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것이힘이다/삼국시대

고구려 왕조 고국원왕 소수림왕 고국양왕 광개토왕 장수왕 가계도

GoodFortune 2019. 9. 14.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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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16대 왕 고국원왕(331-371)은 미천왕의 아들이다. 314년 왕태자에 책봉되었고, 331년 미천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334년 평양성을 증축하고 335년 신성을 쌓았다. 338년 전연과 후조의 전쟁이 시작되자 후조와 내통하던 봉추, 송황 등이 망명을 요청해 그들을 받아들였다. 339년 전연이 쳐들어와 동맹을 청하였다. 342년모용황이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로 쳐들어왔다. 고국원왕은 크게 패하여 환도성이 함락되고 단옹국으로 피신하였다. 고국원왕을 추격하던 전연군은 모후 주씨와 왕비를 포로로 잡았으나, 고국원왕의 동생 무의 군대를 만나 크게 패하여 퇴각했다. 전연군은 퇴각 길에 미천왕릉을 파헤쳐 미천왕의 시신을 가져갔다. 343년 고국원왕은 동생 무를 전연에 보내 부왕의 시신을 돌려받았다. 355년에는 모후 주씨를 돌려받았다. 전연은 370년에 전진의 공격으로 멸망하였고 이때 고구려로 도망쳐온 모용평을 체포하여 전진에 송환하여 전진과 우호관계를 맺었다.

 

고구려 왕조 가계도

 

고국원왕

 

 

369년 백제가 마한을 정복하러 간 틈에 고국원왕은 백제 치양성을 진격했다. 백제 근초고왕에게 쫓겨나 고구려로 왔던 백제인 사기가 다시 백제에 투항하여 고구려 군사 정보를 백제의 태자에게 알려주었고 고국원왕은 패하였다. 371년 다시 군사를 끌고 백제를 침략하였으나 근초고왕의 기습 공격으로 다시 한번 패하였다. 근초고왕은 군사 3만을 이끌고 평양성으로 진격해왔고 고구려군은 백제를 물리쳤으나 고국원왕은 전사하였다. (평양성전투)

 

 

 

 

 

 

고구려 17대 왕 소수림왕(371-384)은 고국원왕의 장자로 355년 태자 책봉되었다. 371년 백제 근초고왕과 평양성 전투에서 전사한 고국원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수도를 동황성에서 국내성으로 옮겼다. 382년 전진의 왕 부견이 사신과 함께 승려 순도를 보내 불상과 경문을 전하여 고구려에 처음 불교가 전해졌다. 소수림왕은 전진과 평화적 관계를 수립하며 불교를 수용하고 보급하였다.

 

소수림왕은 귀족자제들의 유학 교육기관인 태학을 세워 유교적 정치이념에 충실하고 중앙집권적 정치제도에 적한한 관리를 양성하였다. 고구려의 태학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교육기관이다. 또한 율령을 반포하여 국가통치와 사회질서 유지를 위한 규범을 갖추었다.

 

 

소수림왕은 백제와는 계속하여 대립하였다. 375년 백제의 수곡성을 뺴앗았고, 376년 백제의 북변을 역습하였다. 377년 백제 근구수왕이 3만 군사를 끌고 평양성을 침공했지만 소수림왕은 이를 막고 남으로 백제를 정벌하였다. 384년 후사 없이 붕어하여 동생인 이련이 고국양왕으로 왕위에 올랐다.

 

18대 왕 고국양왕(384-391)은 형 소수림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385년 군사 4만으로 후연을 공격하여 요동 및 현도를 점령하였으나 그해 여름 다시 빼앗겼다. 386년 백제를 공격했고, 389년 390년에는 백제의 공격을 받았다. 392년 백제 견제를 위해 신라와 우호관계를 맺고 훗날 18대 임금이 되는 왕족 실성을 인질로 받았다. 그해 고국양왕은 승하하고 아들 담덕이 왕위를 이었다.

 

광개토대왕

 

19광개토왕(391-412)은 고국양왕의 아들로 광개토대왕으로 부르기도 한다. 374년에 태어나 384년 아버지인 고국양왕이 왕위에 오르고 386년 태자 책봉되었다. <삼국사기>에는 392년 즉위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광개토왕릉비에는 391년 즉위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18세에 왕위에 오른 광개토왕은 다음해 392년 4만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여 석현성 등 10개 성을 합락시켰다. 3개월 후 백제의 관미성을 30일에 걸친 포위 끝에 함락시켰다. 백제는 빼앗긴 성을 회복하기 위해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광개토왕은 393년 관미성, 394년 수공성에서 백제의 공격을 막아내고 남쪽에 7개의 성을 쌓았다. 396년 백제를 공격하여 아리수 이북의 58개 성, 700여 개의 촌락을 점령하고 위례성을 포위했다. 백제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 아신왕의 동생과 백제 대신 10명을 인질로 잡았다. 광개토왕비의 비문으로 업적을 남겨 지금까지 전해졌다.

 

 

또한 392년 거란을 정벌하여 소수림왕 때 거란으로 잡혀간 1만여 명의 백성을 되찾았다. 모용씨의 후연과도 전쟁을 치뤘는데 400년 후연의 왕 모영성이 신성과 남소성을 공격하여 광개토왕은 42년 후연의 숙군성을 공격하였고 402년 후연을 정벌했다. 405년 후연, 406년 목저성을 격파하여 요동을 점령하였고 407년 후연을 격파하고 6개 성을 점령했다. 후연이 멸망하고 고구려계인 고운이 북연을 건국하자 408년 우호관계를 맺었다.

 

삼국사기에는 413년에 사망한것으로 광개토왕릉비에는 412년에 사망한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광개토왕이 죽은 2년 후 장수왕은 광개토왕비를 세웠으며 비석의 높이 6.39미터 글자 1775자 정도이로 중국 지린 성에 있다.

 

장수왕 시기 고구려 영토

 

고구려 20대 왕은 장수왕(412-491)으로 광개토왕의 아들이다. 409년 태자로 책봉되었고 412년 19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장수왕은 고구려의 정치, 사회, 문화적인 정성기로 부르며 80년간 고구려를 재위하며 가장 넓은 고구려 영토의 업적을 남겼다.

414년 광개토왕릉비를 건립하여 광개토왕의 업적을 기렸으며 423년에는 충주고구려비를 세웠다. 427년 평양성으로 천도하였고 주변 국가들과 안정적인 외교를 펼쳤다. 435년 북연왕 풍홍이 망명을 요청하였으며 장수왕이 이를 받아들여 북연이 북위에 의해 멸망할 때 군대를 보내 풍홍과 그 일족을 구하였다. 고구려로 온 풍홍은 자신의 세력을 믿고 행패를 부리자 장수왕은 풍홍의 태자를 인질로 잡고 시중들을 몰수하였다. 풍홍이 송에 망명 요청을 하자 장수왕은 풍홍을 처형하였다. 북방 국가들과 406년 후연과의 전쟁이 있은 후 598년까 여.수 전쟁이 발발하기 까지 200년간 전쟁이 없었다고 전한다. 장수왕이 북위에 40여차례 조공을 보내어 비난을 받기도 하였으나 그 역시 정치 역량일 것으로 판단되기도 한다.

 

장수왕 재위시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으며 신라와 적대관계가 되었다. 신라와 백제 개로왕은 고구려를 공격하기도 했다. 장수왕은 475년 백제를 공격하여 수도 위례성을 합락시키고 개로왕을 사로잡아 살해하였고 489년 신라를 공격하여 호명성 등 7개 성을 함락했다. 장수왕은 491년 98세로 사망하였다. 그의 아들 고조다는 장수왕보다 먼저 죽었으며 고조다의 아들 문자명왕이 왕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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