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공주
1603-1685
1602년 조선 14대 임금 선조는 김제남의 딸을 계비로 맞아들였다. 당시 선조의 나이 51세, 인목왕후의 나이 19세였다.
정명공주는 선조와 계비 인목왕후의 딸로 광해군에게 죽임을 당한 영창대군의 누나이다. 선조에게는 유일한 적녀였으며 52세 늦은 나이에 본 늦둥이 딸이었다.
인목왕후의 측근이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계축일기>에서는 아래와 같이 전한다.
계묘년(1603년) 왕비께서 공주를 낳으셨다. 왕자에 대한 기대가 컸던지 소식이 잘못 전달되어 대군 아기씨가 태어났다고 전해졌다. 실망한 유자신(광해군의 장인)은 한마디 말도 하지않았다. 다시 공주마마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그제야 반색하며 축하 예물을 올렸다.
정명공주가 태어난 후 1606년 인목왕후는 영창대군을 낳았다. 영창대군이 태어난 후 2년 후 선조는 승하하였고 적자인 영창대군이 어렸기에 공빈 김씨 소생의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다.
<계축일기>에 따르면 광해군은 영창대군은 본체만체했지만 정명공주는 아꼈다고 전한다.
하루는 대군이 '대전 형님(광해군)이 보고싶다' 라고 보채어 정명공주와 영창대군을 나란히 인사시켰다. 상감은 정명공주에게 '이리 와 보라'라며 만져 보기도 하고 '참 영민하고 예쁘구나'라고 칭찬하기도 했으나 대군에게는 말도 붙이지 않고 본 체도 하지 않았다. 대군이 어려워하자 인목대비께서 '너도 상감 앞으로 가 보거라'라고 일러주셨다. 대군이 일어나 임금 앞에 가서 섰지만 여전히 본 체도 아니 하시니 대군이 나가서 울음을 떠뜨리셨다. '대전 형님이 누님은 귀여워하시고 나는 본 체도 아니 하시니 나도 누님처럼 여자로 태어났어야 했는데, 무슨 일로 사내아이가 되었는고."라며 종일 우시니 불쌍하시어 차마 볼 수가 없더라.
1614년(광해군6) 외조부 김제남과 동생 영창대군이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역모죄로 처형되었다.
2019/07/09 - [아는것이힘이다/조선역사] - 광해군과 영창대군
광해군과 영창대군
광해군(조선 15대 임금) 1575-1641 재위 1608-1623 광해군은 선조와 공빈 김씨 사이에 태어났으며, 1592년(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서울이 함락될 위기에 피난지였던 평양에서 세자에 책봉되었다. 형인 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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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인 인목왕후가 서궁에 유폐되면서 정명공주 또한 함께 감금되었고, 대비를 후궁으로 대우하며 그 딸인 정명공주는 폐서인하였고 늠료(관황, 벼슬아치들에게 주던 봉급)와 혼인만을 옹주의 예를 따르도록 했다.
정명공주는 유폐된 서궁에서 한석봉의 필법을 수련하였고, '화정' 이라는 글자가 지금도 남아있다. 화정은 글자 하나의 사방이 각각 73cm나 되는 대작으로 여성의 체력으로 이런 글씨를 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화정은 정명공주가 죽은 후 막내아들 홍만회가 물려받았다. 당시 '문한은 부인들이 할 일이 아니라'라는 유교 습속으로 정명공주는 자신의 작품이 남에게 알려지는 것을 꺼렸고, 이 때문에 정명공주가 글씨를 잘 쓰고 문장에 능하다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선조의 다섯번째 아들 정원군의 장남인 능양군은 1623년 인조반정을 일으켰다. 정명공주는 공주로 복권되었고 어머니 인목왕후와 함께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인조는 인목대비와 고모인 정명공주를 깍듯이 대우했다. 당시 정명공주는 21세로 혼기가 한참 지난 나이였고 서둘러 부마간택령이 내려졌다. 동지중추부사 홍영의 아들 홍주원이 부마로 간택되었고, 인조는 인경궁의 재목과 기와를 내어주어 정명공주의 집을 짓게 하였다. <경국대전>에서는 공주의 집은 50간을 넘지 못하게 규정하였으나 정명공주의 집은 200간에 이르렀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의 안동별궁으로 현재 이 자리에는 풍문여고가 자리하고 있다.
1632년(인조10) 인목대비가 인경궁에서 숨을 거둔 후 초상을 치르던 중 인경궁에서 백서삼폭이 발견되었는데 비단에 '왕을 폐위하고 세우는 일과 같았다'라는 문구가 있었다. 인조는 인목대비가 자신을 폐위하고 다른 누군가를 왕으로 세우려 했던것을 의심하였고 그 의심은 정명공주에게 갔다. 인조는 몸이 아플 때마다 정명공주를 의심하고 공주를 핍박했다. 1639년(인조17) 인조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렸고, 인조는 저주로 인해 병이 걸렸다 의심하였다. 원손이 거주할 향교동 본궁에서 저주때 쓰이는 물건이 발견되었고 인조는 배후로 정명공주를 지목했다. 최명길 등 반정공신들은 정명공주의 편에서 적극 대응하였기에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남편 홍주원과의 사이에 7남 1녀를 두었으며 1685년 8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는데, 선조, 광해군, 인조, 효종, 현종, 숙종 6대 조선 국왕을 거치며 조선시대 공주 가운데 가장 장수하였다. 혜경궁 홍씨로 알려진 헌경왕후 홍씨는 정명공주의 6대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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