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것이힘이다/조선역사

성종과 폐비 윤씨 그리고 연산군

GoodFortune 2019. 7. 9.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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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조선 9대 임금)

1457-1494

재위 1469-1494

 

연산군

1476-1506

재위 1494-1506

 

성종의 이름은 혈이며 세조의 손자로 의경세자(추존 덕종)와 소혜왕후 한씨의 둘째 아들이다. 처음에 자산군에 봉해졌다가 뒤에 자을산군으로 고쳤다. 1469년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아버지 덕종이 일찍 세상을 떠나 세조의 둘째아들인 예종이 조선 8대 임금으로 올랐는데 몸이 약한 예종은 재위 1년도 넘기지 못하고 20세에 죽었다. 이때 왕실에서 실권을 잡고 있는 사람은 세조의 후비 정희왕후였는데, 원로대신 신숙주의 추천으로 자을산군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성종의 즉위 초기에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원로대신 신숙주, 한명회, 구치관, 최항 등이 원상이 되어 국정을 보필하였다.

성종은 영의정으로 있던 한명회의 딸과 결혼하여, 한명회는 자연스럽게 임금의 장인으로 권력을 누리게 된다.

 

성종은 성품이 너그럽고 총명하여 할머니인 정희황후 윤씨, 어머니인 소혜왕후 한씨, 숙모인 안순왕후 한씨를 위해 잔치를 자주 베풀었다. 형님인 월산대군에 항상 미안한 생각을 품고 있었기에 지금의 덕수궁 터에 큰 저택을 지어 월산대군이 편히 살도록 하였다.

 

 

성종은 판봉상시사 윤기무의 딸을 숙의로 들였는데, 윤씨는 얼굴이 아름답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윤씨는 성종의 사랑을 한몸에 독차지했다.

 

성종은 백성들에게 "주요순 야 걸주"라 불리었는데 낮에는 요와 순임금처럼 어진 정치를 베풀고, 밤에는 중국 하나라의 걸과 은나라의 주임금처럼 술과 여자를 좋아하고 놀기를 좋아한다는 의미이다.

성종은 명철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동국여지승람' 등의 편찬과 '경국대전'의 완성의 업적을 남겼고, 수많은 후궁과 슬하에 16남 12녀 등 모두 28명의 자녀를 낳은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1474년(성종5년) 왕비 한씨가 세상을 떠났는데 2년 후 성종은 숙의로 있던 윤씨를 왕비로 정하였고, 윤씨는 왕비가 된지 4개월 후 성종의 뒤를 잇는 아들인 연산군을 낳는다. 윤씨는 보잘것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성품이 모질고 질투가 심했다. 그녀의 교만과 사치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는데 임금이 후궁의 처소로 들어가는 날이면 그날 밤은 뜬눈으로 보내기가 일쑤였다.

 

성종 8년 3월 어느날, 한글로 쓴 편지가 궁궐 밖에 있는 권 숙의 집에 전해졌는데, 후궁 정 소용과 엄 숙의가 비밀리에 뜻을 모아 윤비와 원자를 살해하기로 계획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권 숙의는 편지를 승정원으로 보냈고 임금에게 전달되었다. 이 일을 전해 들은 윤비는 두 후궁을 없앨 계획을 세우고 독약으로 쓰이는 비상을 마련하여 간직해 두었다. 어느날 성종이 윤비의 처소에 갔다가 비단주머니 안에 비상과 함께 있는 정 소용과 엄 숙의를 저주하는 내용이 쓰여있는 종이를 보게 되고, 그것들을 갖다준 종년을 신문하다가 윤비의 어머니가 꾸민 일이란 것을 알게 된다. 성종은 윤비의 어머니인 신씨의 직첩을 빼앗고, 종년은 교수형에 처했으며, 윤비를 별궁에 머무르도록 하였다.

 

어느날 별궁에 머물던 중전과 성종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는데 중전이 손톱으로 할퀴어 성종의 얼굴에 손톱 자국이 나게 되었다. 전부터 사이가 안좋았던 인수대비가 이 일로 크게 노하여 우의정 윤필상에게 중전을 폐위시켜 궐 밖으로 내보내도록 당부하였다. 1479년 어전회의에서 중전의 지위를 빼앗고 궐 밖으로 내보낼 것이 결정되었다. 이때 성종은 중전의 폐비 문제에 반대를 했던 홍귀달, 김승경, 이경동, 김계창, 채수 등을 옥에 가두었다.

 

인수대비는 후에 원자가 폐비에 대해 알게될까 두려워 성종에게 거짓 사실을 들어 윤씨를 헐뜯기 시작했고, 성종은 숙의로 있던 윤호의 딸을 중전으로 맞이하였다. 대신들이 폐비에 대한 선처를 아뢸 때마다 성종은 매우 불쾌히 여기며 옥에 가두는 일도 있었다. 폐비의 선처를 호소하는 상소문이 그치지 않자 성종은 폐비에게 사약을 내린다.

 

폐비가 사약을 마실 때 코와 입에서 붉은 피가 흘러 금삼을 적시기 시작했는데, 친정어머니에게 금삼을 간직했다가 원자가 보위에 오르거든 금삼을 보여주고 사연을 들려주라 부탁하였다.

원자 나이 4세에 중전이 쫓겨나고 7세에 폐비가 죽었으니 원자는 어머니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인수대비와 성종은 불안한 마음에 원자의 생모에 대한 사실을 철저히 단속했다.

 

 

원자 나이 8세이던 1486년 성종 14년, 왕세자로 책봉이 되고 12세에 병조 판서 신승선의 딸을 세자빈으로 정하였다.

 

성종이 사슴 한마리를 구해다 궁 안에 기르던 사슴이 있었다. 세자가 어느날 성종을 만나러 갔는데  사슴이 손과 얼굴을 핥으며 반가운 시늉을 하자 세자는 발길로 사슴의 배를 걷어차는 바람에 사슴이 고꾸라졌다. 세자의 무자비한 행동을 보고 성종과 신하들은 놀라였는데 성종의 꾸지람에 세자는 아무말 못하였으나 후에 왕위에 오른 세자는 제일 먼저 화살을 쏘아 그 사슴을 죽여 버렸다.

 

세자는 유명한 학자인 서거정을 스승으로 삼았다가, 그가 늙어 떠난 후 조지서와 허침을 스승으로 삼았다. 조지서는 성격이 강하고 남을 용서할 줄 몰랐는데 세자라 할지라도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엄하게 꾸짖었다. 반면 허침은 성격이 온순하고 부드러웠다. 어느날은 조지서가 글을 가르치려고 세자 방으로 가자 벽에 "대성인은 허침이요 대소인은 조지서라" 라고 쓰여있었다고 한다. 후에 세자가 즉위하자 조지서는 지방관이 되기를 청하여 창원 군수로 갔으나 얼마 후 벼슬을 던져 버리고 지리산 속에 숨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던 중 연산군 10년에 일어난 갑자사화에 관련되어 극형을 당했고 시신은 강물에 던져졌으며 재산은 몰수되었다. 반면 허침은 연산군 등극한 후에 우의정이 되었다가 좌의정까지 지냈고 무사히 일생을 마쳤다.

 

세자는 13세에 세자빈을 맞았음에도 젊은 궁녀와 하루도 즐기지 않은 날이 없었다. 16세에는 곽린의 딸을 데려와 양원이라는 벼슬을 준 뒤에 세자궁의 궁녀로 두기까지 했다.

 

1494년 성종이 37세로 세상을 떠나자 창덕궁에서 세자의 즉위식이 거행되었는데 이때 세자 나이 18세였다.

 

연산군의 가계도

 

즉위한지 3개월 후 연산군은 선왕의 무덤인 선릉에 올릴 글을 읽어 보다가 판봉상시사 윤기무(폐비의 아버지)라는 이름과 폐비에 관한 사실이 쓰여 있는것을 발견했다. 연산군은 승지를 불러 윤기무에 대해 물었고, 연산군은 외할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 듣게 되었다. 폐비가 사약을 받은 이유가 궁금하였지만 분명한 이유를 알 수 없었고 유학자들의 상소로 어머니가 그렇게 되었다 여기고 유학자들을 미워하게 되었다.

 

연산군 4년 1498년 일어난 무오사화에서 연산군은 김종직의 관을 파헤쳐 그 시체의 목을 베는 부관 참시하였고,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를 대역죄로 능지 처참에 처하고 이목과 허반 등은 참형에 처했다. 유학을 숭상하던 사람 중 화를 면한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 였는데, 이 일로 연산군의 뜻을 거스릴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다.

 

연산군은 왕비 신씨와 궁인 곽씨 외에 윤훤의 딸을 숙의로 맞이했고, 김효손은 성종 때 문의 현감을 지냈던 장한필의 딸인 장녹수를 천거했다. 연산군은 장녹수를 한 번 만나 넋을 빼앗기고 숙원으로 삼았고 그녀 옆을 떠나지 않아 조회에도 경연에도 참석치 않은 날이 많았다. 장녹수는 연산군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게 되었고 장녹수의 집 앞에는 날마다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궁궐에는 연회가 날마다 열렸고, 연산군의 곁에는 언제나 장녹수가 있었다. 백성들이 궁궐 담 넘어로 궁궐 안 연회를 구경하자 연산군은 궁궐의 담을 높이고 담장 밖 민가들을 철거하라 하였다.

어느날은 연산군이 정업원이라는 절에 나타났는데 비구니들 중 젊고 예쁜 비구니 5명을 골라 한꺼번에 5명의 비구니와 음탕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또 어느날은 연산군의 계모인 왕대비 윤씨가 베푸는 잔치에서 기생인 광한선과 내한매를 불러 연산군을 모시게 했는데, 이 때 연산군은 두 기생들에게 중신들 쪽을 보고 앉게 한 뒤 중신들에게 기생을 시제로 시를 지어 바치라고도 했다.

 

연산군의 신하 가운데 가장 신임받는 사람이 신수근과 임사홍이었다. 임사홍은 성종 때에 당상관을 지냈으며 그의 맏아들인 광재는 예종의 사위였고, 둘째아들인 숭재는 성종의 사위였다. 임사홍의 셋째아들인 희재는 김종직의 제자가 되었고 성종 때 생원과 진사 시험에 급제했으며 연산군 4년에는 대과에 급제했으나 무오사화로 귀양을 가고 말았다. 어느날 연산군은 임사홍 집에 갔다가 병풍에 쓰인 임희재의 시를 보고 크게 노하였다.

 

조순종요자태평 祖舜宗堯自太平

진황하사고창생 秦皇何事苦蒼生

부지화기소장내 不知禍起蕭墻內

허축방호만리성 虛築防胡萬里城

 

진나라 시황제는 어찌하여 백성들을 괴롭혔던가.

화가 자기 집 담장 안에서 일어날 줄은 모르고

공연히 쓸데없이 오랑캐를 막는다고 만리 장성을 쌓았구나.

 

연산군은 이 시를 보고 임희재를 참형에 처했는데 임사홍은 조금도 슬퍼하는일 없이 잔치를 베풀었다 하니 임사홍이 얼마나 간악한 인간이라는 것을 알수 있다. 임사홍은 연산군과 술을 마시다가 폐비 윤씨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는데 엄 숙의와 정 숙의의 모함 때문에 성종의 노여움을 받은 것이라 하였다. 연산군은 이말을 듣고 엄 귀인과 정 귀인을 붙잡아 놓고 그들의 얼굴에 보자기를 씌운 다음 정 귀인의 아들인 안양군과 봉안군 형제를 데려와 몽둥이를 주어 때려 죽이게 하였다.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는 이때 70에 가까웠는데, 소식을 듣고 달려와 그 모습을 보고 크게 꾸짖었다. 그말을 듣고 연산군은 인수대비를 노려보며 대비의 가슴팍을 머리로 받아 쓰러뜨렸다. 인수대비는 이 일로 정신을 잃고 쓰러져 누워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인수대비가 떠나고 폐비 윤씨의 어머니 신씨는 자유로이 궁궐 출입을 하게 되었는데 폐비 윤씨가 흘린 피로 적신 금삼을 가지고 와서는 연산군에게 보여주며 자세한 내막을 알려주었다. 연산군은 생모 윤씨의 죽음에 관계된 사람의 이름을 적어 바치라고 하였다. 이때 제일 먼저 희생된 사람은 성종 때 좌승지로 있으며 왕명을 받들고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가지고 간 이세좌였다. 이 중 가장 무거운 형벌을 받은 사람들은 부관 참시를 당했는데, 쇄골 표풍 이라 하여 무덤을 파고 뼈를 갈아서 가루로 만든 후 바람에 날리기까지 했다. 이를 연산군 10년 갑자사화라 한다.

 

국왕의 난행을 비방한 투서가 언문으로 쓰여지자, 한글 교습을 중단시키고 언문구결을 모조리 거두워 불태웠다. 성균관의 학생들을 몰아내고 그 곳을 놀이터로 삼는 등 황음에 빠졌다.

 

연산군은 궁궐 안 잔치를 넘어서 서울을 중심 삼아 사방 몇 십 리의 주위를 사냥과 오락장으로 만든 다음 장녹수와 궁녀들, 그리고 호외하는 군사들과 사냥꾼들을 거느리고 골짜기와 숲 사이를 돌아다니며 사냥을 즐겼다. 연산군의 난잡한 생활을 날이 갈 수록 심해졌고, 벌거벗은 채로 춤을 추는 일도 있었다. 그때 내시였던 김처선은 연산군에게 여러번 간언하 다가 연산군의 화살과 칼에 죽임을 당한다. 연산군은 김처선을 잔인하게 죽이고 그의 양자를 죽였으며 가산을 몰수했고 그의 부모 무덤을 파헤쳤다.

 

연산군은 유생 황윤묵의 첩이었던 최보미를 좋아하여 강제로 궁궐에 데려다 놓았는데 최보미는 말이 적고 잘 웃지 않았다. 그러자 연산군은 남편 때문이라면서 아무 죄도 없는 황윤묵을 죽였다. 또 한번은 영남에서 데려온 어떤 유부녀가 음식상의 돼지머리를 보고 웃자 연산군이 웃는 까닭을 물었다. 그 유부녀가 돼지처럼 생긴 서방의 모습이 떠올라 웃었다 대답하자 연산군은 며칠 후에 그 목을 소반 위에 올려 놓은 후 여인에게 보여주었다고 한다. 1504년에는 손녀를 궁으로 들이라는 연산군의 명을 거역하였다는 죄목으로 홍귀달이 숙청되기도 하였다. 연산군은 전라도 충청도 평안도 등지로 사람을 보내 미녀를 구해 오는 일을시켰다.

 

임사홍의 며느리이지 임숭재의 부인인 휘숙옹주는 성종의 후궁이 낳은 딸로 연산군에게는 배 다른 남매였는데 연산군이 임사홍의 집에 자주 드나들다 그녀를 욕보이는 일도 있었다. 연산군은 임숭재가 겉으로는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으나 딴 생각을 품지 않을까 하는 의심에 그에게 쉿조각을 입에 물게 하였다.

 

연산군이 왕족 부녀자를 욕보인 사건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성종의 형이자 연산군의 큰아버지인 월산대군의 아내는 과부로 살고 있었는데 연산군은 큰어머니까지 욕보인 후 승평부인이라는 칭호를 내리고 그의 남동생 박원종의 벼슬을 올려주었다. 그러다 큰어머니인 박씨는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다.

 

이조 참판이었던 성희안은 연산군의 행동이 거슬려 "성심원불애청류"라는 시를 지어 올렸다가 벼슬을 빼앗겼는데 성희안은 박원종(월산대군 아내의 남동생)을 만나 뜻을 세우게 된다. 1506년 연산군 12년, 성희안과 박원종 등은 연산군을 붙잡아 옥에 가두고 그의 아우인 진성대군을 임금으로 세우기로 하였다. 반정무리는 가장 먼저 임사홍과 심수근, 신수영을 죽였고, 개성유수로 가 있는 신수근의 동생 신수겸은 사람을 보내 따로 죽이게 했다. 반정의 무리는 궁궐로 가 연산군의 옥새를 빼앗고 성종의 계비 윤씨에게 진성대군을 왕으로 모실 것을 알렸다. 박원종은 연산군 앞에서 장녹수, 전비, 김귀비의 목을 배었고 그들의 가산을 몰수했는데 이때 압수한 장녹수의 재산은 국고의 절반을 넘었다고 한다.

 

연산군은 폐왕되어 강화도 교동으로 쫓겨나고 폐위된지 두달만에 역병으로 죽었다고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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