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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황실의 합스부르크 가문

GoodFortune 2022. 10. 22.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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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4년 나폴레옹의 프랑스 황제 즉위에 맞서 오스트리아를 제국으로 높이고 오스트리아 황제로 프란츠 1세가 즉위하며 오스트리아 황실이 시작되었다.

 

프란츠 1세(신성로마 제국 프란츠 2세)

1768~1835 재위 1804~1835

 

레오폴트 2세와 스페인의 마리아 루도비카의 아들이다. 1792년 아버지가 사망하며 프랑스 대혁명 시기에 황제의 자리에 있었다. 유럽의 다른 국가들과 동맹을 맺어 프랑스에 대항했으며 나폴레옹이 프랑스 황제로 즉위하자 오스트리아를 제국으로 높여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당시 유럽의 다른 나라 왕들에게도 황제로 즉위하라고 권유했지만 무시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1805년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프랑스에 대패하며 1806년 나폴레옹의 협박으로 신성 로마제국이 해체되며 오스트리아의 황제 자리만 유지하게 되었다. 1810년 딸 마리 루이즈를 나폴레옹과 결혼시키기도 했다.

네 번의 결혼(뷔르템베르크의 엘리자베트, 마리아 테레사, 외스터라이히에스테의 마리아 루도비카, 바이에른의 카롤리네 아우구스테)을 하였으며 4남 9녀의 자녀를 두었다.

 

 

페르디난트 1세

1793~1875 재위 1835~1848

 

신성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프란츠 2세(오스트리아 황제로는 프란츠 1세)와 마리아 테레사의 장남이다.

1830년 아버지 프란츠는 페르디난트에게 헝가리 왕위를 양위하였으나 실권은 아버지에게 있었다. 1831년 사르데냐 왕국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의 딸 마리아 안나와 결혼했으나 자녀가 없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심각한 신체적 정신적 장애가 있었다.

1835년 프란츠가 사망하자 오스트리아의 황제로 즉위했으나 무능력했기 때문에 국무협의회에 의해 정사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섭정 정치 때문에 1846년 농민 소요사태로 시작된 혁명의 움직임이 전 제국에 퍼졌다. 1848년 빈과 인스부르크에서 일어난 소요사태로 페르디난트는 빈을 탈출하였고 퇴위를 선언하였다.

황제의 자리는 그의 조카 프란츠 요제프가 이었다.

 

 

프란츠 요제프 1세

1830~1916 재위 1848~1916

 

프란츠 1세의 아들 프란츠 카를과 바이에른 왕녀 조피의 아들이다. 1848년 큰아버지 페르디난트 1세가 퇴위하게 되며 18세의 젊은 나이에 황제 자리에 올랐다. 1849년 10월 러시아 군대의 도움을 받아 헝가리 혁명을 진압하였다. 프란츠 요제프는 헌법을 파기하고 새로운 절대주의를 도입하였는데 이를 주도한 내무대신 바흐의 이름을 따서 바흐 절대주의라고 부르게 된다.

1853년 이종사촌인 바이에른의 공녀 엘리자베트와 결혼하여 1남 3녀를 두었다.

그 시기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군을 이끌고 멕시코를 점령하였는데, 그의 형 막시밀리안은 프랑스의 멕시코 제국 초청으로 1864년 멕시코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멕시코를 점령하는데 실패하였고 프랑스는 멕시코에서 퇴각하고 막시밀리노는 총살되었다.

1866년 프로이센과 이탈리아가 연합하여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이 시작되며 오스트리아는 위기에 처하게 되며 의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전제정치는 종결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성립되었다.

1889년 외아들인 황태자 루돌프와 애인 마리 베체라의 자살사건이 있었고 1898년에는 황후 엘리자베트가 암살당하였다.

루돌프에게는 외동딸 엘리자베트 마리아가 있었으나 살리카법에 따라 제위를 계승할 수 없었다. 그녀는 프란츠 요제프의 유일한 친손녀로 미모가 상당했다고 한다. 유럽 여러 왕실과 많은 혼담이 오갔지만 엘리자베트는 슈탄데스헤어 출신의 오토와 결혼하였다. 그녀는 여러 자녀를 두었지만 이혼하였고 평민과 재혼하며 왕실에서 제외되었다.

외아들 루돌프가 사망하며 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추정상속자가 되었으나 1914년 사라예보 사건으로 암살당했다. 사라예보 사건으로 세르비아를 침공해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을 일으켰으나 2년 뒤 1916년 사망했다.

그의 후계는 또다른 조카 오토 프란츠의 아들 카를 1세가 잇게 되었다.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딸 엘리자베트 마리아

 

 

 

카를 1세 (카를 8세)

1887~1922 재위 1916~1918

마지막 황제

 

카를 루트비히의 차남 오토 프란츠의 장남이다. 추정상속자인 큰아버지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사라예보 사건으로 암살당하며 제위와 관련이 없는 인물이었지만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뒤를 이어 오스트리아-헝기라 제국의 황제로 즉위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신분이 낮은 여성과 결혼을 하여 그의 자식들에겐 제위 계승권이 없었고 아버지 오토는 41세로 사망하여 황위 계승 서열 1위가 된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진행중이던 시기에 황제에 오른 카를 1세는 제국을 안정시키는데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오스트리아의 각 민족들은 분리독립을 원하였다. 카를 1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연방 국가로 만들려 했지만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폴란드 등 여러 신생국가로 분할되었다.

1918년 카를 1세는 오스트리아의 정무에서 물러났고 1919년 스위스로 망명하였다가 포르투갈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지타 마리아와 결혼하여 5남 3녀를 두었다. 지타는 합스부르크가의 마리아 테레지아의 6대손이기도 하다. 그의 장남 오토(1912~2011)는 유럽의회의 의원을 지내며 정치인으로 활동하였고, 장손 카를(1961~)은 현재 합스부르크로트링겐가 수장을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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