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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마지막 여성 파라오 클레오파트라 7세

GoodFortune 2019. 10. 1.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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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일반적으로 알려진 클레오파트는 클레오파트라 7세 필로파토르 이다. 셀레우코스의 왕 안티오쿠스 3세는 자신의 딸 클레오파트라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혼인시켰고, 클레오파트라 라는 이름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여인들에게 자주 애용된 이름이다. 클레오파트라 7세(BC69- BC30)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여성 파라오이자 최후의 여왕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는 BC 305년부터 BC30년까지 이집트를 다스렸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 부하였던 프톨레마이오스는 BC 323년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후 이집트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가 스스로 이집트의 왕이 되었다. 이후 약 300년간 이집트를 통치하였다.

 

클레오파트라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와 어머니 클레오파트라 5세의 셋째딸로 태어나 부왕이 죽은 뒤 18세에 15세인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하여 공동 파라오가 되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천부적인 언어 능력으로 이집트의 수도 알렉산드리아를 통교하는 수많은 나라의 언어를 모두 구사하였다 한다. 클레오파트라가 파라오에 오른 시절 로마는 대제국으로 성장하여 이집트를 압박하고 있었다.

 

 

 

클레오파트라를 두고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 파스칼은 그녀의 코가 1cm만 낮았어도 역사가 바뀌었다고 할 정도로 후대의 남성들에게 성적인 관점에서만 평가받았다. 파스칼의 말로 클레오파트라는 미와 색으로 남자를 홀리는 치명적인 팜므파탈의 이미지로 고정되었다. 또한 생전에도 옥타비아누스로부터 로마를 짓밟는 성적인 그리스 여인 취급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는 강대국 로마를 이용하여 나라를 보전하려는 시도가 많았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왕들 중 유일하게 고대 이집트어를 사용하며 고대 이집트 종교의 이름으로 궁전 밖의 세계를 다스려 다시 한번 이집트 황금기를 열고자 노력한 호걸이라는 평가가 있다.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의 두 영웅 율리우스 카이사르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사랑하였고, 그녀를 사랑한 두 영웅은 모두 비극적인 종말을 맞았다.

 

카이사르 앞의 클레오파트라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클레오파트라 7세에게 반기를 들었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권력 기반인 그리스계의 외면으로 파라오 자리에서 일시적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BC 48년 폼페이우스를 쫓아 로마의 장군 카이사르가 이집트로 오게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섭정들은 카이사르와 적이 되지 않기 위해 폼페이우스를 죽였는데,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정적이었지만 같은 로마인이기에 카이사르는 기뻐하지 않았다고 한다. 카이사르가 품페이우스를 죽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일파에게 통치를 맡길지 고민하고 있는 중, 내부적으로 위기에 몰려 몸을 피하고 있던 클레오파트라 7세는 그를 만나기로 결심한다. 일설에 따르면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를 만나기 위해 방바닥에 까는 융단으로 몸을 감아 카이사르 방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융단이 펼쳐지며 미모의 클레오파트라가 나타났고, 당시 21세의 클레오파트라는 52세였던 카이사르의 연인이 되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의 도움으로 내부의 적들을 무찌르고 다시 파라오 자리에 올랐다. 결정에 풀만을 품은 섭정들은 군사를 일으켰으나 카이스라의 완전한 승리로 끝났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전사했고 공통 파라오는 프톨레마이오스 14세가 되었다.

 

 

 

승리를 거둔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와 이집트에서 2주간 지낸 후 이집트를 떠났다. 클레오파트라의 아들 카이사리온이 카이사르의 아들인지는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BC 44년 카이사르가 로마 귀족들에게 암살당하고 아들 카이사리온이 카이사르의 후계자가 되리라고 확신했던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의 유언장에 그들 모자에 대한 언급이 없자 배신감을 갖게 되었다.

 

카이사르 사후 로마는 안토니오스파와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파로 나뉘어졌다.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는 어렸고 오랫동안 카이사르를 따라다니며 그와 함께 했던 안토니우스가 더 강한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를 이집트로 불러들이고 그를 유혹하여 결혼하게 된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의 누나와 결혼한 유부남이었는데 아내와 아이들을 버리고 클레오파트라를 택하였다. BC 37년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에서 낳은 쌍둥이를 적자로 인정했다.

 

안토니우스

 

로마에서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와의 삼두정치가 깨지자 BC 31년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우스는 악티움 해전을 결행했다. 악티운 해전에 실패하자 후퇴하여 이집트로 온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품에 안겨 최후를 맞이하였고, 자신을 나약한 그리스 여인으로 취급하는 옥타비아누스와 연합할 수 없음을 안 클레오파트라는 39세의 나이로 자살했다.  뱀에 물려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독가스를 사용했다는 설도 있다. (또한 에이즈 감염에 의한 병사라는 설도 있다.)

 

클레오파트라의 죽음 - 귀도카나치

클레오파트라 7세의 죽음으로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은 멸망하였고 이집트는 로마의 속주로 전락하였다.

 

 

클레오파트라의 미모 비결이 현대까지도 많이 퍼지고 있다. 이집트 왕궁 내에 그녀 전용 화장품 공장을 만들 정도였다고 하는데, 이탈리아 고고학자 도나토 교수는 클레오파트라의 화장품 제조 공장을 모형으로 만들어 재현한 적도 있다. 화장품 제조 공장 내에는 약초를 갈 수 있는 맷돌이 2개씩 들어있는 방이 9개 있었고, 피부를 위한 연구를 만드는 가마가 2구나 있었다. 또한 진흙팩과 우유 목욕, 우유 세안을 즐긴 것으로 알려져있는데 여행길에 늘 당나귀를 대동하며 당나귀 우유로 목욕을 했다고 한다.

 

이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클레오파트라 화장, 클레오파트라 염색 등 그녀의 미에 대한 칭송은 지금까지도 계속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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