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덕왕후 강씨는 조선의 건국시조 태조 이성계의 왕비로서, 사실상 조선의 제1대 왕비였다. 그럼에도 신덕왕후와 관련된 기록은 한 줄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태종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신덕왕후를 태조의 첩으로 간주하고 신덕왕후를 왕비로 인정하는 모든 기록과 기념물을 왜곡하고 없앴다. 태종은 신덕왕후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지도 않았고, 신덕왕후의 능을 파서 도성 밖으로 옮겼다.
선조 때의 일이나 강순일이라는 자가 선조가 탄 수레앞으로 뛰어들어 억울함을 하소연했다. 강순일은 스스로를 신덕왕후 강씨의 친정아버지 강윤성의 후손이라 소개하고 자신이 강윤성의 무덤을 돌보고 있는데 억울하게 군역이 부과되었으니 취소해달라 호소하였다. 이 일로 신덕왕후 강씨가 태조의 왕비인가 아닌가를 가리는 논쟁으로 이어졌다. 신덕왕후 강씨와 태종이 상충되었으므로 신덕왕후의 재평가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신덕왕후 강씨의 능에 제사를 지내야하는지 종묘에 왕후의 신주를 모셔야하는지의 문제까지 확대되었는데 타협책으로 능에서만 신덕왕후의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그러나 기록이 없어 무덤을 찾을 수도 없었는데 변계량의 문집에서 정릉을 옮기게 된 사연을 고하는 구절이 나온다. 이 구절을 근거로 도성의 동북 모퉁이에 있는 산 아래 마을을 뒤져 정릉을 찾아내었는데 성북구 정릉동에 있는 정릉이 바로 신덕왕후의 무덤이다. 이렇게 신덕왕후는 200여 년 만에 다시 기억되었다. 100년 후 현종은 신덕왕후를 공식적으로 종묘에 모시고 왕비로 대접하게 된다. 그리고 또다시 100년 후 다산 정약용에 의해 신덕왕후의 고향집 터가 새롭게 발굴, 공인되었다. 다산 정약용이 보고한 내용은 "여유당전서"에 실렸는데 '태조 대왕이 영흥에서 개경으로 왕래하다가 시냇가에 이르렀을 때 목이 몹시 말랐고, 시냇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던 신덕왕후 강씨는 태조에게 바가지에 물을 떠서 버들잎을 띄워드렸다. 태조가 화를 내자 왕후는 급히 물을 마시다 체할까 염려되어 그리하였노라 대답하였고, 태조가 그 말을 기특하게 여기고 예를 갖추어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덕왕후 강씨는 강서의 손녀이며 강윤성의 딸로 알려져있다. 고려 충혜왕, 충목왕, 충정완 3대를 따르던 강윤성의 가문은 고려 공민왕 때에 몰락하게 되었는데 신덕왕후 강씨는 그 시기에 태어난 강윤성의 막내딸로 추정된다. 강윤성과 신덕왕후 강씨의 오빠들은 공민왕 때에 귀양 보내졌다. 신덕왕후 강씨의 형부는 신귀였는데 공민왕 20년쯤 신돈이 역적으로 몰리면서 신귀는 함께 사형되었다.
강씨의 사촌오빠 강우는 이성계의 사촌누이의 남편이었으므로 두 집안은 이미 인연이 있었다. 강씨와 태조의 만남이 정말 시냇가에서 시작되었는지 강우에 의해 만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강씨는 이성계와 혼인하고도 몇 년간은 친정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 당시의 혼인 풍습이 큰 아이가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처가살이를 했었고, 경처인 강씨의 입장을 생각해도 그렇다. 이성계는 함흥과 개경을 오가는 길에 강씨의 집에 들렀을 것이라 추측된다.
(고려시대엔 경처와 향처라 하여 본부인을 2명 인정하였는데, 향처는 고향에서 정혼한 부인이고 경처는 개경에 두는 부인을 말한다.)
이성계는 전쟁터에서 계속된 승리로 명성을 올렸고, 강씨는 개경으로 옮겨왔다. 향처의 장성한 아들들이 개경으로 유학을 왔다 기록되었는데 실록에 따르면 "매양 방원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어찌하여 내 아들이 아니란 말인가?" 라고 하였다 한다. 태종실록에 강씨가 방원을 "기이하게 여기고 사랑하니 방원도 효성을 다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딸만 있던 강씨는 우왕7년에는 고대하던 아들 방번을 낳고, 다음 해에는 둘째 아들 방석도 생겼다.
이성계는 무인으로 살면서도 지식인을 아꼈는데 특히 정몽주를 아꼈다. 그 후에 정도전이 찾아왔는데 당시에도 이성계는 정몽주와 함께 있었다. 이성계는 정몽주와 정도전과 오랜시간을 함께 하였다.
위화도 회군시에 우왕과 최영은 요동으로 출동하는 장군들의 처자식을 인질로 잡아두었는데, 이성계는 미리 부인과 아이들을 대피시켜놓아 큰아들과 둘째아들만 인질로 잡혀있었다. 위화도회군 소식을 미리 전달받은 아들들은 탈출하였고 태종 방원은 신의왕후 한씨와 신덕왕후 강씨와 동생들을 직접 대피시켜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회군이 성공하자 이성계는 정치판의 중심인물이 되었고, 이성계는 정도전의 말에 따라 왕을 바꾸었고 개혁을 시도했다. 정치판의 싸움에서 수많은 동료를 죽여야 했고, 공양왕과의 갈등에서 괴로웠던 이성계는 귀향을 결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부인 강씨와 측근들의 만류로 귀향하지 못했다. 그 무렵 강씨는 아들 방번을 공양왕 동생의 딸과 혼인시켰다. 공양왕과의 갈등을 혼인으로 풀려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최고의 왕실과 혼인을 하게 된 이성계의 입지는 더욱 단단해졌다.
태종실록에 의하면 강유신(강씨의 작은아버지 강윤휘의 손자)이 강택(강윤성의 손자)에게 말하길 "태조가 왕이 되기 전에 집에 드나들었는데 신덕왕후의 아들들과 전하는 늘 태조를 모셨지만 다른 왕자들은 드나들지못하였다" 고 하였고 이 일로 강유신은 귀양보내졌다. 이 말대로라면 태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는 오직 방번, 방석, 방원 셋만이 옆에서 아버지를 모실 수 있었다는이야기다. 이처럼 이성계에겐 신덕왕후 강씨가 중요한 사람었던 것이다.
공양왕 3년에 향처인 한씨가 세상을 떠났다. 한씨는 아들 6명과 딸 2명을 낳아 혼자 기르면서 고향을 지켰다. 방원은 어머니 한씨의 3년상을 치르겠다며 개경의 정치판을 떠났다. 공양왕 4년에는 이성계가 명나라에 갔던 세자를 마중하기 위해 황주에 갔다가 말에서 떨어져 다쳐서 돌아오지 못하는 일이 있었다. 이성계가 돌아오지 못하자 정몽주는 고려 왕실을 지키겠다는 사명감으로 이성계의 적이 되어 등장했다. 정몽주는 왕을 움직여 이성계의 수족을 잘랐다. 강씨는 방원에게 사위를 보내 상황을 알리고 방원은 아버지에게로 가서 함께 개경에 돌아왔다. 개경으로 돌아온 이성계에게 정몽주는 직접 문병 왔고, 이성계도 예전과 같이 대접했다. 그런데 문병을 마치고 돌아가던 정몽주를 방원이 주동하여 선죽교에서 살해하였다. 이성계는 노발대발 하였고 부인 강씨가 말도 못꺼내고 가만히 있으니 방원이 "어머니께서는 왜 변명해주지 않으십니까? 하였다. 이를 보면 부인 강씨가 정몽주의 죽음에 연관이 없다 할수 없다.
태조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는데, '방원이 남은과 더불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기로 계책을 정하였다. 남은은 비밀스럽게 조준, 정도전, 조인옥, 조박 등 52명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하기로 결정하였지만 장군의 진노가 두려워 감히 알리지 못하였다. 이에 방원이 들어와 강씨 부인에게 고하여 전해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강씨 부인도 감히 전하지 못하였다. 방원이 나아가 남은 등에게 말하기를 마땅히 즉위 의식을 갖추어 왕위에 오르도록 권고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 기록을 보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한 주체는 방원이다. 공양왕 4년, 배극렴, 조준, 정도전을 필두로 고려 왕의 옥새를 받들고 이성계의 집으로 몰려왔다. 이성계는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고, 강씨는 왕비가 되었다.
강우(강씨의 사촌오빠), 강순룡(강씨의 둘째오빠)는 조선 건국 과정에서 이성계에게 적극 협력했다. 조선 건국 후 강우는 원종공신에 책봉되었고, 강순룡은 특진보국숭록대부 재령백에 책봉되었다.
신덕왕후 강씨와 방원은 이성계의 즉위까지는 함께 하였으나, 후계 문제에서 일치하지 못하였다. 강씨는 자기가 낳은 아들을 세자로 세우고 싶어했고, 방원은 당연히 자기 몫이라고 생각했다.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후 핵심 군사력인 의흥친군위의 절제사를 발표했는데, 영안군 방과, 무안군 방번, 항안군 이제 셋이었다. 조선 건국 후 가장 중요한 요직에서 방원이 제외된 것이다. 무안군 방번을 의흥친군위의 절제사에 임명한 사실은 방번을 후계자로 내정했다는 의미였는데, 방번은 고려 왕실의 사위였기에 대신들이 반대하였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무안군 방번은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인데 태조가 몸시 사랑하였다. 태조는 신덕왕후가 건국에 공이 있다고 핑계하며 방번을 세자로 세우고자 하였다. 배극렴이 적장자를 세우는 것이 고금의 통의입니다. 하였고, 조준도 적장자가 우선이고 비상시 공이 있는 사람이 먼저라 하였다. 신덕왕후 강씨가 통곡하였는데 그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고 태조가 종이와 붓을 가져다가 조준에게 주며 방번의 이름을 쓰라 하였으나 조준은 엎드린 채 쓰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은 양자의 타협으로 강씨의 둘째 아들 의안군 방석이 세자에 책봉되었다. 이후에도 강씨는 계속해서 방원을 견제했다. 방원은 발표된 개국공신 명단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태조 5년(1396) 신덕왕후 강씨가 마흔무렵 갑자기 세상을 떠났는데, 태조 7년 방원은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세자 방석을 살해했다. 왕자의 난을 일으킬때 방원은 방석을 서자라 하면서 강씨를 첩이라 생각했다. 태종은 왕위에 오르고 나서 강씨를 왕비로 표상하는 공식적인 기념물과 기록을 철저히 없애고, 태조 이성계가 세상을 떠나자마자 도성 안의 왕비 강씨의 무덤마저 옮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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