 송진우는 김구와 만나 신탁통치 불가피론을 주장했다. 그날 새벽 송진우는 청년단의 저격을 받고 암살당했다. 미군정청 하지 사령관은 송진우 암살의 배후로 김구를 지목하고 김구를 소환하여 경고했다. 송진우 암살 이후 김구, 한국독립당과 갈등하게 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대론을 취소했다. 1947년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 여부로 김구와 갈등하였는데 몇개월 후 총격을 받고 사망하였다. 이 일의 배후로 지목된 김석황은 한국독립당 소속이었다. 1948년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론을 지지하였으하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참가했지만, 초대 내각 구성 때 재무장관직 1석만 받게되자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이 되며 야당화되었다. 1949년 대한국민회, 대동청년단과 통합하여 민주국민당을 창당하면서 흡수해체되었다. 민주국민당은 민주당의 모태가 된다.
대한국민당 1948-1958
신익희, 윤치영 등에 의해 친이승만계 정당으로 창당되었다. 최고위원인 신익희가 이승만과 멀이지면서 한민당의 김성수 제의를 받아들여 1949년 민주국민당 결성에 참여하면서 사라졌다. 이후 이승만 대통령을 지지하는 세력이 1949년 11월 9개월만에 다시 부활시켰고, 자유당이 창당되기 전까지 여당 역할을 수행했다. 자유당이 창당된 뒤에도 친여 성향의 야당으로 존재했다.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추진하려던 민주국민당에 대하여 자유당과 함께 공동대응했다. 이후 민주국민당과 합당하였다.
민주국민당 1949-1955
한국민주당의 후신으로 창당된 정당이다. 한국민주당과 대한국민당이 통합하였고, 한국독립당 일부를 포섭하였다. 위원장 신익희, 조남윤, 부위원장 김도연, 이영준, 고문 백남훈, 서상일, 조병옥으로 조직했다. 야당으로 출발한 민주국민당은 이후 1955년 민주당에 흡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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