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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케메네스 제국 페르시아 제국

GoodFortune 2019. 10. 5.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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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이란 남서부 해안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파르스(Fars)라고 부른데서 비롯되었다. 이것이 라틴어화하여 페르시아로 변했으며, 이 곳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발상지로 아케메네스 제국(BC 550~ BC 330)의 명칭이 페르세아 제국이 되었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페르시아에서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제국이며 당시 3개 대륙에 걸친 대제국이었다. 

 

페르시아 제국

아케메네스 제국은 아케메네스의 아들 테이스페스를 시조로 한다. BC 691년 테이스페스 왕자는 안잔시를 점령하고 부친 아케메네스의 이름을 딴 왕조를 세웠다. 그의 사후 왕국은 둘로 나뉘어 북부는 차남 아리아라메스, 남부는 장남 키루스가 통치했다.

 

키루스 1세는 페르시아인들을 통합했으며 키루스의 아들 캄비세스 1세는 메디아 왕국의 공주 만다인과 혼인하여 페르시아와 메디아를 통합했다. 메디아는 이란 북서부에 있었던 고대 국가이다. 이시리아가 멸망한 후 메디아가 세워졌으며 이란의 첫 번째 국가에 해당한다. 캄비세스 1세의 장남 키루스 2세는 주변국을 점령하였고 그가 즉위한 559년부터를 아케메네스 왕조의 시작으로 본다.

 

아케메네스 왕조

 

키루스 2세에 대해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캄비세스 1세와 메디아의 국왕 아스티아게스의 딸 만다인 사이에서 태어난 키루스 2세는 아스티아게스에게 심하게 박대를 받아 어린시절 목동 밑에서 자랐다고 한다. 아스티아게스는 키루스 2세가 자신의 왕위를 찬탈하는 것이 두려워 박대했다. 어머니 만다인이 결혼하기 전에 꿈에서 소변을 보다가 소변이 아시아를 뒤덮는 꿈을 꾸었고, 키루스를 임신했을 때 만다인 다리 사이에서 포도나무가 자라 아시아를 뒤덮는 꿈을 꾸었다. 아스티아게스가 메디아의 사제 바고스를 불러 해몽해보자 만다인이 낳을 외손자가 아스티아게스를 몰아내고 왕이 된다고 하였다. 아스티아게스는 신하인 하르파고스를 불러 외손자의 살해를 지시했으나 하르파고스는 어린 아이를 살해하지 못하고 목동에게 보내어 죽이라고 지시했다. 목동은 키루스를 죽이지 못하고 아들로 숨겨 키웠다.

 

 

목동의 아들로 자라 10살이 된 키루스는 친구들과 왕과 신하 역할 놀이를 하던 중 왕으로 뽑혔는데, 이 가운데 메디아의 귀족출신 아이는 목동인 키루스를 왕으로 섬길 수 없다고 하자 키루스는 귀족아이를 때렸다. 귀족 아버지 아르템바레스는 국왕 아스티아게스에게 사실을 고하였고 키루스는 왕 앞으로 왔다. 아스티아게스는 추궁하던 중 키루스가 외손자와 유사함을 느끼고 목동 미트라다테스와 신하 하르파고스를 심문하여 그 아이가 자신의 외손자임을 알았다. 메디아의 사제 마고스는 키루스나 놀이라도 왕이 되었으니 더이상 왕위를 위협하지 않을것이라 예언했고 키루스는 친부모가 있는 페르시아로 보내졌다. 키루스는 성년이 되자 아스티아게스에게 반란을 준비하였고 BC554년 반란을 일으켜 BC 549년 엑바타나를 정복하여 메디아 제국을 정복했다. 이것이 마케메네스 제국의 시작이다.

 

유대인을 해방시킨 키루스 2세

 

키루스 2세는 BC 555년 메디아 왕국을 점령하고 BC 545년 소아시아 점령, BC 539년 당시 강력했던 신바빌로니아 제국을 물리치고 최고로 강한 나라로 성장했다. 키루스는 바빌로니아를 정복하고 '키루스 원통'이라는 인류 최초의 인권선언문을 발표했는데 이는 1879년에 발견되었다. 모든 시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질 수 있으며 노예제를 금지하며 궁궐을 짓는 모든 일꾼은 급여를 지급한다고 되어 있었다. 

 

BC 539년 키루스 2세는 신바빌로니아의 왕 나보니두스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을 구실로 바빌로니아를 침략했다. 많은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나보니두스에게 등을 돌렸기에 키루스의 정복은 쉽게 이루어졌다. 신바빌로니아는 키루스에게 정복당하기 전 유다 왕국과 시리아 왕국 등 많은 왕국을 지배하고 있었는데 모두 키루스의 수중에 들어갔다. 키루스는 바빌로니아에 잡혀와있던 유대인을 해방시켜 예루셀렘으로 돌아가게 하고 유대인의 신성한 예루살렘 성전을 짓도록 허락했다. (구약성경에 기록되었음)

 

 

키루스는 메소포타미아 지방 뿐 아니라 그리스에서도 이상적인 군주이자 자비로운 대왕으로 존경받았다. 아스티아게스로부터 고난을 받아 목동에게 길러졌으며 폭군 아스티아게스를 타도하고 페르시아 제국을 세운 그의 일대기는 영웅신화로 각색되었다.

 

키루스의 아들 캄비세스 2세는 이집트를 병합하였다. 캄비세스가 부재한 사이 페르시아 인들은 반란을 일으키고 가우마타를 따르기로 하였고, 다리우스는 페리스아의 다른 여섯 귀족 가문의 도움으로 왕위 찬탈을 시도한 가우마타를 제거하면서 왕위에 올랐다. 다리우스는 하스타스페스의 장자로 파르사 지방의 유력자였고 다리우스는 캄비세스 2세의 이집트 원정에서 창병으로 활동하였다.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는 페르시아 제국의 세번째 왕 다리우스 1세에 이르러 최고의 영토가 되었다. 

 

다리우스는 왕위에 오른 후, 엘람과 앗시리아, 바빌론 등 제국 전반에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였다. 반란의 혼란을 탐트 스키타이 유목민들이 남쪽으로 침투하여 페르시아를 침공하여 이를 막아냈다. BC 513년 도나우강을 건너 스키타이를 정벌하여 몰아내며, 트라키아, 북부 에게 해의 많은 도시들을 정복하였고, 마케도니아는 자발적으로 종속하였다. BC 510년까지 소아시아 지역의 그리스와 그리스 섬들은 페르시아의 지배에 복종하였다. 그러나 페르시아인들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두려움이 커지고 이오니아와 리디아 지방의 그리스 사람들이 방해를 하여 페르시아와 그리스 사이의 분쟁이 발생하였다. 아리스타고라스와 이오니아가 반란을 꾀할 때 에레트리아와 아테네는 그들을 지원하였고, 반란을 진압한 페르시아는 이오니아와 그리스 섬을 다시 확보하였다. 그러나 반페르시아 집단이 커져 아테네에 집결하였고 그들은 친페르시아 귀족들을 추방시켰다. 다리우스는 헬레스폰트해협을 건너 파병하였으나 트라키아 인들에게 패배하였다. 다리우스는 아테네를 징벌하기로 결심하고 군대를 파병하였고, BC 490년 마라톤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은 패하였다. 다리우스는 다시 그리스를 정벌하기 위해 군대를 준비하였는데 이 때 이집트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건강이 악화되며 그리스 침략의 꿈을 접어야만 했다.

 

다리우스 1세와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의 통치 가간 중 아케메데스 왕조는 전성기를 맞았다. 이때 아케메데스의 영토는 인더스 강에서부터 유럽에 이르렀다. 중국을 제외한 그 당시 달려진 대부분의 문명을 통일한 것이다.

 

크세르크세스 1세는 이집트의 반란을 진압하고 페르시아식 행전체계를 갖추어 나갔다. 크세르크세스는 자신의 동생을 이집트 총독에 임명하고 혹독하게 다스렸다. 바빌로니아의 반란을 진압할 떄는 신전을 파괴하고 바빌로니아 왕의 상징인 황금 신상 마르둑을 파괴하며 바빌로니아 왕의 지위를 거부하였다. 자신의 칭호를 페르시아와 메디아의 왕으로만 표현하고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의 왕을 빼기도 했다. 아버지 다리우스가 마라톤 전투에서 그리스에 패한 것을 복수하기 위해 그리스 정벌을 준비했다. BC 480년 그리스를 침공하였다.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그리스 병사들과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것이 스파르타 정예병 300명, 노예병 7000명과의 테르모필레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크세르크세스는 아티카와 아테네까지 정복했으나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끄는 그리스 해군에게 '살라미스 해전'에서 패하며 후퇴했다. 플라타이아 전투에서도 그리스 연합군에 패하여 후퇴하였다. 크세르크세스는 페르세폴리스에 자신의 궁전을 세우고 보물 창고를 건설했다. 이후의 기록은 거의 없으며 BC 465년 아들과 아르타바누스 등 신하들의 쿠데타와 후궁들간의 음모로 암살당했다.

 

크세르크세스 1세의 셋째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아버지를 암살한 아르타바누스와 형 다리우스를 처형하고 즉위했다. 박트리아, 이집트, 리비아 등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아테네가 주도하는 델로스 동맹은 이집트를 지원하여 페르시아와 맞섰다. 다리우스 1세부터 이어진 페르시아와 그리스는 <칼리아스 평화조약>을 맺어 전쟁을 종결시켰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때부터 왕족 내부에 파벌이 형성되며 제국이 분열되기 시작했다. 그의 뒤를 이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와 다마스피아 왕비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2세는 즉위 2개월만에 형제인 소그디아노스에게 암살당하였다. 소그디아노스는 또다른 형제 다리우스 2세에 의해 죽고, 다리우스 2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정통성이 명확하지 않았다. 페르시아 내에서 반란이 계속되었고, 이집트도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스 도시 국가인 스파르타와 아테네 간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장기간 지속되었는데, BC 404년 페르시아의 지원과 스파르타의 병력으로 아테네는 몰락했다.

 

다리우스 2세의 장남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제왕 중 재위기간이 가장 길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의하면 아르타크세르크스 2세는 온화한 성격이었고 그의 동생 키루스는 영리한 야심가였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스타레이라와 혼인하였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어머니인 파리사티스는 그의 동생 키루스를 왕위에 올리고자 하였으나 다리우스 2세는 장자 아르타크세르크세스를 후대 왕으로 지명하였고 다리우스 2세가 죽자 왕위에 올랐다. 키루스는 형의 암살을 계획했지만 실패하였다. B.C 402년 반란이 계속되던 이집트가 왕국을 배반하였고, B.C 401년 동생 키루스가 그리스 용병을 모아 또다시 반란을 일으켰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키루스의 지원을 받은 스파르타가 반란을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쿠낙사 전투>에서 형제는 맞붙었으니 키루스가 전사하면서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왕위를 지킬 수 있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형 다리우스와 아리아스페스를 살해하고 즉위하였다. BC 368년부터 BC 358년까지 아나톨리아의 반란을 진압하고, 이집트, 예루살렘, 시리아, 페니키아, 키프로스에 이르는 반란을 진압했다. 또한 BC 343년 이집트를 다시 정복했다.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2세(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도 아르타크세르크스 3세와 사이가 좋아 아케메네스 왕조와의 연합을 모색하기도 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환관 바고아스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아들 아르세스 또한 바고아스에게 독살당했다. 바고아스는 자신이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자를 찾아 왕가에서 갈라져나온 먼 친척인 코도만누스를 왕에 임명했는데, 그가 바로 다리우스 3세였다.

 

다리우스 3세는 즉위한 후 바고아스에게 독배를 주어 그를 죽였다. 아내는 스타테이라 1세이며 알렉산더 3세의 왕비가 된 스타테이라2세와 헤파이스티온의 아내가 된 드리페티스가 그의 딸이다.

 

가우가멜라전투의 다리우스 3세

 

당시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가 암살당했고,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3세가 마케도니아의 왕위에 올랐다. 알렉산드로스는 군대를 끌고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페르시아 군과 싸웠고, 그라니코스 강 전투에서 페르시아는 패하였다. BC 333년 다리우스는 대군을 모아 출전하였으나 이수스 전투에서 패배하며 도망쳤다. 그의 어머니 시시감비스와 처자식들이 알렉산드로스의 포로가 되었다. 다리우스 3세는 유프라테스강 서쪽의 페르시아 영토를 모두 마케도니아에 넘겨 주고, 자신의 딸과 결혼하게 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의 제의를 거절하고 메소포타미아로 진격했다. 다리우스는 알렉산드로스와의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패하고 박트리아까지 피난하였지만 피난길에서 바고아스의 친적이었던 베수스에게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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