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주몽의 아버지는 해모수로 천신 혹은 천신의 아들이다. 강을 다스리는 신 하백의 세 딸 유화, 훤화, 위화가 청하(압록강)의 웅심연에서 놀고 있을 때 해모수가 그 모습에 반하였고, 유화가 해모수와 만나게 되었다. 하백이 노하여 해모수를 시험해보고 유화를 하늘로 보내었으나 하백이 꾀를 써서 해모수를 다시 시험해보려 했다. 해모수는 하백의 꾀에 노하여 홀로 승천하였고, 하백은 유화를 귀양보냈다. 동부여의 금와왕이 유화를 만나고, 그 처지를 불쌍히 여겨 궁궐로 데려왔는데 햇빛이 유화를 향해 계속해서 비치더니 잉태하여 알을 낳았다. 금와왕은 이를 불길하게 여겨 알을 빼앗아 돼지우리에 던졌는데 돼지들은 알을 소중히 하였고, 소와 말에게 던져보아도 알을 피해갔다. 금와왕은 알을 도끼로 내리쳐보았으나 알은 온전하였고 그 알을 유화에게 돌려주었다.
얼마 후 사내아이가 알을 깨고 나왔는데 일곱살부터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아 백발백중 시키니, 그 아이 이름을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주몽'이라고 지었다. 주몽은 금와왕의 일곱 아들보다 능력이 뛰어나 그들의 시기를 받았다. 대소 왕자가 주몽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유화는 주몽에게 동부여를 떠나라고 하였고 주몽 일행은 남쪽으로 내려갔다. 주몽이 강을 만났을 때 자라와 물고기가 물 위로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어 주몽 일행은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다고 전한다.
동명성왕(기원전37-기원전19) 주몽은 졸본에 정착하여 졸본의 딸(소서노)와 혼인하여 세력을 확장했다. 기원전 37년 졸본 부여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를 건국했다. 주몽의 성은 본래 아버지 해모수에 따를 해 씨였으나 고구려 태조왕 당시 계루부 고씨가 집권하자 주몽의 성씨를 고 씨로 바꾸었다. 주몽은 비류국을 정복하였고 기원전 32년에는 태백산 동남쪽 행인국을 정복했다. 기원전 28년에는 북옥저를 정복하였다.
주몽이 고구려 건국 이전에 부여에 있을 때 혼인한 첫번째 부인은 예랑이다. 기원전 37년 주몽이 부여를 탈출할 때 아들 유리를 임신한 상태로 따라가지 못하였고 기원전 19년 아들 유리와 함께 고구려로 왔다. 두번째 왕비 소서노는 졸본부여의 왕족으로 두 아들 비류와 온조왕을 낳았다. 비류와 온조는 소서노와 우태의 아들로 전하기도 한다. 소서노가 우태와 혼인하여 두 아들을 낳고 우태 사후에 주몽과 혼인했다는 설이 있다.
기원전 19년에 예씨 부인이 유리와 함께 고구려에 왔을때, 유리는 고구려에 오자마자 왕태자에 책봉되었고 3개월 후 동명성왕이 서거하자 유리명왕(기원전19-28)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이에 비류와 온조 형제가 남쪽으로 내려가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섰다고 하며 온조는 기원전 18년 백제를 건국한 백제 초대 국왕이다.
유리명왕은 기원전18년 송양의 딸 다물후를 왕비로 맞이하였다. 이듬해 송씨가 죽고 골천 사람의 딸 화희와 한나라 사람의 딸 치희를 후처로 삼았다. 기원전6년 부여의 대소왕은고구려에 볼모를 요청하였고 유리왕은 태자 도절을 볼모로 보내려 했으나 도절이 가지 않았다. 이에 대소는 군사5만명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폭설로 군사를 잃고 퇴각했다. 태자 도절은 1년에 죽었다.
3년 국내성으로 천도하고 위나암성을 쌓았다. 4년 차남인 해명을 태자로 책봉하였는데 8년 이웃의 황룡국왕이 해명의 힘을 시험해보려고 강한 활을 선물하였는데 해명은 사신 앞에서 활을 당겨 부러뜨리며 "내가 힘이 세기 때문이 아니라 활이 강하지 못한 탓이다"라고 하여 황룡국왕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이에 유리왕은 황룡국왕에게 해명을 죽이도록 하였는데 황룡국왕이 해명을 죽이지 못하자 9년 해명에게 자결을 명하여 해명은 자결했다. 13년 부여가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무휼(대무신왕)이 매복 작전을 써서 부여군을 무찔렀다.
18년 유리왕이 승하했을 때, 장남 도절과 차남 해명은 그 전에 죽었기에 3남 무휼이 고구려 3대 왕 대무신왕으로 즉위했다. 유리명왕이 특히 아끼던 4남 여진은 18년 여름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하며 5남 해색주는 5대 왕 민중왕이다. 6남 재사는 6대 태조왕의 아버지이다.
3대왕인 대무신왕(4-44)은 왕자 시절 13년에 부여군을 격파하였고, 14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21년 대무신왕은 부여 정벌을 하여 22년 고구려의 장수 괴유가 대소왕을 죽였으나 부여군에 포위 당하여 후퇴했다. 부여가 분열되고 대소의 동생은 갈사부여를 세웠고, 대소왕의 사촌동생은 부여 백성 1만 명을 데리고 고구려에 귀순하였다.
32년 낙랑을 공격하여 정복하였다. 낙랑군 정벌에 앞서 왕자 호동이 옥저에 사냥을 나갔다가 낙랑왕 최리를 만나 사위가 되었다. 호동은 고구려로 돌아와 최리의 딸에게 서신을 보내 낙랑의 비밀병기 자명고를 찍어버릴 것을 요구하였고 이후 낙랑국을 기습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낙랑공주는 아버지 최리에게 죽음을 당하고 최리는 고구려에 항복했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이야기는 중국 측 기록에 따르면 이 시기에 고구려가 낙랑을 정복한 기록이 없다고 하여 논란이 되기도 한다. 32년 호동이 대무신왕의 첫째 왕후(5대 모본왕 모후) 모략에 빠져 어머니를 간통했다는 누명을 받았고,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자살하였다. 대무신왕의 왕후는 자신의 아들(모본왕)의 후계구도를 만들기 위해 호동 왕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44년 대무신왕이 승하한 후 유리명왕의 아들이자 대무신왕의 동생인 해색주가 4대 민중왕(44~48)으로 즉위하였다. 대무신왕의 아들인 태자 해우가 어렸기에 민중왕은 대신 왕위에 올랐는데 가족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삼국사기>에는 태자 해우가 어렸기에 민중왕이 왕위를 이었다고 하고 <삼국유사>에서는 모본왕이 민중왕의 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4년의 재위를 하고 48년에 승하하였다. 이후 대무신왕의 아들 해우가 5대 왕 모본왕(48-53)으로 즉위하였다.
모본왕은 대무신왕과 원비 사이의 아들로 이복형제 호동 왕자가 원비의 모략으로 자결하면서 모본왕이 왕위를 이었다. 이후 광개토대왕비 내용과 삼국사기에서 모본왕이 대무신왕의 손자라는 기록이 있었는데, 모본왕의 아버지가 호동왕자라는 설이 된다. 이에 따라 원비가 호동의 아내가 되기에, 호동이 딴 여자에게 눈을 팔자 참소됐다는 설이 나왔다. 모본왕은 성격이 포악하고 국사를 살피지 못해 백성들의 원망이 컸다. 사람을 깔고 앉거나 베개로 삼아 누웠으며 움직이면 죽였다 하며, 신하 중에 간하는 자가 있으면 활을 쏘았다. 모본왕은 53년 곁에서 모시던 모본 사람 두로에게 살해당했다. 아들 익이 태자에 책봉되었지만, 대무신왕의 손자이자 고추가 재사의 아들 궁(태조대왕)이 왕위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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