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것이힘이다/삼국시대

고구려 문자명왕 안장왕 안원왕 평원왕 영양왕 영류왕 가계도

GoodFortune 2019. 9. 15.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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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22대 왕인 문자명왕(491-519)은 장수왕의 손자이다. 장수왕의 아들 고추대가 조다가 장수왕보다 먼저 사망하며 손자가 왕위를 이었다. 494년 부여의 왕이 처자를 데리고 고구려에 항복하여 부여를 복속시켰고, 신라(21대 소지 마립간)와 살수에서 전쟁이 벌어졌는데 신라군이 패하여 견야성으로 들어가 농성하자 포위하였으나 백제(동성왕)가 신라에 구원군을 보내어 고구려는 후퇴하였다. 495년 백제의 치양성을 포위하였으나 신라가 군대를 보내어 다시 후퇴하였다. 신라 백제와 전투가 있었으나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에 이어 고구려의 최대 영토를 유지하였다.

 

고구려 왕조 가계도

 

아들 둘과 딸을 두었는데 장남 고흥안은 22대 안장왕, 차남 고보연은 23대 안원왕이며 딸 안학공주는 고구려의 장군 을밀과 혼인하였다.

 

고구려 22대 왕 안장왕(519-531)은 문자명왕의 장남으로 498년 태자 채봉된 후 문자명왕이 승하하자 왕위에 올랐다. 태자 시절 백제와의 전쟁 준비를 위해 백제에 들어갔을 때 '한주'라는 여인과의 사랑 이야기가 전해내려온다. 백제 개백현(고양시)에 간 사내(안장왕)가 한주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졌고, 그 사내가 떠나며 자신이 고구려 왕자인데 잠입한것이라며 돌아가서 군사를 일으켜 꼭 그 여인과 혼인하겠다고 하였다. 한주가 살던 개백현 태수가 한주에 반해 혼인을 청하였으나 한주는 청혼을 거절하고 태수는 한주를 감옥에 가두었다. 이 사연을 들은 안장왕에게 장군 을밀이 자신이 개백현 땅을 찾고 한주를 구해올테니 안장왕의 여동생 안학공주와 혼인해달라고 하였다. 장군 을밀은 광태패로 변장하여 태수의 생일 행사에 참석하여 백제군을 기습하였다. 한주는 고봉산에 올라 봉화를 올리고 안장왕은 개백현을 공격하여 한주와 재회하였고 장군 을밀도 안학공주와 혼인하였다는 이야기다.

 

안장왕은 523년 백제를 침략하였고 529년에도 백제와 싸워 이겼다. 일본서기와 신찬성씨록에서는 안장왕에게 복귀군이라는 아들이 있었고 그가 일본으로 망명하여 고마 씨의 선조가 되었다고 한다.

 

 

고구려 23대 왕인 안원왕(531-545)은 문자명왕의 차남으로 안장왕의 동생이다. 531년 안장왕이 죽자 아들이 없어 왕위에 올랐다. 540년 백제가 우산성을 포위하였으나 물리쳤다. 왕후에게 아들이 없자 후궁들(중부인과 소부인)이 서로 자기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고 하면서 각각을 후원하는 귀족세력들인 추군과 세군 사이에 무력충돌이 있었다. 소부인 세력인 세군 측 2000여명이 죽었는데 안원왕은 두 세력의 충돌이 진행되는 도중 승하하였다.

 

고구려 24대 왕인 양원왕(545-559)은 안원왕의 아들로 533년 태자가 되었다. <백제본기>에는 중부인의 8살 아들 평성을 왕으로 옹립하였다고 되어 있으나 533년 태자가 되는 시기와 평성이 왕으로 옹립되는 나이가 상충된다. 양원왕은 548년 백제 독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신라의 구원군으로 실패했다. 550년 백제가 쳐들어와 도살성이 함락되었다. 551년 신라가 쳐들어와 10개의 상이 함락되었고 552년 장안성을 쌓았다.

 

고구려 왕조 가계도

 

고구려 25대 왕 평원왕(559-590)은 양원왕의 아들로 557년 태자로 책봉되었다. 586년 장안성으로 천도하였고, 570년 왜(일본)에 사신을 보내 화친하였다.

 

또한 평원왕의 딸 평강공주와 온달장군의 설화가 탄생한 시기이다. <삼국사기>에 수록된 설화에 평강공주가 어려서 자주 울자 평원왕이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고 놀렸고 16세에 평원왕이 고씨 가문에 출가시키려 하자 궁궐을 뛰쳐나와 온달을 찾아갔다 한다. 온달 모자는 평강공주를 거부하였으나 평강공주는 모자를 설득하여 온달과 혼인하였다. 평강공주는 가져온 값비싼 팔찌를 팔아 살림을 장만하고 말을 정성스레 길렀다. 북주의 무제가 고구려를 침략했으나 온달의 공으로 북주를 물리쳤다. 590년 온달이 신라와 싸우다 전사하고 관에 들어갔는데 옮기려 해도 움직이지 않다가 평강공주가 관을 어루만지며 돌아가자고 하여 옮길 수 있었다고 한다.

 

 

 

589년 중국은 수가 남조의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대륙을 통일하고 고구려를 압박하던 시기이며 신라와 백제의 나제동맹이 깨져 삼국이 대립하던 시기이다. 평원왕은 군사력 강화에 힘썼으며 590년 승하하였다. 평원왕은 3남 1녀를 두었다. 장남 고원은 영양왕, 차남 고건무는 영류왕이 되며 3남 고대양은 보장왕의 아버지이다. 영양왕과 영류왕은 이복형제로 기록되어 있으며 다른 자녀에 대한 모후는 정확히 기록에 없다.

 

 

평원왕의 뒤를 이은 고구려 26대 왕은 영양왕(590-618)으로 평원왕의 장남이다. 중국을 통일한 수 문제는 돌궐과 고구려에 압력을 가했다. 수 문제와 영양왕은 서로 사신을 보내 동태를 살폈다. 수 문제가 고구려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598년 고구려는 말갈병 1만명을 동원하여 요서 지역의 임유관을 선제 공격했다. 수 문제는 30만 명을 동원하여 요동성을 공격하였는데 고구려군은 보급선을 격파하여 군량 공급을 끊어 수나라 대군은 퇴각하였다. 영양왕은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하였다. 이때 백제가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자신들이 길잡이 노릇을 할테니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제의하였는데 수나라는 거부하였고 이를 알게 된 영양왕은 백제를 침공했다. 603년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하였고 이때 신라 진평왕이 군사를 이끌고 대항하였다. 607년 백제의 송산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는 못하였다.

 

수나라 새로운 황제 수 양제는 고구려에 조공을 요구하였다. 고구려가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자 수 양제는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대군을 조직하였고 고구려는 608년 신라의 북쪽을 습격하여 우명산성을 함락시키고 신라와 백제를 여러차례 공격하여 아리수 이북의 영토를 회복하였다. 612년 수 양제는 군사를 직접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수나라 군대는 113만 3800명이었다고 한다. 수 양제는 요동성을 포위하였으나 무너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해군은 강을 따라 평양성으로 향했으나 고구려군은 매복하고 있다가 급습하여 수나라는 패하였다. 이후에도 수나라는 고구려 공격을 계속 하였으나 모두 실패했다. 수 양제는 살수에서 고구려 을지문덕에게 대패하여 퇴각하였다.(살수대첩)

 

613년 수 양제는 고구려를 다시 공격하였다가 내부 반란이 일어나자 급하게 퇴각하였다. 614년 수 양제는 또다시 고구려를 침략하기 위해 움직였으나 수나라 군대는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고 영양왕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 수 양제는 중신들의 주장에 밀려 화친 제의를 받아들이고 퇴각했다. 반란이 끊이지 않던 수나라는 점차 몰락하고 있었고 618년 수 양제는 강도에서 피살되었고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세워졌다. 영양왕 또한 618년 승하하였다.

 

영류왕

 

26대 왕 영류왕(618-642)은 평원왕의 차남이자 영양왕의 이복동생 고건무이다. 형인 영양왕이 후사 없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영류왕은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전쟁 영웅이자 25년간 큰 전쟁 없이 나라를 다스렸다. 고건무가 왕위에 오르기 전인 612년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에서 고건무는 수나라 래호아가 지휘하는 수만의 군대를 막아내는 임무를 맡았다. 래호아는 수나라 군대에 군수품을 보급하며 평양을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건무는 래호아의 진영으로 직접 돌진하여 보급품을 끊었고, 을지문덕은 살수대첩에서 수나라를 이길 수 있었다.

즉위해인 618년 수가 몰락하고 당이 세워졌다. 당 고조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의하였고 고구려에서는 화친을 수용했다. 영류왕은 고수전쟁 당시 잡혀갔던 양국의 포로들을 교환하고 당으로부터 도교를 받아들이며 교류하였다. 626년 당 황태자 이건성을 죽이고 당 고조를 압박해 왕위를 찬탈한 당 태종 이세민은 제위에 오르자 영토 확장을 가속하여 고구려를 압박했다. 또한 고구려에 백제와 신라와 화친하라고 종용하여 영류왕은 이를 수용했다. 신라 진평왕은 당을 이용해 영토 확장을 계획하여 629년 김유신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낭비성을 탈취하였고 636년 영류왕이 칠중성을 공격했으나 신라 장수 알천에게 패하였다.

 

631년 부여성에서 발해에 달하는 천리장성 축조를 지휘하던 연태조가 지병으로 죽고 그의 아들 연개소문이 이어받았으며 이후 646년 천리장성이 완공되었다.

 

연개소문

당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왕태자를 당 장안에 입조시키라고 요구하였고 조정은 강경파와 온건파로 양분되었다. 영류왕은 왕태자를 장안으로 보내 당과 관계를 돈독히 하자는 온건파의 손을 들어 640년 왕태자 고환권을 장안에 보냈다. 641년 당 태종은 당의 진대덕을 고구려에 보내어 고구려의 지리를 자세히 관찰하고 군사력을 조사했다. 당에 귀국한 진대덕은 당 태종에게 고구려를 공격하라고 간언했다.

 

강경파들은 영류왕의 친당책에 불만을 가졌고 온건파는 천리장성 축조까지 중단하자고 주장하였다. 연개소문은 강하게 반발하였고 영류왕과 온건파는 연개소문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642년 연개소문은 군사들을 이끌고 조정 신하들을 참살하고 영류왕을 잡아 살해하여 목과 사지를 저자거리에 매달았다. 연개소문은 영류왕의 동생 고대양의 아들 보장을 옹립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당에 사신으로 갔던 고환권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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