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5-1408
재위 1392-1398
태조 이성계의 고려 말 활동 배경에 대해 설명한다.
이성계는 고려 공민왕(1330-1374) 시기부터 급부상한 신흥무장 세력이었다. 이성계는 고려 귀족 출신이 아니라 원나라의 지배를 받던 쌍성총관부 지역에서 힘을 키워가던 변방 세력이었다. 쌍성총관부는 원나라가 1258년 고려에 침입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차지한 후 설치한 통치 기구였다. 철령 이북의 땅은 공민왕이 수복하기 전까지 100여년을 원나라의 지배하에 있었다.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는 원래 전주 지역의 향리였는데, 가솔을 끌고 쌍성총관부 지역으로 이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성계가 고려의 중앙 조정에 데뷔하게 된 것은 공민왕의 반원 정책 덕분이었는데, 공민왕이 1356년 원나라에 잃어버렸던 땅, 쌍성총관부를 수복하려 하였고, 이 때 쌍성총관부 지역을 탈환할 수 있도록 도운 사람이 바로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이었다.
외침에 시달리고 내부로는 권문세족의 득세로 왕권이 약화되어 군사 조직이 붕괴하고 국가 재정은 어려웠던 고려 말, 탄탄한 사병 조직을 갖고 있고 인맥과 경제력이 만만치 않았던 이성계 가문이었다.
이성계의 조선 건국 힘은 이성계 집안의 군사력이라 할 수 있는데, 그의 군사력은 원나라 지방 세력의 일부에서 시작되었다. 원나라가 약해지면서 그의 부친 이자춘이 집안의 군사력을 고려에 귀속시켰다.
부친 이자춘의 노력으로 고려의 중앙 무대에 오른 이성계는 자신의 능력에 힘입어 두곽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361년 독로강 만호 박의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이성계는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10만 명의 흥건적이 수도 개경을 함락시켰지만 이성계는 고려인과 여진족으로 구성된 자신의 사병 조직을 이끌고 수도 탈환에 참가하였다. 흥건적의 두목을 모두 활로 쏘아 죽이고, 개경에 맨 처음 입성하는 큰 공을 세웠다. 이듬해에는 원나라 장수 나하추의 침입을 물리쳤으며, 1364년에는 공민왕을 폐하려는 원나라 황제의 명령으로 침입한 덕흥군과 최유의 1만 군대를 최영과 함께 무찔러 고려 왕실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이성계의 활동은 동북쪽 뿐 아니라 삼남 지역의 왜구 침입을 막아내는 데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왜구를 황산에서 섬멸함으로써 그의 명성은 하늘을 찌르게 된다. 이 전투를 황산대첩 이라고 한다.
이성계가 처음 역사의 중심에 등장하는 시기는 위화도 회군이다. 1388년(우왕 14년) 명나라가 고려 접경 지역에 철령위를 설치해 갈등이 발생했다. 요동을 차지하려는 고려와 압록강을 국경으로 삼으려는 명의 갈등이 나타난 것이다. 이 지역은 원나라 지역이었으나 공민왕5년에 고려과 탈환하여 통치하고 있었다. 명나라의 무리한 요구에 대해 당시 고려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최영은 명나라에 강하게 반발하고 요동에 대한 원정을 준비했다. 우왕과 최영은 5만 여명의 군사를 징발하여 요동정벌군을 구성하였고, 총사령관 최영, 좌군 도통사 조민수 우군 도통사 이성계가 이끄는 요동정벌군은 압록강 하류의 위화도에 도착한다.
요동정벌군은 위화도에 진을 쳤는데 압록강 하류 물이 불어나 강을 건너기 어려워 진군을 중단하고 14일을 머물게 되었다. 이성계는 조민수와 상의하여 4불가론을 앞세워 요동정벌을 중단할것을 요구하였으나 우왕과 최영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진군하라 명한다.
4불가론
① 작은 나라로 큰 나라를 거스르는 것은 옳지 않다.
②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옳지 않다.
③ 온 나라의 병사를 동원해 원정을하면 왜적이 허술한 틈을 타 침범할 염려가 있다.
④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이므로 활의 아교가 풀어지고 병사들도 전염병에 시달릴 염려가 있다.
서경에 있던 우왕과 최영이 허락치 않자, 이성계는 조민수와 모의하여 5월 22일 회군을 결행하였다. 우왕과 최영은 서경을 떠나 개격으로 돌아가 반격을 준비하였으나, 이성계와 조민수가 이끈 반란군은 위화도를 떠난지 9일만에 개경까지 진군하여 2일 후 개경을 함락시키고 우왕과 최영을 사로잡았다.
이성계와 조민수는 우왕을 폐위시키고 강화도로 유배하였고, 최영은 고봉(경기도 고양)으로 유배하여 처형하였다. 우왕의 아들인 창왕을 왕으로 세우고 조민수는 우시중, 이성계는 좌시중의 지위에 올랐다. 위화도에서 이성계가 조민수에게 "우왕을 폐위시키고 왕씨의 후손을 세우자"고 회유한것으로 보아 이때는 자신이 왕이 되겠다고 나설 수 없었다.
조정 주도권을 두고 이성계와 조민수는 대립하였으나 군사력과 정치적 반도 확보하고 있던 이성계가 승리하였다. 이성계는 조민수를 유배하였고, 조민수와 이색의 추대로 왕위에 오른 창왕을 신돈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며 폐위시키고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을 새로 왕으로 세웠다.
후에 공양왕을 밀어내고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는 우왕, 창왕, 공양왕 3명의 왕을 폐위시키고 조선을 세우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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