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29대 왕 태종무열왕(김춘추)은 아버지 김용춘과 어머니 천명공주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용춘은 진지왕과 지도부인의 아들, 천명공주는 진평왕과 마야부인의 딸로 선덕여왕과 자매 사이다. 김용춘의 조부인 진지왕이 <삼국유사>의 기록처럼 폐위되었다면 김용춘의 신분은 성골에서 족강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김춘추 태종무열왕은 진골 출신 왕으로 기록되었으나 김용춘의 신분이 명확히 기록되지 않았다. 김춘추가 진골로 기재된 까닭은 진지왕의 폐위 혹은 김춘추가 진골이자 옛 금관가야의 왕족 출신 김유신의 누이인 문희를 아내로 삼은 점 등으로 추측되고 있다.
김용춘은 진평왕과 선덕여왕 시기에 중앙 정계에서 활약하였고, 그 후로는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용춘과 용수를 형제로 기록하며 용춘은 용수의 동생으로 용수가 죽은 후 용수와 결혼한 천명공주를 다시 맞아들이고, 용수의 아들 춘추를 아들로 삼았다고도 한다. 그러나 황룔사구층목탑찰주본기에 따르면 645년까지 용수의 이름이 나타나고 있어 신뢰할 수 없다. 또한 <화랑세기>에 따르면 용춘은 13대 풍월주를 역임하였고 선덕여왕의 부군이 되었으나 자식이 없어 사임하였다고 한다. 김춘추는 진덕여왕 사후 대리청정으로 국인의 추대를 받은 알천의 사양으로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김유신의 여동생인 보희가 어느 날 서악에 올라가 소변을 보았는데 서라벌이 소변에 모두 잠겨버렸다는 꿈을 꾸었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문희는 비단치마를 주고 그 꿈을 샀다. 열흘 뒤 김춘추가 김유신의 집 앞에 있을 때 일부러 김유신이 김춘추의 옷깃을 밟아 끊은 뒤 자신의 집에서 옷을 수선할 것을 권하며 집안으로 들이고, 자신의 누이동생을 불러 옷을 꿰매게 했다. 보희는 사양했고, 문희가 대신 나서서 옷을 꿰매 주었다. 이 일로 두 사람은 가까워졌으나 김춘추가 문희와 정식으로 혼인하려 하지 않자 김유신은 "남편도 없는 것이 부모도 모르게 임신을 하였다"며 곧 문희를 자신이 불태워 죽일 것이라고 소문을 냈다. 선덕여왕이 남산에 오르는 날을 기다렸다가 불을 질러 연기를 피웠다. 산 위에서 그 연기를 발견한 여왕이 묻자 옆에서 "아마도 유신이 제 누이를 불태우려는 모양입니다."라고 대답했고, 까닭을 묻는 여왕에게 "남편도 없이 임신하였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여왕이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했단 말인가?"고 묻는 옆에서, 마침 여왕을 따라 나왔다가 안색이 질린 김춘추를 발견한 여왕은 "너의 짓이구나. 당장 가서 구하라." 하였다. 이후 김춘추는 문희와 혼례를 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금관가야계 김유신의 동생 문희와 혼인을 하며 부친과 모친이 모두 왕족인 성골에 속하지만 진골 출신의 왕으로 기록된 것이다. 김춘추는 김유신의 동생 보희 또한 제2왕비로 삼았다.
642년 백제의 윤충이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며 대야성 성주였던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은 처자를 죽인 뒤 자신도 목숨을 끊었다. 김춘추는 대야성의 일을 계기로 백제를 멸망시키겠다 다짐했다. 고구려 보장왕과 연개소문을 만나 원병을 청했지만 과거 고구려 땅이었던 죽령 이북 땅 반환을 내세운 고구려에 의해 억류되었다가 김유신의 무력 시위로 풀려날 수 있었다.
이후 비담의 난이 김유신에 의해 진압되고, 김춘추와 김유신은 진덕여왕을 보위하여 정권을 장악했다. 진덕여왕이 8년만에 승하하고 진골 세력은 상대등 알천에게 섭정을 청하였으나 이를 사양하고 김춘추에게 왕위에 오를 것을 권하여 29대 신라 왕으로 즉위했다. <삼국사기>는 1대 혁거세부터 28대 진덕여왕까지의 임금을 성골, 29대 무열왕부터 마지막 56대 경순왕까지를 진골이라 하였다.

무열왕은 문희 소생의 맏아들 법민을 태자로 삼고, 김유신에게 딸 지소공주를 시집보내 중첩된 혼인관계를 이루었다. 무열왕은 655년 당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가 백제와 말갈과 연합하여 신라의 북쪽 33개 성을 탈취함을 알라고 구원을 요청했다. 무열왕은 아들인 김인문, 김문왕 등을 사신으로 보내고 조공하게 하였다. 또한 660년 김유신을 상대등으로 임명해 왕권을 안정시켰다. 상대등은 귀족들의 모임인 화백 화의의 대표자로 왕권을 견제하는 존재이거나 왕위계승 경쟁자로서의 자격이 있었는데 무열왕 이후 상대등을 왕이 임명함으로써 화백 회의를 왕권 아래 두었다.
660년 당은 13만 군사를 파병하였고, 5월 대장군 김유신과 김진주, 김천존 등은 5만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였다. 신라군의 지휘는 태자 김법민(문무왕)과 대장군 김유신이 맡았다. 7월 신라군은 황산벌에서 백제군을 격파하고 당군은 기벌포로 상륙하여 사비성이 함락되었다. 웅진성으로 도망쳤던 의자왕도 항복하며 백제는 멸망하였다. 사비성이 함랑했을 때 김법민(문무왕)은 백제 왕자 부여융을 꿇어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네놈의 아비가 내 누이(고타소공주)를 억울하게 죽여 옥중에 묻었다"며 꾸짖었다.
의자왕 항복 후 백제 땅에서는 부흥군들이 일어나 신라. 당군과 전쟁을 별였고 고구려가 칠중성을 공격해오기도 했다. 10월 무열왕은 태자 법민과 이례성을 쳐서 함락시키고 백제 부흥군을 진압했다. 무열왕은 8년만에 5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태종 무열왕 능은 경주에 위치하고 있으며 다른 왕릉에 비해 봉분 장식이 소박한 편이다. 비문의 글씨는 무열왕의 아들 김인문이 썼다.
2018/11/26 - [여행 그리고 맛집/우리나라여행] - 경주여행 / 분황사 / 무열왕릉 / 김유신장군묘
경주여행 / 분황사 / 무열왕릉 / 김유신장군묘
경주여행 추천코스 불국사 - 석굴암 - 대릉원 - 첨성대 - 국립경주박물관 - 동궁과 월지 - 분황사 - 무열왕릉- 김유신장군묘 - 감은사지 사실 박물관 - 분황사 - 동궁과 월지 순서로 방문했는데 블로그 적다보니..
onlygoodmemories.tistory.com
'아는것이힘이다 > 삼국시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구려 문자명왕 안장왕 안원왕 평원왕 영양왕 영류왕 가계도 (0) | 2019.09.15 |
---|---|
고구려 왕조 고국원왕 소수림왕 고국양왕 광개토왕 장수왕 가계도 (0) | 2019.09.14 |
고구려 왕조 6대왕 태조대왕부터 15대 미천왕 가계도 (0) | 2019.09.13 |
고구려 건국 주몽 동명성왕부터 5대 모본왕 고구려 왕계보 (0) | 2019.09.13 |
신라상대 진평왕 신덕여왕 진덕여왕 미실 옥진궁주 가계도 (0) | 2019.09.08 |
신라 제24대 진흥왕과 제25대 진지왕 가계도 (0) | 2019.09.08 |
신라 상대 17대 내물 마립간부터 23대 법흥왕 (0) | 2019.09.07 |
신라 상대 왕조 가계도 (9대 벌휴 이사금부터 16대 흘해 이사금) (0) | 2019.09.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