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것이힘이다/근현대사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당선되기까지

GoodFortune 2019. 8. 21.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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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1875-1965

대한민국 제 1.2.3대 대통령

 

이 포스팅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당선 이전까지의 내용을 담았다.

 

 

이승만은 1875년 황해도에서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3남 2녀 중 막내였으나 두 형이 요절하여 6대 독자가 되었다. 아버지 이경선은 양녕대군의 다섯째 서자 장평도정 이흔의 15대손이었지만 계승권에 밀려 가난하게 살면서 이승만은 조선왕조에 비판적이었다고 한다.

1877년 한성으로 이사하여 자랐으며 한성부의 도동서당을 다니며 수학했다. 어려서 음죽 박씨 박춘겸의 딸과 결혼하였는데 아들 이봉수가 요절하면서 관계가 소원해졌고 해방 후 이혼했다.

 

1895년 배재학당에 입학을 하였다. 처음에는 선교사가 운영하는 학교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으나, 배재학당에서 공부하면서 일본이의 지배에 반대하는 한국의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1895년 을미사변에 대한 원수를 갚겠다며 당시 친미, 친러, 개화파가 고종을 왕궁 밖으로 탈출을 하려고 시도 하였는데(춘생문 사건) 이 일로 황해도로 도피하여 누이 집에서 3개월간 피신하기도 하였다.

 

1896년 귀국한 서재필의 강의를 듣고 가까이 하게 되었다. 1898년 만민공동회에서 앞장서 활동하며 서재필, 이상재, 윤치호와 자주 만나 교류하였다. 서재필은 이승만에게 미국 유학을 적극 권하였다.

 

 

1898년 4월 한국 최초 일간지 <매일신문>을 창간하였고, 8월에는 이종일과 함께 한글 신문 <제국신문>을 창간하였다. 11월 익명의 투서 사건으로 군주게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도입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고 독립협회 간부 17인이 체포되자 이승만은 배재학당 학생들과 대중을 동원하여 농성을 벌여 독립협회 간부들을 석방시키는데 성공했다. 12월 독립협회의 전단지에 '광무황제는 연령이 높으시니 황태자에게 자리를 내 주셔야 한다'라고 쓰인 문구가 문제되어 1899년 1월 박영효 일파의 대한제국 고종 폐위 음모 가담으로 체포되었고, 1904년 특별 사면령으로 석방되었다. 그는 한성감옥에서 투옥 중 성경책을 통해 영어공부를 했고, 죄수들과 간수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한글과 영어를 가르쳤다.

 

석방된 후 고종을 만나보라는 요청을 거절했고, 고종이 보낸 궁녀 또한 만나지 않았다. 이승만은 '역대 군주들 가운데 가장 허약하고 겁쟁이 임금 중의 한 사람'이라며 나라를 망친 고종과는 상종도 하지 않겠다 했다. 민영환에게 받은 밀서를 받아서 미국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11월 미국으로 갔다.

 

1905년 미국 신문 워싱턴포스트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의 한국 침략을 폭로했다. 2월 워싱턴 D.C의 조지워싱턴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1905년 8월 뉴욕의 루즈벨트 대통령 별장에서 루즈벨트 대통령과 만나 밀서를 전달했고, 대통령은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밀서가 아닌 워싱턴의 한국공사관에 제출하라고 권했다. 주미 한국공사관 김윤정은 일본에 포섭되어 있었기에 이승만의 요청을 외면했다.

 

이후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승만을 만나주지 않았고,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미국이 한반도에 손을 뗐다고 판단한 이승만은 공부에 전념했다.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하여 학사 학위를 받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 1910년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에서는 박사가 없었던 까닭에 대통령이 된 뒤에도 사람들은 그를 이승만 대통령 보다는 이승만 박사라고 불렀다.

 

1908년에 장인환, 정명운 의사가 대한제국의 외교 고문으로 활동하던 친일파 미국인 더럼 스티븐슨을 저격, 암살하여 미국 법정에 서게 되었는데, 미주의 한인들이 두 의사를 변호하기 위해 재판을 도왔다. 그때 이승만에게 법정 통역을 요청하였으나 그는 변호비용을 3000달라의 거액을 요구했다. 한인들이 3000달라를 모아서 이승만에게 가져갔으나 그는 끝내 거절했다 '예수교인으로 살인 재판 통역을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였지만 이후 전명운에 대한 변호를 거부한것에 대해 비판을 받았다.

 

 

1910년 재미 한인교포 독립운동 단체인 국민회에 가입했고 잠시 한국에서 선교사 생활을 하였으나 다음해 미국으로 돌아갔다. 1913년에는 국민회와 박용만의 초청으로 하와이로 건너가 정책했다. 박용만은 한성감옥에서 만나 독립운동에 뜻을 함꼐 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105인 사건을 폭로하는 <한국교회 핍박>을 출간하였고, 하와이 감리교회가 운영하는 한인기숙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했다. 이승만은 한인기숙학교를 한인중앙학원이라 고치고 민족교육을 했는데 미국인 감리교 감리사가 이승만의 민족교육에 반대하자 그는 새로운 학원을 차려 태극기를 걸어놓고 민족교육을 했다.

 

1914년 박용만은 국민군단을 창설하여 군사력을 양성하고자 했으나 이승만은 무장투쟁에 반대하여 두 사람은 멀어지게 되었다. 당시 국민회는 최대 인력과 자금력을 가진 독립운동 단체였다. 이승만은 국민회 회장 선출과 자금 사용 내역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국민회와 대립하게 되었다. 1918년 박용만이 일본군 선박 출운호를 폭파하려 한다는 혐의로 하와이 법정에 서게 되었는데 이승만은 증인으로 출석하여 국민군단을 비난했다. 그후 국민군단은 해체되고 박용만은 하와이를 떠났다. 이승만 반대자도 많았지만 지지자들에게 존경을 받고 국민회를 장악하게 되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추대되었고, 3.1운동의 열기로 한인자유대회가 열리자 연사로 참여하였다. 일본 제국은 이승만에게 30만 달러의 현상금을 걸었다. 이승만은 워싱턴 D.C에 대한공화국 임시공사관을 설치했다. 대한인국민회는 이승만 추대 촉하식을 열었는데, President 칭호 사용이 상하이에 알려지자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논란이 발생하였다. 임시정부의 내부무 총장 안창호는 그에게 전보를 발송하여 대통령 호칭을 사용하지 않도록 하였다. 9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은 대한민국 임시 헌법을 공포하고 대통령제를 도입하였다. 임시 대통령을 국가 대표로 한다고 하였고, 이 헌법에 따라 국무총리였던 이승만이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상하이 임시정부 요청으로 1920년에 상하이에 갔으나 다음해 하와이로 돌아갔다. 1921년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일로 독립운동가들과 갈등하게 되었다. 1925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탁핵 의결로 대통령직에서 면직되었다.

 

1921년 이승만대통령 환영식 - 가운데가 이승만 대통령이고 오른쪽이 안창호, 왼쪽이 이동휘이다.

 

이후 이승만은 구미외교위원부에 활동하며 미국, 유럽, 국제연맹 등에 한국의 독립을 청하는 성명서를 보냈다. 임시정부는 구미위원부 폐지령을 발표했으나 이승만은 무시한 채 구미위원부를 가동했다. 구미위원부의 폐지령에 반발한 이승만은 임시정부로 보내는 송금줄을 차단하고 미국 교포들에게도 송금하지 말것을 요청했다.

 

임시정부는 자금난에 시달렸고, 김구는 1928년 이승만에게 자금 요청 편지를 보냈다. 이승만은 임시정부와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일부 자금을 임시정부에 송금했다.

 

1932년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윤봉길이 폭탄을 투척해 의거를 일으켰을때 이승만은 어리석은 짓이라며 윤봉길의 의거를 비판했다. 국민대표자대회 이후 임시정부에 반이승만 세력이 사라지면서 이승만은 임시정부에 후원금을 지속적으로 보냈다.

 

 

1933년 이승만은 이동녕 내각에 의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보선되었다. 임시정부 일부 반대가 있었지만 외교 활동을 위한 이승만의 역할이 크다는 이동녕, 김구의 주장이 있었다. 이후에도 이승만은 미국에서 강연과 컬럼을 통해 독립운동을 하였다. 1934년 프란체스카 도너와 결혼하였다. 1939년 조선에 입국하여 경성부 YMCA강당에서 강연을 하였는데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이승만을 체포하려 하였으나 선교사들에 의해 도피하여 다시 하와이로 되돌아갔다.

 

1940년 3월 김구가 주석으로 취임한 후, 대한제국 임시정부로부터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승인 받았다. 1941년 미국과 일본이 전쟁상태로 들어가자 이승만은 미국 측에 임시정부 승인 요구를 전달했다. 이승만은 미국 국무부에 소련이 장차 한반도를 점령할 것이라고 경고하였으나 미국은 소련과의 관계를 걱정하여 거절했다. 1942년 한국에 우호적인 미국인들과 한미협회를 조직하였다. 그뒤에도 미국에 임시정부 승인을 계속해서 요청하였다. 1944년 미국 체신청이 태극마크가 들어있는 우표를 공식 발행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1945년 이승만

 

1945년 루즈벨트 대통령이 한반도를 소련에 양도해 주었다는 정보를 접한 뒤 이승만은 소련을 맹공격하는 선전을 하였다. 이 일로 소련은 이승만과 임시정부를 적대시하게 되었고, 미국 국무부와도 대립하게 되었다. 8월 소련은 이승만을 반소적인 인물로 지목하고, 정치과정에서 이승만의 참여를 배체하기로 계획했다. 8월 15일 일본의 항복이 발표된 후, 이승만은 귀국하려 하였으나 미국국무부가 여권을 내주지 않아 2개월간 발이 묶이게 되었다. 10월 16일 이승만은 한국에 도착했다. 도착 후 이승만은 미 군정청장 존 하지에게 임시정부를 정부 자격으로 귀국하게 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수락하지 않았다. 이승만 또한 자신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부를 세우겠다는 뜻이 있었기에 임시정부가 인정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민주당이 창당되면서 허정은 이승만을 영수 추대하려고 하였으나 이승만은 거절했다.

 

11월 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 제1진이 귀국하였고, 이승만은 축하 성명을 발표했다. 12월 방송을 통해 공산주의자들의 파괴행동에 경계가 필요하다며 공격했다. 12월 모스크바 삼상회의로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김구와 함꼐 신탁통치를 반대했다.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에 반대하였고, 2월 대한민국 비상국민회의가 개최되어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에서 모스크바 결정을 지지하지 않는 반탁세력은 임시정부 구성에서 제외하겠다고 하여 이승만은 미군정의 압력으로 서명에 동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미소공위 반대가 계속되자 미군정은 골치아파했고, 이승만을 정치적으로 제거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1946년 12월 이승만이 미국을 방문하였을 때 김구와 임시정부 세력은 독자적으로 정부수립을 하려고 하였고, 이승만은 이를 알고 비판하였다. 1947년 이승만은 귀국하였고, 환영대회에서 입법위원이 총선거 법안을 만들어 남한 과도정부, 즉 단독정부를 수립해야 하며 김구의 임정법통론과 좌우합작론을 포기하라며 주장했다. 이승만과 김구는 반탁투쟁을 계속 하였지만 김구와 이승만의 목표는 달랐다. 이승만은 남한 단독선거를 주장했고, 김구는 이를 비판했다. 김구는 1947년 12월 한민당 내 이승만 지지자였던 장덕수 암살 배후로 지목되어 미군정에 소환당했고, 이승만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승만은 대응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한민당과 연대하여 독자적으로 '한국민족대표단'을 구성했고, 배신감을 느낀 김구는 단독정부 절대반대와 한국민족대표단 해산을 주장했다. 이승만은 김구를 장덕수 암살 배후로 지목했고, 김구는 검찰에 연행되어 수모를 당한 후 이승만과 결별했다. 김구와 이승만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어 서로 비난하게 되었다. 

 

1948년 1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한국에 도착하자 이승만이 마중나가 연설했다. 회의 중 UN 위원단 단장인 인도인 메논이 북한과의 좌우합작을 요구하는 발언을 시작하자 대회장을 박차고 퇴장했다. 남로당 중앙위원회는 '제국주의자의 앞잡이가 되어 조국의 분할 침략계획을 지지하고 나라를 팔아먹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김성수를 인민으로부터 고립, 매장시키지 않으면 안된다'고 비판했다.

 

이승만은 1948년 5월 10일 국회의원 선거에서 동대문구 갑에 단독으로 입후보하여 무투표 당선되었다. 1948년 5월 31일 구성된 제헌국회는 최고령자인 이승만을 제1대 제헌국회 의장으로 선출했고, 윤보선은 국회의장 비서가 되었다. 한민당에 의해 내각책임제가 언급되자 이승만은 대통령중심제를 고집했다. 이후 1948년 7월 20일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 김구, 안재홍, 서재필 등을 누르고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49년 친이승만계 정당 대한국민당이 창당되었고, 이승만 직계정당인 자유당이 1952년 창당되었다. 그는 반공, 반일적 정치성향으로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수립하고자 하는 의견을 묵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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