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것이힘이다/삼국시대

신라상대 진평왕 신덕여왕 진덕여왕 미실 옥진궁주 가계도

GoodFortune 2019. 9. 8.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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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26대 왕 진평왕은 진흥왕의 장손으로 동륜태자와 만호부인의 아들이다. 579년 숙부인 진지왕이 폐위되자 왕위에 올랐다. 즉위후 5년간 조모인 사도태후 박씨가 섭정하였고, 그 후 14년간 친정하였으며 598년부터 600년까지 남동생인 백반 갈문왕이 대리청정하였고, 이후 붕어하기 전까지 632년까지 친정하였다.

 

고구려와 백제와의 전쟁이 계속 되었다. 603년 고구려군이 북한산성을 침입하자 왕이 군사를 끌고 상대하여 고구려를 격파했다. 605년에는 백제를 공격하여 격퇴시켰다. 608년 고구려의 공격으로 우명산성을 빼앗겼다. 611년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움을 요청하여 수 양제가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을지문덕에게 대패하였다.

611년 백제가 가잠성을 빼앗았고, 624년 속함성, 기잠성, 혈책성이 함락당했다. 626년 백제가 주재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전쟁의 피해가 극심해져 백성들의 생활이 궁핍해졌다. 629년 대장군 김용춘, 김서현, 부장군 김유신을 파견해 고구려 낭비성을 공략하여 함락시켰다. 631년 5월 이찬 칠숙이 아찬 석품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으나 왕이 반란을 미리 알아채고 칠숙과 석품을 처형하였다. (칠숙의 난)

 

진평왕 가계도

 

진평왕이 죽자 성골 남성이 없어 화백회의가 열렸다. 성골인 진평왕의 장녀 덕만공주가 왕위를 이었고, 신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이다. 천명공주는 진지왕의 아들 용춘과 결혼하여 태종무열왕 김춘추를 낳았다. 선화공주는 <삼국유사>에만 등장하며 백제 무왕의 왕비가 되었고, 천화공주는 <화랑세기>에만 등장한다.

선화공주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진평왕과 마야부인의 셋째딸이다. 미모가 매우 뛰어나 백제의 서동(훗날 무왕)이 사모하여 두 사람이 남 몰래 밤에 만나곤 한다는 <서동요>를 지어 금성(경주)에 퍼뜨렸다. 공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유배되어 가던 중 서동에게 구출되어 결혼하고 백제에 가서 왕비가 되었다. 일설에는 무왕이 아니고 동성왕이라고도 하며, 선화공주가 신라의 공주가 아니라 백제의 공주, 귀족, 지방 호족의 딸 등 다양한 가설이 있다. 2009년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에 의하면 백제 무왕의 왕후는 사택왕후로 기록되어 더욱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드라마 '서동요' 선화공주

 

천화공주는 <화랑세기>에 따르면 진평왕과 마야부인의 딸이다. 처음에 김용수에게 시집갔으나 그가 천명공주를 아내로 맞게 되어 다시 김용춘에게 시집갔다고 전한다. 김용춘이 선덕여왕을 모시게 되자 천화공주는 백룡공에게 맡겼다고 전한다. 김용춘과의 사이에서 아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따르면 천명공주의 남편은 김용춘이며 그 아들이 김춘추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화랑세기>에 의하면 진평왕의 명으로 동생인 덕만공주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출궁하며 진골로 족강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선덕여왕이 죽은 후 진덕여왕이 왕위에 오른것으로 보아 선덕여왕보다 먼저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진평왕의 어머니인 만호부인은 숙흘종과 재혼하여 만명부인을 낳았고 만명부인은 김서현과 혼인하여 김유신을 낳았다. 진평왕은 김유신의 외숙부가 되는 것이다. 동생 국반의 딸은 선덕여왕 사후 진덕여왕으로 즉위하였다.

 

선덕여왕

 

신라 27대 왕 선덕여왕은 민생의 안정에 주력하여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도록 하는 구휼정책을 활발히 추진하였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대인 첨성대를 건립하여 농사에 도움이 되게 하였다.

634년 분황사를 완공하였다. 분황사의 이름은 '향기로운 임금' 즉 선덕여왕 본인을 가리킨다. 636년 백제가 여근곡에 쳐들어오자 무찔렀고 638년 고구려가 칠중성을 공격해오자 이를 무찔렀다. 642년 백제의 의자왕이 신라 서쪽의 40여개 성을 함락시키고 당항성을 공격하자 당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했다. 백제가 대야성을 함락시켰고 김춘추의 사위 이찬 품석 등을 죽였다. 선덕여왕은 김춘추(태종무열왕)를 고구려에 보내어 동맹을 요청하였고, 고구려 보장왕은 죽령 이북의 땅을 조건으로 요구하였지만 김춘추가 거절하자 그를 감금했다. 협상이 결렬되어 선덕여왕은 김유신을 보내 한강 북부까지 진격하니 보장왕이 김춘추를 풀어주었다. 고구려의 공격으로 당에 구원을 요청하고 여러번 조공을 바쳤다.

 

645년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웠고 당이 고구려를 침략할때 이를 도왔다. 그해 비담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비담은 진골로 추정되며 훗날 반란을 일으킨 역신이다. 647년 1월 비담은 "여자 군주는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며 반란을 일으켰다. 선덕여왕의 정치를 문제삼아 반란을 일으킨 것보다는 진덕여왕을 후계자로 삼자 이에 대항하여 왕위 찬탈을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는 설이 유력하다. 김유신으로 하여 이를 진압하게 하였고 비담과 염종을 포함한 그의 일족 30명은 모두 처형되었다. 비담의 난이 진행되는 도중 선덕여왕이 승하하였고 진덕여왕이 신라 제28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선덕여왕의 혼인에 대해서는 기록된 바가 없다.

 

미실은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신라 시대의 권력자이다. 미실의 아버지는 제2대 풍월주 미진부이며 어머니는 묘도부인이다. 제10대 풍월주 미생랑의 누나이다. 미실의 탄생에 관한 일화에, 미실의 외할머니인 옥진궁주는 칠색조가 자신의 가슴에서 날아 묘도에게 가는 꿈을 꾸었다. 옥진궁주는 꿈을 이상하게 여겨 묘도의 방으로 가 보았는데, 이때 미진부와 묘도가 서로 사랑하고 있었다. 옥진은 기뻐하며 두 사람에게 귀한 딸을 낳을 것이라 예언하였는데, 묘도는 미실을 낳았다고 한다.

 

미실 가계도

 

미실은 5대 풍월주 사다함과 사랑하는 사이였으나 지소태후(진흥왕 모후)에 의해 지소태후의 아들인 6대 풍월주 세종과 결혼했다. 지소태후가 사도왕후(진흥왕 왕비)를 폐출하려 하자 이 사실을 사도왕후에게 고하였고, 진흥왕에게 고하여 지소태후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지소태후는 화가 나 미실을 출궁시키고 법흥왕 동생 진종의 딸 융명을 세종의 새로운 배필로 맞았다. 미실은 출궁하여 사다함과 깊이 사랑하였고, 세종이 미실을 잊지 못하자 사도태후는 미실을 다시 불러들였다. 사다함은 전장에 나갔다 이 소식을 듣고 실망하였다.

진흥왕 시절 사도왕후는 미실에게 태자의 아들을 낳는다면 부인으로 삼아주겠다며 왕태자 동륜과 정을 통하게 하였다. 또한 진흥왕 명에 따라 왕을 섬기게 되었고, 세종의 보좌인 설원랑과 자신의 동생 미생랑과도 정을 통하였다. 진흥왕은 이런 사실을 모른채 미실을 총애하였다. 진흥왕이 병에 걸리게 되자 진흥왕 아들 진지왕과 정을 통하여 왕후가 될 준비를 하였으나 왕후의 자리는 지도부인에게 돌아갔다. 진지왕이 왕위에 오른 후에는 동륜의 아들 백정(진평왕)과 정을 통하는 사이가 되었다. 진지왕이 여색을 좋아하고 미실을 왕후로 봉하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않자 사도태후는 미실과 논의하여 태후의 오빠인 노리부를 통해 진지왕을 폐위하고 동륜의 아들 백정(진평왕)을 왕에 추대하였다. 진평왕 즉위 사도태후가 섭정할 때 미실은 새주가 되었고 노리부는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수많은 남성들 설원랑과의 관계를 가장 진실된 것으로 생각하였으며 설원랑과의 사이에서 보종공을 낳았는데 제16대 풍월주이다.

 

선덕여왕의 미실

 

28대 왕인 진덕여왕은 진평왕의 동생인 국반 갈문왕과 월명부인 박씨의 딸이다. <삼국사기>에서는 진덕여왕을 성골 출신 마지막 왕으로 기록했다. 즉위후 1년간 상대등 알천이 대리청정하였고 기후 친정하였다. 왕위 계승자로 내정되었던 김춘추의 양보로 즉위하였다. 신라의 내정이 내분으로 불안해진 틈을 타 백제가 신라를 침공하였고 김유신을 출전시켰으나 백제의 공략에 밀리고 고구려까지 신라 공격에 가세하게 되었다. 648년 고구려와 백제의 압박으로 군사지원을 얻기 위해 김춘추를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하여 나당동맹이 체결되었다. 649년 중국 의관으로 착용하고 당나라 연호를 사용하였다. 진덕여왕의 남편은 기록에 남지 않았고, 이후 진골 출신이 신라 왕위에 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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