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것이힘이다/조선역사

숙종의 왕비들과 장희빈

GoodFortune 2019. 7. 10.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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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조선 19대 임금)

1661-1720

재위 1674-1720

 

경종 (조선 20대 임금)

1688-1724

재위 1720-1724

 

 

현종(조선 18대 임금)의 큰 아들인 숙종은 1674년 14세의 어린 나이로 왕으로 즉위하였다. 숙종 6년에 경신환국, 15년에 기사환국, 20년에 갑술환국이 일어나 그때마다 남인, 서인 사이에 정권이 바뀌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허적은 현종 말년에 영의정에 올랐고 현종이 승하할 때 그의 유언을 받들어 숙종을 왕위에 오르게 했는데 숙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도 영의정을 지내면서 서인들을 조정에서 쫓아냈고 자신이 속한 남인들의 세력을 키우려고 노력하였다. 서인과 남인은 서로의 행동을 감시하며 단서를 얻기 위해 자기의 심복을 몰래 들여보내는 것이 예사처럼 되어 있는 때였다. 서인과 남인은 서로 감시하여 상소를 올리고, 숙종은 남인인 허적의 상소를 믿고 서인인 남구만, 허목 등을 귀양보냈다. 허적에 대한 숙종의 마음은 두터웠으나, 그의 서자인 허견은 계속해서 부녀자를 욕보이고 궁궐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계속된 상소문이 이어지자 숙종은 허적 부자를 의심하며 그들을 살펴 보고받았고, 궁의 물건을 영의정 허적이 허락없이 마음대로 사용하는 일을 알게 되었다. 숙종은 허견이 복선군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상소문을 받고 허견을 붙잡으로 갔는데 그때 복선군과 함께 하던 무리들 수백명을 함께 붙잡았다. 주동자들은 사약을 받거나 참수되었고, 그 밖의 사람들은 귀양을 갔다. 이 사건이 숙종 6년에 일어났는데 이를 가르켜 경신대출척, 경신환국, 또는 삼복의 옥 이라고 하며 이 사건으로 남인의 세력은 없어지고 이후에는 서인의 세력이 조정을 움직이게 되었다.

 

숙종은 동궁으로 지내던 13세부터 대왕대비 처소의 궁녀인 장씨를 알았는데 이때부터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다. 왕위에 오른 숙종은 궁녀 장씨를 자주 찾게 되었다. 14세에 중전으로 들어온 김만기의 딸 인경왕후는 숙종의 마음을 알고 대왕대비 전의 궁녀 장씨를 후궁으로 들이고자 대왕대비에게 먼저 청하였다. 궁녀로서 어떤 공이 없으면 후궁으로 책봉하지 못하는것이 궁의 법도인지라 궁녀 장씨는 응향각에 거처를 옮겨 처소를 따로 정해주었는데, 얼마 후부터 숙종이 응향각을 드나들 때마다 궁녀가 중전을 비난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어느날은 중전이 궁녀로 변장하고 응향각의 창 밑으로 가 장씨의 말을 엿들었는데 궁녀 장씨가 숙종에게 중전을 비난하는 말을 들어 대왕대비에게 그 이야기를 전하였다. 대왕대비도 사람을 보내 장씨의 말을 엿듣고는 장씨를 궁궐 밖으로 내쫓았다. 숙종 5년에 쫓겨난 궁녀 장씨는 이후 8년간 궁 밖에서 지내게 된다. 장씨는 궁 밖에서 뉘우치지는 않고 동평군 등을 만나 다시 입궐하는 날만 기다렸다.

 

 

 

드라마 장옥정 인경왕후

 

드라마 장옥정 인현왕후

그러던 중 숙종 6년에 왕비 인경왕후 김씨가 세상을 떠나자, 궁녀 장씨는 자기만을 불러들여 주길 기다렸으나 숙종은 다시 왕비를 간택하여 이듬해에 서인의 거물인 민유중의 둘째딸인 민씨가 왕비(인현왕후)로 들어왔다. 중전 민씨는 입궐한지 6년이 흘렀지만 아들을낳지 못하였고, 후손이 없어 불안했던 중전은 숙종에게 궁녀 장씨의 얘기를 듣고는 대왕대비와 왕대비에게 궁녀 장씨를 입궁시키기를 청했다. 왕대비의 사촌 오라버니인 김석주 등이 남인 거물들과 가까이 지내는 장씨의 입궐을 반대하였으나 숙종은 이미 마음을 먹고 장씨를 입궐시켰다. 이렇게 숙종 12년(1686년) 장씨는 8년만에 다시 입궐하게 됐다. 두해가 지나고 숙종에게 사랑을 받은 장씨는 아이를 임신하고 소의라는 직첩을 받았다. 장 소의가 궁 밖에서 살때 도움을 받았던 동평군은 혜민제조에 임명하고 조사석은 예조 참판에 임명했다가 우의정 자리에 임명되기도 했다. 장 소의는 숙종 14년 10월에 왕자(경종)을 낳았고 숙종은 늦게 가진 아들 옆을 떠나는 일이 없었다.

 

장옥정 사랑에 살다

 

 

 

숙종 15년에 백일도 안된 왕자를 원자로 책봉하고 장씨를 희빈으로 봉하였는데 여러 대신들이 중전이 후사를 낳을 가망이 있기 때문에 원자 책봉이 시기 상조라 주장하였으나 숙종은 원자책봉을 명하였다. 장 희빈은 날이갈수록 중전 민씨를 흉보고 원자에 독을 넣으려 한다고 모함하였다. 원자책봉을 반대하는 송시열을 제주도로 귀양보내고, 그와 뜻을 같이하는 서인들을 유배보내면서 조정은 다시 남인들 세력이 되었다. 서인의 딸이었던 중전 민씨는 타격을 받게 되었고 계속된 장 희빈의 모함으로 숙종은 중전을 폐위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중전의 생일을 맞아 축하 행사를 보내는데 숙종은 서인들의 집에서 보낸 선물과 축하편지를 다 없애 버렸고, 이를 서운해하던 중전을 폐위시켰다. 대신들이 중전의 폐위를 반대하였으나 숙종은 중전 민씨를 궁에서 내보내었다. 서인으로 벼슬에 떠나있던 사람들은 중전 폐위를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는데 중전은 상소문에 적힌 80여명의 이름을 모두 사형시키거나 귀영 보냈다. 원자책봉에 반대하던 송시열은 후에 세자책봉에 반대하였는데 송시열, 이사명, 김수홍 등에게는 사약이 내려졌다. 이 사건이 숙종 15년(1689년)에 일어났는데 이를 기사환국이라 한다.

장 희빈이 중전이 되자 동평군과 장희재가 궁 안팎으로 사람들을 살피며 중전 장씨를 도왔다. 장희재가 길을 지나는데 아이들이 "미나리는 사철이요 장다리는 한철일세" 하는 노래를 부르자 장희재는 그 아이 아버지를 붙잡아 노래를 가르쳐준 곳을 물었는데, 아이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고 형벌을 이기지 못한채 죽고 말았다. 이 일로 장희재를 더욱 미워하고 폐위된 중전 민씨를 불쌍히 여겨 노래가 더 퍼지게 되었다.

중전 장씨는 궁 밖의 폐비의 존재가 불안하여 폐비를 모함하고 사약을 내리라고 숙종에게 청하였으나 숙종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숙종은 궁 밖을 살피다 백성들에 떠도는 폐비 민씨에 대한 불쌍한 마음을 알게 되고, 중전 장씨가 궁 안에 폐비 민씨를 저주하는 무당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던 중 폐비 처소에 있던 무수리 최씨를 알게 되고, 무수리를 곁에 두게 된다. 어느 날 중전 귀에 무수리 최씨가 숙종의 아이를 가졌다는 이야기가 들어가고, 중전은 무수리 최씨를 세워놓고 옷을 벗기고 회초리로 아랫배를 매질했다. 그에 그치지 않고 아이를 가진 무수리의 아랫도리를 인두로 지지는 행동도 하였다. 소식을 듣고 숙종이 달려와 그 모습을 보고는 무수리 최씨를 거두어 간호하게 하고 소원이라는 직첩을 내렸다. 숙종 20년 최 소원은 아들을 나았는데 중전은 장희재에게 독약을 주어 최 소원의 처소에 들여보내려다 들키고 말았다. 숙종은 대노하여 중전을 다시 희빈으로 강등시키고 장희재는 의금부에 가두고 재산을 몰수했다. 장씨가 희빈으로 강등되던 날 최 소원은 숙빈의 직첩을 받게 되었다. 얼마 후 민씨가 다시 복위되어 궁궐로 돌아온 후, 장 희빈은 궁궐에서 쫓겨나 궁궐 밖에서 지내게 되었다. 이렇게 남인에서 다시 서인으로 세력이 바뀌었는데 이를 갑술환국이라 한다.

 

 

중전이 환궁한지 8년이 지난 어느날 중전이 자주 아팠는데, 최 숙빈이 게장을 바친 적이 있었다. 중전이 게장을 맛있게 먹자, 며칠 후 다시 햇게장을 마련해 중전에게 바쳤는데 이 게장을 먹은 후 갑자기 정신을 잃고 누웠다. 최 숙빈은 게장에 의심을 품게 되었고 그러다 김 나인이 가져온 미음상을 떠올리고 숙종은 김나인을 신문했다. 김 나인은 장 희빈이 시킨 것이라고 자백했다. 세자는 편전 앞에서 간청하였으나 숙종은 장 희빈에게 사약을 내렸다. 

 

장 희빈은 마지막으로 세자를 한번만 보고싶다 하였고, 세자를 궐 밖으로 내보내 만나게 하였다. 장 희빈은 갑자기 세자의 아랫도리 음경을 붙잡고 있는 힘을 다하여 낚아챘는데 "내가 이 지경이 되어 죽게 되었는데 너를 남겨두어 이가의 혈통을 잇게 하고 민가 년의 제사를 지내게 할 내가 아니다. 너 죽이고 나도 죽겠다" 라고 발악을 하였고 대신들이 강제로 입을 벌리고 사약을 쏟아 넣었다.

 

궁궐로 돌아온 세자는 치료를 받고 얼마 후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으나 세자의 걸음걸이가 내시처럼 되고 말았다 한다. 중전 민씨가 1701년 세상을 떠나고 숙종은 다시 중전을 맞아들이게 되었는데 이때 서인들이 자리잡고 있을 시절이었다. 서인들이 세력을 잡은지 오래되자 노론, 소론으로 갈려서 세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는데 숙종은 당파싸움을 일삼는 집안을 피해 김주신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다. 15세에 중전 자리에 오른 인원왕후이다. 세자는 15세에 청송부원군 심호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했는데 중전보다 한살이 많았다.

 

숙종 41년에는 세자의 병이 회복되었고, 숙종은 세자에게 나랏일을 맡기는 일이 잦았는데 이때부터 남인들이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다. 세자는 최 숙빈의 아들이자 배다른 아우인 연잉군과 우애가 지극했는데, 세자를 두둔하는 남인은 연잉군을 해치려 하는 반면 연잉군을 두둔하는 서인들은 세자를 해치려고 하여 남인과 서인의 충돌이 커졌다.

 

1720년 재위 45년에 숙종은 세상을 떠나고 세자가 조선 20대 임금 경종으로 즉위했다. 경종이 후사가 없자 최 숙빈의 아들 연잉군이 후에 조선 21대 임금 영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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