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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합스부르크 가문

GoodFortune 2022. 10. 20.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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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 가문은 오스트리아 가문으로도 불린다.

유럽 왕실 가문 중 가장 영향력 있던 가문 중 하나이다.

1438년부터 1806년까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나왔으며 오스트리아 왕실을 600여년간 다스렸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프랑스 왕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유럽 왕실과 연결되어 있으며 프랑스 왕비 또한 합스부르크 가문과 연결되어 있었다. 루돌프 1세는 황제 대관식은 하지 못하였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의 첫 독일왕이었다.

연대표에는 루돌프 1세를 합스부르크 가문의 첫 신성로마 제국 황제로 보기도 하고, 프리드리히 3세를 합스부르크 가문의 첫 신성로마 제국 황제로 보기도 한다. 루돌프 1세와 알브레히트 1세 이후에 룩셈부르크 가문과 비텔스바흐 가문의 황제가 선출되었으며 룩셈부르크 가문의 지기스문트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의 알브레히트 2세가 독일왕 자리를 차지했다. 알브레히트 사망 후 합스부르크 가문의 프리드리히 3세가 왕위를 이었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었다.

 

프리드리히 3세

1415~1493 재위 1452~1493

독일왕 1440~1493

 

합스루브크 가문의 프리드리히 3세는 루돌프 1세의 5대손이자 알브레히트 1세의 4대손이다. 고조모 엘리자베트는 잘리어 왕가 로타르 3세의 후손이 되기도 하다.

1439년 합스부르크 가의 최고 서열이 되었고, 6촌인 알브레히트 2세가 사망 후 독일왕에 선출되었다. 즉위 후 친척들과 제후들의 반란에 시달렸다. 프리드리히 3세는 알브레히트 2세의 아들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부스(헝가리와 보헤미아의 국왕)의 훅견인을 자처하여 그의 왕위 계승권도 노렸으나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귀족들의 반항으로 포기해야 했다. 이후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부스 사망 후 왕위를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보헤미아와 헝가리 의회는 각자 자신의 국왕을 선출했다.

1452년 이탈리아로 가서 황제위에 올랐으며 포르투갈의 두아르트의 딸 엘레오노라 공주와 결혼했다. 

1480년 헝가리에서 오스트리아를 침공해 영토를 점령했으며 1485년 빈이 함락당하며 프리드리히는 간신히 도망쳤다. 아들 막시밀리안을 독일왕으로 임명했고 1490년 헝가리 마티아슈 1세가 사망하며 막시밀리안은 오스트리아를 되찾는데 성공했다. 

 

 

막시밀리안 1세

1459~1519 재위 1508~1519

독일왕 1486~1519

 

프리드리히 3세와 포르투갈의 엘레오노라의 아들이다.  1477년 부르고뉴 공국의 마리와 결혼해 공동통치자가 되었다. 1482년 부인 마리가 사망했으나 장남 필리프의 섭정을 계속하였고 프랑스의 루이 11세와 아라스 조약을 체결하여 프랑스에게 부르고뉴 공작령을 내어주고, 막시밀리안은 플랑드르, 네덜란드, 룩셈부르크를 차지했다. 이 때 8살 된 딸 마르가레테와 루이 11세의 외아들 샤를 8세를 약혼시켰으나 1490년 샤를 8세가 브르타뉴를 침공하며 약혼은 파기되었다. 

1486년 아버지와 함께 독일 공동왕위에 올랐으며 1493년 아버지 프리디리히 3세가 사망하며 단독 독일왕이 되었다.

1494년 밀라노 공국 비앙카 마리아 스포르차와 결혼하였다.

프랑스의 샤를 8세가 이탈리아로 침공하여 나폴리 왕국을 점령하자 막시밀리안 1세는 교황 알렉산데스 6세의 제안으로 교황, 베네치아 공화국, 밀라노, 아라곤 왕국과 동맹을 체결하여 제국 강화를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군을 몰아내지 못하였고, 아라곤과 카스티야 왕국의 계승권을 위해 장남 필리프를 트라스타마라 왕가의 공주 후아나와 결혼시키고, 트라스타마라 왕가의 후안과 딸 마르그리트를 결혼시켰다. 후안 왕자가 결혼 6개월만에 급서하고 마르그리트의 유복자도 사망하며 트라스타마라 왕가의 장녀였던 포르투갈의 왕비 아라곤의 이사벨에게 계승권이 넘어갔다. 이후 이사벨이 아들을 낳다가 사망하고 아들 미겔도 요절하며 후아나가 후아나 1세로 카스티야의 여왕에 즉위하고 아들 필리프는 공동왕으로 즉위했다. 필리프는 이듬해 병으로 사망했으나 1516년 손자 카를이 카를로스 1세로 카스티야와 아라곤 왕국의 왕위에 올랐다.

1519년 사망하며 왕위는 손자 카를 5세(카를로스 1세)에게 이어졌다.

 

 

카를 5세

1500~1558 재위 1530~1556

독일왕 1519~1531

이탈리아왕 1530~1556

스페인 국왕 1516~1556 (카를로스 1세)

 

필리프(펠리페 1세)와 후아나 1세의 아들이다. 조부모는 신성로마 황제 막시밀리안 1세와 부르고뉴의 마리아이며, 외조부모는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이다.

1516년 어머니 후아나와 함께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공동 통치자로 선언되었다.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을 물려받으며 최초의 스페인 국왕으로 여겨진다. 

또한 그녀의 누이들은 유럽 각지의 왕비가 되었다. 엘레오노르는 프랑스 프랑수아 1세의 왕비, 엘리자베트는 덴마크 크리스티안 2세의 왕비, 마리는 헝가리와 보헤이마 러요시 2세의 왕비, 카탈리나는 포르투갈 주앙 3세의 왕비가 되었다.

1519년 조부 막시밀리안 1세가 사망하자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합스부르크 왕조 영토를 모두 물려받았고 황제 후보자가 되었다. 경쟁자인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를 제치고 독일 왕위에 올랐고 1530년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대관식을 치루었다. 

합스부르크와 부르고뉴, 스페인의 유산을 모두 물려받은 카를은 중유럽, 서유럽, 남유럽의 광대한 영토를 갖게 되었다. 그의 제국은 '태양이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리기도 한다.

치세의 많은 부분을 이탈리아 반도를 놓고 프랑스와 전투하였다. 1521년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와 전쟁하였고, 1525년 밀라노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수아 1세를 사로잡으며 마드리드 조약을 체결하여 부르고뉴를 받았다. 1535년 밀라노 공작이 후계없이 죽으며 카를 5세가 밀라노를 접수하였으나 프랑수아 1세는 자신의 아들 펠리페를 그 자리에 앉히려고 하여 또다시 전쟁이 일어났고, 1542년에는 프랑수아 1세가 오스만 제국의 술탄 쉴레이만 1세와 동맹하였고 카를 5세는 헨리 8세와 연합하여 전쟁이 일어났다. 그 뒤 1551년 프랑수아 아들 앙리 2세가 전쟁을 일으키키도 했다.

1522년 잉글랜드 헨리 8세의 딸 메리 공주와의 약혼을 비롯하여 여러 주변국들과 약혼과 파혼을 거듭하다 1526년 사촌인 푸르투갈의 이사벨라와 결혼하였다. 2남 1녀를 두었으며 장남은 스페인 국왕이 되었고 장녀 마리아는 사촌인 신성로마 제국의 막시밀리안 2세와 결혼하였다.

1556년 카를은 퇴위하며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스페인 왕국을 물려주고, 동생 페르디난트에게 신성로마 제국을 물려주었다.

 

 

페르디난트 1세

1503~1564 재위 1556~1564

 

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이자 카를 5세의 동생이다. 

1520년 형 카를 5세가 왕위에 오른 후 오스트리아 통치권을 넘겨받고 형의 대리인으로 독일을 다스렸다.

1526년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왕 러요시 2세가 모하치 전투에서 전사하자 자신의 부인 안나가 그의 동생임을 이유로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였고 보헤미아의 왕이 되었다.  또한 1527년 크로아티아 귀족들의 만장일치로 크로아티아 국왕 자리도 차지했다.

1531년 선제후들에 의해 독일왕에 선출되었는데, 1550년 형 카를 5세가 자신의 장남 펠리페 2세를 차지 황제로 내세우기 시작했다. 선제후들은 이를 거부하였고 페르디난트는 1556년 형 카를 사후에 황제에 즉위했으나 대관식은 형 사후 1558년에 이루어졌다.

페르디난트 1세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시조가 되는데 합스부르크 제국은 1526년부터 1918년까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통치한 영토를 말한다.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헝기라, 크로아티아 등이 이에 속한다.

페르디난트는 1560년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장남 막시밀리안이 섭정이 되었으며 1564년 사망했다.

 

 

막시밀리안 2세

1527~1576 재위 1564~1576

 

페리드난트 1세와 안나의 장남이다. 카를 5세의 딸 마리아와 결혼했는데 결속력 강화를 위한 합스부르크가의 근친혼은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마리아와의 사이에서 황제에 오른 루돌프 2세와 마티아스를 포함한 16명의 자녀를 두었다. 딸 안나는 삼촌인 펠리페 2세의 네번째 부인이 되었으며 펠리페 3세의 어머니이다. 딸 엘리자베트는 프랑스 샤를 9세와 결혼하였으나 자녀는 없었다.

 

 

루돌프 2세

1552~1612 재위 1576~1612 

 

막시밀리안 2세와 마리아 사이의 아들이다. 1572년 헝가리 국왕, 1575년 보헤미아의 왕이 되었다. 아버지 사망 후 1576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1593년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빈까지 위험에 빠졌으며 루돌프 2세의 무능함으로 동생 마티아스에게 전쟁 종결을 위해 전권을 주게 되었다. 마티아스는 굴욕적인 평화조약을 체결했으나 헝가리인들의 지지를 받아 루돌프 2세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루돌프 2세는 보헤미아로 달아나 마티아스와 화해하며 헝가리 왕위, 오스트리아 대공위를 넘겼다. 

루돌프 2세는 마티아스에 대항하려고 했으나 귀족들은 루돌프 2세를 지지하였고, 보헤미아인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마티아스는 군대를 이끌고 루돌프 2세의 보헤미아 왕위마저 빼앗았다.

루돌프 2세는 껍질 뿐인 황제위만 유지한채 프라하 궁전에 연금되어 있다가 사망하였다.

 

 

마티아스

1557~1619 재위 1612~1619

 

막시밀리안 2세와 마리아의 아들이다. 1593년 형 루돌프 2세로부터 오스트리아 총독이 되었다.

합스부르크 왕가 내 신성 로마 제국 황제위에 대한 갈등이 심해지고 있었고 마티아는 능력을 인정받아 황제위 계승자임을 인정받았다. 마티아스는 헝가리인들의 지지를 받아 형 루돌프 2세를 압박하여 1608년 헝가리 왕위와 오스트리아 대공위를 받았다. 1611년에는 보헤미아인들의 지지로 보헤미아 왕위에 오르고 루돌프 2세 사망 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었다.

페르디난트 2세의 딸 안나와 결혼하였는데 자녀가 없었기에 후계가 문제가 되었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마티아스의 사촌인 슈타이어마르크 대공 페르디난트를 황제위 계승자로 올리기 위해 1617년 보헤미아의 군주로 선출시켜 왕위에 올렸다.

마티아스는 1619년 빈에서 사망 후 페르디난트 2세가 후계를 이었다.

 

 

페르디난트 2세

1578~1637 재위 1619~1637

 

카를 2세와 바이에른의 마리아 아나의 아들로 페르디난트 1세의 손자이다. 어머니 마리아 아나는 페르디난트 1세의 손녀딸로 삼촌 카를 2세와 결혼한 것이다. 둘 사이에서 페르디난트 2세를 포함한 15명의 자녀를 두었다.

페르디난트 2세는 1600년 마리아 아나 폰 바이에른 공녀와 결혼하여 7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페르디난트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사망하였다. 1622년 엘레오노라 곤차가와 두번째 결혼을 하였다.

사촌인 마티아스가 후계가 없었기에 1617년 합스부르크 왕가 귀족들에 의해 선출되어 보헤미아의 국왕이 되었고 1618년 헝가리 국왕이 되었다.  페르디난트는 가톨릭 세력을 키우기 위해 신교도들을 탄압하였고, 보헤미아 신교도들은 이에 반발하여 30년 전쟁이 시작되었다. 1619년 황제의 자리에 오른 페르디난트는 가톨렉 세력의 지지로 신교도군을 격파하고 반종교개혁을 단행했다. 30년 전쟁 초반에는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을 영입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1630년 스웨덴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프랑스로부터 군자금을 받아 독일을 침략했다. 페르디난트 2세에 대항하는 신교도 군대는 스웨덴까지 가세하며 상황이 좋지 않았다. 1632년 뤼첸 전쟁에서 스웨덴은 승리했지만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전사하였고,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교황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세력 확장을 견제하여 국제 전쟁으로 커지게 되었다.

페르디난트 2세는 1637년 전쟁 중 사망하였으며 페르디난트 3세는 신교도 세력에 패하고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30년 전쟁이 끝나게 되었다.

 

페르디난트 3세

1608~1657 재위 1637~1657

 

페르디난트 2세와 바르에른 공녀 마리아 아나의 아들이다. 30년 전쟁 중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이 암살당한 이후 제국군을 제휘했다.

1637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었다. 프르디난트 3세는 프랑스, 스웨덴과 평화를 원했으나 전쟁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끝이 났다.

3번의 결혼을 하였는데 첫번째 부인 스페인의 마리아 안나로부터 2남 1녀를 두었다. 마리아 안나는 스페인 펠리페 3세와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리타의 차녀로 스페인 펠리페 4세와 남매가 된다. 장남은 페르디난트 4세로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국왕이 되었고 차남 레오폴트 1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위를 이었다. 장녀 마리아나는 스페인 펠리페 4세와 결혼하여 스페인 왕비가 된다.

가계도를 보면 신성로마제국 황실의 딸들은 스페인의 왕비가 된 경우가 많았다. 막시밀리안 2세의 딸 안나, 페르디난트 2세의 누아 마르가레테, 페르디난트 3세의 딸 마리아나가 그러하다.

두번째 부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레오폴디네로부터는 자녀가 없었으며 세번째 아내 엘레오노라 막달레나 곤자가에게 두 딸을 두었는데 엘레노르 마리아 요제파는 폴란드 왕비, 마리아 안나 요제파는 팔츠 선제후비가 되었다.

엘레노르의 손자가 훗날 로트링겐 가문의 황제 프란츠 1세가 된다.

 

 

레오폴트 1세

1640~1705 재위 1658~1705

 

페르디난트 3세와 스페인의 마리아 안나의 차남이다. 형 페르디난트가 1654년 사망하며 후계자가 되었다. 1657년 페르디난트 3세가 사망하자 프랑스의 추기경 마자랭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제 즉위를 막으려 노력했으나 레오폴트 1세는 1658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었다. 그는 46년이 넘는 기간동안 황제의 자리를 지켰다. (합스부르크 황제 중 가장 긴 통치기간이다.)

재위기간 동안 많은 전쟁을 치뤘다. 당시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네덜란드에 대해 공격적인 정책을 하였고 레오폴트 1세는 1671년 루이 14세와 중립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1672년 레이폴트 1세는 네덜란드와 동맹하여 전쟁에 참가하고,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스페인의 왕과 독일의 여러 제후와 동맹하여 프랑스와 대립하였다. 1678년 상황이 불리해지기 시작했고 1679년 프랑스에 유리한 네이메헌 조약을 제결하며 전쟁이 종결되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프랑스는 다시 전쟁을 일으켰다.

1686년 레오폴트 1세와 신성 로마 제국 제후들은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해 아우크스부르크 연맹을 이루었고 1689년 잉글랜드, 스페인, 덴마크, 브란덴부르크 등 대동맹이 결성되었다. 이는 9년 전쟁이라고 불리는 전쟁이다. 전쟁이 계속 되며 프랑스는 군비 지출로 재정난이 심각해졌고, 전쟁 끝 무렵에는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의 병세가 악화되어 스페인 왕위가 위태로웠다. 프랑스와 동맹국의 상황이 안좋아지자 레이크베이크 조약으로 전쟁이 종결되었다. 이후 스페인의 왕위가 프랑스 왕자 필리프에게 이어지자 또 다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일어났다.

3번의 결혼을 하였는데 첫번째 결혼은 스페인 펠리페 4세와 마리아나의의 딸 마르가리타 테레사이다. 마리아나는 레오폴트 1세의 누이이므로 조카와 결혼한 근친혼이다. 2남 2녀 중 딸 한명만 성인까지 자랐으며 바이에른의 선재후 막시밀리안 2세와 결혼하였다. 마르가리타가 사망 후 오스트리아의 클라우디아 펠리치타스와 두번째 결혼을 하였고 2녀를 낳았으나 둘 다 요절했다. 세번째 결혼은 팔츠 선제후 필리프 빌헬름의 딸 엘레오노레 막달레네와 하였고 요제프 1세와 카를 6세를 포함하여 10명의 자녀를 낳았다.

레오폴트 1세는 3번의 결혼을 통해 총 4남 16녀를 낳았는데 두 아들은 요절하고 생존한 두 아들이 요제프 1세와 카를 6세이다.

 

 

요제프 1세

1678~1711 재위 1705~1711

 

레오폴트 1세와 세번째 아내 엘레오노레 막달레네의 장남이다.

1699년 브라운슈파이크뤼네부르크 공작 요한 프리드리히의 딸 아말리아 빌헬미네와 결혼하였다. 1705년 아버지 사망 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에 올랐다.

1711년 천연두에 걸려 33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였다. 요제프 1세 아들이 없었기에 (1명의 아들은 요절함) 동생 카를 6세가 황제 자리를 이었다. 요제프 1세와 아말리아 빌헬미네의 딸 마리아 아말리아는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과 결혼하였다.

훗날 카를 6세 또한 딸만 낳자 후계자 문제가 생기게 된다. 카를 6세의 딸 마리아 테레지아가 추정상속인이 되자 마리아 아말리아와 카를은 이에 반대하여 프랑스 편에 섰고 1742년 요제프 1세의 사위인 비텔스바흐 가문의 카를은 카를 6세를 이어 황제가 되었고 딸 마리아 아말리아는 황후가 된다.

 

 

카를 6세

1685~1740 재위 1711~1740

 

레오폴트 1세와 세번째 아내 엘레오노레 막달레네의 아들이다. 아버지 재위시 일어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카를로스 2세가 후계 없이 사망하며 카를은 스페인 왕위 계승자를 주장하였지만 스페인의 왕위는 프랑스의 왕자 필리프(펠리페 5세)가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에도 카를은 스페인에 머무르며 왕위를 주장하였다.

1708년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와 결혼하였다. 1711년 형 카를이 아들 없이 사망하게 되며 카를은 스페인 왕위를 포기하고 신성로마 제국 황제 자리에 올랐으며 합스부르크 가문의 마지막 황제이다.

아들은 일찍 요절하였고 세 딸만 있었는데 장녀 마리아 테레지아를 상속인으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으나 조카인 마리아 아말리아의 남편 카를에게 황제를 내주었다. 카를 6세 사망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 로트링겐 가문의 프란츠가 황제 자리를 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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