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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로마제국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

GoodFortune 2022. 10. 21.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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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로마 제국의 요제프 1세와 카를 6세가 남자 후계 없이 사망하며 카를 6세는 딸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제위 계승을 하려고 노력했다. 요제프 1세의 딸 마리아 아말리아와 그녀의 남편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은 이에 반발하며 프랑스 편에 섰고 비텔스바흐 가문의 카를 7세가 황제 자리에 올랐다.

요제프 1세와 카를 6세의 두 딸 마리아 아말리아와 마리아 테레지아는 여자 제위 계승 불가로  황제의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둘 다 황후가 될 수 있었다.

비텔스바흐 가문의 카를 7세 이후에는 로트링겐 가문으로 이어졌기에 이 포스팅에 카를 7세도 같이 기록한다.

로트링겐가문과 합스부르크가와 혈연 관계가 되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으로 부르기도 한다.

 

 

 

카를 7세

1697~1745 재위 1742~1745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과 테레사 쿠네군다 소비에스카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의 딸이다.

1722년 신성로마 제국 요제프 1세의 딸 마리아 아말리아 와 결혼하였다. 1726년 아버지 사망 후 바이에른 선제후로 즉위하였다. 요제프 1세의 뒤를 이은 카를 6세가 아들 없이 사망하자 그의 딸 마리아 테레지아가 추정상속인이 되었다. 이에 반발하여 합스부르크 상속권을 요구하며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일으켰다. 

카를은 프랑스와 동맹을 하여 1742년 황제 선출에서 당선되었고 대관식을 거행하며 황제의 자리에 올랐지만 오스트리아의 공격으로 바이에른의 수도까지 점령당하는 상황이 되었다. 프랑스의 도움으로 바이에른을 탈환했지만 전쟁 후유증에 시달렸으며 아들 막시밀리안 요제프는 오스트리아와 강화를 원했다. 

카를 7세는 황제에 올랐지만 신성로마 제국 황제로서의 삶을 살지 못하고 프랑스에 의존해 자리만 유지하다 1745년 사망했다. 

 

 

프란츠 1세

1708~1765 재위 1745~1765

 

로렌 공작 레오폴 1세와 엘리자베트 샤를로트(프랑스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의 딸)의 아들이다. 할머니 엘레노르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3세의 딸이었다.

젊은 시절 오스트리아로 유학을 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6세의 딸 마리아 테레지아를 만나 연애결혼을 하였다. 그 시절 보기 드문 연애결혼이었다. 결혼 후 오스트리아에 궁전에 남아 생활하였는데, 궁중 사람들에게 마리아의 하수인 취급을 받기도 했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당시 마리아가 오스트리아 대공과 헝가리 여왕에 즉위했음에도 부군 자격을 얻지 못하였다.

1745년 마리아 테레지아는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며 프란츠 1세가 황제 자리에 올랐다. 여자는 황제 자리에 오를 수 없는 살리카 법에 따른 것이었다. 황제 자리에 올랐지만 실권은 부인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1세는 16명의 자녀를 낳았다.

아들 요제프 2세는 원수의 딸인 마리아 아말리아의 아들 마리아 요제파와 결혼하였고, 레오폴트 2세는 스페인 공주 마리아 루도비카와 결혼했다.

딸 마리아 안토니아는 프랑스 루이 16세와 결혼한 마리 앙투아네트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혁명으로 공개처형 당하였다.

1765년 갑작스럽게 병에 걸려 사망했다.

 

 

요제프 2세

1741~1790 재위 1765~1790

 

프란츠 1세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들이다. 즉위 초기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와 함께 공동통치를 하였고 1780년 어머니 사망 후 단독통치를 하였다. (40살까지 어머니의 통치 아래 있었던 것이다.)

1760년 요제프 2세는 루이 15세의 외손녀 파르마 공국의 마리아 이사벨라와 첫번째 결혼을 하였다. 요제프가 이사벨라의 초상화를 보고 반하여 결혼을 고집했다고 한다. 이사벨라는 우울증이 심해 황제의 가문에 적응하지 못하였고 3년 후 둘째아이를 낳다 사망했다. 이사벨라의 첫 딸 또한 어린나이에 사망했다.

이사벨라 사망 후 1765년 부모의 대립했던 마리아 아말리아의 딸 마리아 요제파와 결혼했으며 사이가 좋지 않았다. 요제프는 아버지에게 마리아 요제파가 뚱뚱하고 못생겨서 싫다는 편지를 썼다고 한다. 요제파는 자녀 없이 1767년 천연두로 사망했다.

요제프 2세는 계몽전제군주적 성향을 띄며 많은 개혁을 추진했다. 농노제를 폐지하고 모든 종교를 평등하다는 원칙을 수립했다. 이러한 개혁으로 로마 가톨릭 교황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요제프 2세에게 후계자가 없어 동생 레오폴트가 후계자가 되었다.

 

 

레오폴트 2세

1747~1792 재위 1790~1792

 

프란츠 1세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3남이다. 스페인 카를로스 3세의 딸 마리아 루도비카와 결혼하였다.

아버지 프란츠 1세 사망 이후 1765년 토스카나 대공이 되어 20년이 넘는 기간동안 토스카나 대공국을 통치했다. 요제프 2세 사후 신성로마 제국 황제에 오르며 토스카나 대공국은 차남 페르디난도 3세에게 물려주었다.

프랑스 혁명을 이유로 프랑스와 동맹을 파기하였고 영국과 동맹을 맺어 프랑스 상황을 주시했다.

재위 2년만에 갑자기 사망하였다. 레오폴트 2세는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 재위기간은 짧았지만 존경받는 군주로 여겨진다. 한 역사가는 "왕관을 착용한 가장 영리하고 현명한 군주 중 하나"로 평가했다.

마리아 루도비카와의 사이에서 12남 4녀를 두었고, 황제 자리는 장남 프란츠 2세에게 이어졌다.

 

 

프란츠 2세

1768~1835 재위 1792~1806

 

레오폴트 2세와 마리아 루도비카의 장남으로 토스카나 대공국에서 태어났다. 1792년 아버지가 갑자기 사망하며 왕위를 계승하였다. 다른 유럽 국가들과 동맹을 맺어 반프랑스 정책을 펼쳤다. 제1차 제2차대프랑스 동맹에서 패하였다. 나폴레옹이 프랑스 황제로 즉위하자 오스트리아를 제국으로 높이고 오스트리아의 황제가 되었다. 1805년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대패하며 1806년 나폴레옹의 협박으로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었다. 1810년 딸 마리 루이즈를 나폴레옹과 결혼시켰다. 이후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서 패하자 1813년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해 1814년 프랑스 제국을 붕괴시켰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지만 오스트리아 초대 황제가 되며 오스트리아 제국을 통치했다.

뷔르템베르크 공녀 엘리자베트와 결혼하여 1녀,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와 결혼하여 4남 8녀를 두었다. 

마리 루이즈는 나폴레옹과 결혼하여 나폴레옹 2세를 낳고 프랑스 황후가 되었으며 장남 페르디난트 1세는 오스트리아 황제를 계승했다.

 

프란츠 2세의 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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