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조선 4대 임금)
1397-1450
재위 1418-1450
문종(조선 5대 임금)
1414-1452
재위 1450-1452
단종(조선 6대 임금)
1441-1457
재위 1452-1455
세조(조선 7대 임금)
1417-1468
재위 1455-1468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의 외아들인 단종은 1441년(세종 23) 탄생하였다. 세종 30년(1448년) 8세에 왕세손에 책봉되었고, 문종 즉위년(1450년) 8월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1452년 5월 18일 12세에 왕위에 올랐다.
세종은 소헌왕후 심씨 사이에서 큰아들 문종을 비롯, 수양, 안평, 임영, 광평, 금성, 평원, 영응대군과 정소, 정의 공주 8남 2녀를 두었다. 1452년 문종이 세상을 떠날 때 세자는 어렸고, 종실의 대군들이 강성한 것을 염려하여 영의정 황보인, 우의정 김종서에게 어린 세자를 잘 보필할 것을 명한다.
사헌부에서는 조정의 당상관 및 여러 대군들의 집에 사람의 방문을 금할 것을 주청하였는데 수양대군은 안평대군과 도승지 강매경을 통하여 여러 대신들에게 반대의 뜻을 전한다.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은 한명회 등과 결탁하고 이듬해(1453년) 10월 10일 황보인, 김종서 등을 죽이고 안평대군과 그의 아들을 강화도로 귀양 보내고 다음날 스스로 영의정이 되었으며 정인지를 좌의정, 한확을 우의정으로 삼는 계유정난을 일으켰다.
계유정난의 계책은 대체로 한명회로부터 나왔는데 홍달손, 양정, 유수 등 무사들을 추천하여 거사를 도모하도록 하였다.
수양대군은 김종서의 집으로 가 철퇴로 쓰러뜨리고 대궐로 들어가 단종에게 갔다. 한명회가 가져온 살생부로 여러 대신들을 불러 살생부에 실린 대신들은 홍윤성 등이 철퇴로 때려 죽였는데 이 때 황보인, 조극관, 이양 등 죽은 이가 많았다. 김종서 황보인은 안평대군과 결탁하여 비밀리 군사를 기르고 반역을 도모한 것으로 처형되고, 안평대군은 강화도로 압송, 그의 아들 우직을 귀양보냈다. 정인지 등 대신들은 안평대군을 처벌하기를 계속해서 주청하였고 안평대군에게 사약을 내렸다. 수양대군, 정인지 등 36인을 정난공신에 책봉하였고 한명회를 군기시 녹사로 승진시켰다.
다음해 1455년 넷째 동생 금성대군이 반란을 꾀하였다 하여 삭녕(경기도 연천)으로 귀양보내고,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왕위에 올랐다. 이때 단종은 상왕으로 물러앉고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겼다.
단종은 우의정 한확 등에게 전교하기를 "내가 어려서 나라 안팎의 일을 알지 못하여, 간악한 무리가 일어나 반란의 싹이 잇달아 움트려 하니, 이제 장차 큰 임무를 영의정(수양대군)에게 전하려 하노라" 라고 하였다. 단종은 경회루 아래에 나와서 수양대군을 불렀고, 수양대군은 꿇어 엎드리며 울면서 사양하였으나 단종이 손에 옥새를 들고 그에게 전달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때 성삼문이 옥새를 안고 울음을 터뜨리자, 수양대군이 엎드려 사양하다가 머리를 들어 빤히 바라보았다.
1456년 집현전 학사를 지낸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 등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김질과 그의 장인 정찬손이 먼저 고발하여 발각되어 모두 극형을 받아 죽었다. 단종복위운동을 하다 죽음을 당한 성삼문 등 6인을 사육신이라 하고 수양대군의 왕이찬탈을 분개하여 한평생 죄인으로 자처한 김시습 등 6인을 생육신이라 한다.
성삼문은 고초 중에도 세조에게 "나리가 남의 나라를 도둑질하여 뺏으니, 내가 남의 신하가 되어서 차마 군왕이 폐출되는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은 하늘에 두 해가 없고, 백성들에게 두 임금이 없기 때문이다" 하였고, 신숙주에게 "옛날에 너와 더불어 같이 집현전에 있을 적에 영릉(세종)께서 원손을 안고 뜰 한가운데 거닐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천추만세 뒤에 너희들이 모름지기 이 아이를 잘 생각하라 하시던 말씀이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데 네가 어찌 그 일을 잊었는가"라 호통쳤다.
세조가 박팽년의 재주를 몸시 사랑하여 따로 항복하기를 권하였으나 박팽년이 이 말을 듣고 웃었을 뿐 대답하지 않았으며 세조를 일컬을 떄에는 반드시 나리라 하였다. 박팽년이 죽을때 아내가 임신중이었는데 "아들을 낳거든 죽여라" 라고 말하였다. 이때 박팽년의 종이 임신 중이었는데, 주인은 아들을 낳고 종은 딸을 낳았다. 종은 주인이 낳은 아들을 자식으로 삼고 이름을 박비라 하였다.
1457년 단종은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었다. 지금도 영월에 가면 배를 타고 단종의 유배지인 청령포로 들어가 그 흔적을 만날 수 있다.
1457년 수양대군의 동생이며 노산군의 숙부인 금성대군 유가 경상도의 순흥에서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사사되자 단종은 노산군에서 다시 강등이 되어 서인이 되었으며, 끈질기게 자살을 강요당하여 1457년(세조 3) 10월에 영월에서 목을 매어 죽었다. 이때 단종은 17세였다. 시녀와 하인들이 다투어 동강에 몸을 던졌다.
단종의 억울한 죽음과 강봉은 200여 년 후인 1681년(숙종 7) 신원되어서 대군에 추봉되었으며, 1698년(숙종 24) 임금으로 복위되어 묘호를 단종이라 하였다. 능은 단종이 목숨을 끊은 강원도 영월의 장릉이다.
2018/07/01 - [여행 그리고 맛집/우리나라여행] - 영월 청령포 / 영월 갈만한 곳 / 영월여행 추천지 / 단종 유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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