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것이힘이다/삼국시대

신라 제24대 진흥왕과 제25대 진지왕 가계도

GoodFortune 2019. 9. 8.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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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은 15세였던 430년 신라 법흥왕의 붕어로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후 1년간 법흥왕의 왕비인 보도태후가 섭정하였고, 이후 10년은 어머니인 지소태후가 섭정하였고, 551년부터 친정하였다.

 

545년 이사부의 건의에 따라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다. 이사부는 지증왕~진흥왕 시대의 장군, 정치가로 삼국사기에 따르면 내물 이사금의 4세손이다. 삼국유사에는 그의 성을 박씨로 기록하고 있다. 553년 황룡사를 창건했고, 576년 원화 제도를 만들어 남모와 준정 두 여인으로 하여금 300여 명의 무리를 거느리게 했으나 두 여인이 시기하다 남모가 준정에게 암살당하는 일이 발생하자 화랑을 남성 미소년으로 선발하도록 하였다.

 

진흥왕 순수비

 

진흥왕은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였는데, 548년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자, 신라와 나제동맹을 맺은 백제 성왕이 구원을 요청하였고 신라는 백제를 도와 고구려 군사와 싸워 이겼다. 551년 고구려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 한강 상류 유역을 점령하였다. 신라는 10개 군을 얻고 백제는 6개 군을 얻었다. 신라는 함경남도, 함경 북도에 진출하여 순수비를 세웠다.

이때 백제는 신라에게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자고 제의하였고, 고구려는 경기도, 황해도 등을 신라 땅으로 용인해 주는 대신 고구려 수도 평양성으로 진군하지 말 것을 제의하였고, 진흥왕은 고구려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553년 진흥왕은 백제의 한강 유역을 침략하여 여러 성을 빼앗아 신주를 설치하였다. 신라는 낙동강과 한강을 소유하게 되어 백제를 누르고 고구려의 남진을 막았다. 신라는 인천만에서 수.당과 거래하여 연맹 관계를 맺었다. 553년 백제의 왕녀가 진흥왕과 혼인 하였다. 다음해 백제 성왕은 신라를 침공하였으나 신라가 격파하였고, 백제 성왕은 신라 병사에게 죽임을 당했다. 백제는 부여로 후퇴하였다. 현재까지 창녕,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 4개의 순수비가 전해진다.

 

 

진흥왕 가계도

 

 

진흥왕은 장남 동륜태자는 566년에 왕태자에 책봉되었으나 572년에 사망하여 왕위에 오르지 못하였고 동생 사륜이 25대 왕 진지왕이다. 진지왕이 3년 후에 폐위뒤면서 아들 백정이 즉위하여 진평왕이 되었다. <화랑세기>의 기록에 따르면 진흥왕의 후궁인 미실과 동륜태자가 몰래 사랑하였는데 보명궁주를 만나려 담을 넘다 개에게 물려 생을 마감하였으며 미실과의 관계도 들통났다고 한다. 보명궁주는 지소태후와 구진의 딸로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의 후궁이었다. 동륜태자의 부인은 만호부인으로 신라 입종 갈문왕의 딸이다.

 

 

진지왕 가계도

 

25대 왕인 진지왕은 진흥왕과 사도부인 사이의 차남이다. 형 동륜태자가 일찍 죽으며 왕위에 올랐다. 거칠부를 상대등으로 삼아 국정을 맡겼다. 577년 백제가 서쪽으로 침입하자 물리치고 내리서성을 쌓았다. 578년 백제에게 알야산성을 빼앗겠고 다음해 재위 3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진지왕이 즉위한지 4년째 되던 해에 정사가 어지럽고 문란하여 나라 사람들이 그를 폐위하였다고 한다. 한편 <화랑세기>에서는 미실을 왕후로 만드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과 국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던 것으로 미실과 사도태후가 결의하여 노리부를 앞세워 폐위시켰다고도 한다.

왕비인 지도부인은 선혜부인의 아들 기오공과 옥진궁주의 딸 흥도부인 사이에서 출생했다. 아들 김용춘(혹은 김용수)는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아버지로 무열왕이 즉위한 후 문흥대왕으로 추존되었다. 진평왕, 선덕여왕 시기에 중앙 정계에서 활약하였다. (김용춘에 대한 글은 무열왕 포스팅에서 조금 더 자세히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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