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것이힘이다/조선역사

조선생존기 역사속 인물 문정왕후와 윤원형 정난정

GoodFortune 2019. 8. 16. 15:57
반응형

문정왕후

1501-1565

 

문정왕후는 고려 중종의 제2계비이다. 명종에 대한 포스팅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이번 포스팅은 문정왕후를 중심으로 적어보겠다.

 

문정왕후는 파산부원군 정평공 윤지임과 전성부부인 이씨의 딸로 파평 윤씨 가문이다. 윤지임은 5남1녀를 두었는데 문정왕후 윤씨는 넷째였다. 윤원로와 윤원형은 오빠라는 설과 남동생이라는 설이 있지만 파평 윤씨 족보에는 동생들로 기록되어 있다. 11살에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났고, 선대에서는 정승과 판서를 지냈지만 윤지임은 벼슬에 못오른채 지냈다.

 

1515년(중종9) 중종비 장경왕후 윤씨가 죽고 폐비 신씨(단경왕후)의 복위 운동이 일단락되면서 새 중전을 물색하던 대비 정현왕후는 문정왕후에게는 12촌 할머니 뻘이었다. 다른 사람보다는 같은 집안에서 왕비가 간택되는 편이 나을 것이라는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의 지지도 있었다. 삼간택 후 1517년(중종11)에 17세로 왕비로 책봉되었다. 장경왕후와 문정왕후는 9촌간으로 문정왕후의 아버지 윤지임과 장경왕후는 8촌간이다. 또한 세조비 정희왕후의 형제의 자손들이다.

 

당시 중종에게는 경빈 박씨, 희빈 홍씨 등의 후궁들과, 장경왕후 윤씨가 낳은 왕자와 경빈 박씨가 낳은 복성군, 희빈 홍씨가 낳은 봉성군 등의 왕자들이 있었다. 새 중전은 장경왕후 윤씨가 낳은 왕자를 보호할 책임을 갖고 입궐했다.

아래는 중종의 가계도이다.

 

중종 가계도

 

경빈 박씨는 중종의 사랑을 독차지 하는 미인이었고, 복성군은 서자였지만 중종의 첫 아들이었다. 경빈 박씨는 복성군을 왕위로 앉히려는 야망을 갖고 있었고, 문정왕후와 대립하게 된다. 경빈 박씨는 보잘것 없는 집안에서 연산군 시절 채홍사의 흥청으로 뽑혀 입궁하였다. 박원종의 눈에 띄어 양녀로 입양되었다가 중종의 후궁이 되었다.

 

희빈 홍씨는 권신 홍경주의 딸이었는데 중종의 총애를 독차지 하기도 했지만 1521년 홍경주가 죽으면서 희빈 홍씨 세력은 몰락했다.

 

 

궁은 경빈 박씨와 그의 아들 복성군 편의 남곤과 심정, 왕세자를 둘러싼 윤임과 김안로, 문정왕후 쪽의 윤원로와 윤원형 세 편으로 나누어져 다툼이 있었다. 문정왕후는 1521년 의혜공주, 1522년 효순공주, 1530년 경현공주 연달아 세 딸을 낳았다.

 

1527년 2월 동궁에 불에 탄 쥐 한마리가 걸려있는 일이 있었는데, 이 일을 문정왕후 편에서 경빈 박씨가 한것으로 몰아갔다. 복성군이 왕위를 잇게 하기 위해 경빈 박씨가 벌인 일로 몰렸고, 경빈 박씨 모자는 쫓겨나게 되었다. 이 사건을 작서의 변 이라고 하는데 이 일로 남곤도 유배되고 사사되었다. 추후에 작서의 변 진범은 김안로의 아들인 김희로 밝혀졌다.

 

조선생존기 윤원형

 

경빈 박씨 세력이 제거되자 윤임 일가의 대윤과 윤원로, 윤원형 형제의 소윤 두 일파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1534년 문정왕후는 왕비가 된지 17년 만에 왕자를 낳았다. 중종의 차남인 경원대군으로, 문정왕후는 자신의 친아들이 세자 자리에 앉기를 바랬다. 아들이 태어나기 전에는 세자 이호를 보호했지만, 아들이 태어나자 세자를 경계하고 독설을 퍼부었다. 그럼에도 인종은 문정왕후에게 효심이 지극하였다 한다.

 

문정왕후가 경원대군을 낳은 후 윤원로와 윤원형은 경원대군을 세자로 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경원대군이 태어난 해에 세자 나이는 20세였기에 가망이 없는 일이었다.

1537년에는 김안로가 문정왕후의 폐출시키려 음모를 꾸미다가 적발되면서 김안로는 유배되어 사사되었다. 김안로가 죽자 세자의 외숙인 윤임은 홀로 윤원형과 윤원로 형제를 상대로 싸워야했다.

 

문정왕후가 동궁에 불을 붙이는 사건도 있었다고 하는데, 세자의 후궁 숙의 정씨가 목격하고 불길 속으로 들어가 구했다고도 한다. 동궁전 화재 사건의 배후가 문정왕후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세자는 오히려 문정왕후를 변호했다고 한다.

 

1544년 중종이 세상을 떠나고, 세자인 인종이 즉위했고 문정왕후는 대비가 되었다. 그리고 인종은 9개월만에 승하하였다. 야사에는 문정왕후가 인종에게 준 떡을 먹고 죽었다는 설도 있다. 역사학자들은 인종이 병약했고, 무리하게 중종의 빈소를 지키다가 승하했다고 보고있다.

 

1545년 인종이 후사 없이 죽자 동생인 경원대군이 왕위로 오르게 되었다. 왕위에 오른 명종이 12살로 어렸기에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윤원형과 윤원로는 1544년 인종 즉위년 윤임과 다투다가 파직되었는데, 문정왕후는 명종이 즉위하자 윤씨 형제를 복귀시켰다. 윤원형은 예조참의로 복직했고 윤원로는 군기감첨정이 되어 복직했다. 이들은 대윤을 밀어내기 위해 중추부지사 정순봉, 병조판서 이기, 호조판서 임백령, 공조판서 허자를 심복으로 하여 음모를 꾸몄다. 윤임이 그의 조카인 봉성군(중종의 서자 8남)에게 왕위를 옮기려 한다고 무고하였다. 또한 인종이 승하할 당시 윤임이 계림군(성종의 서자 3남)을 옹립하려 하였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이러한 음모로 윤임은 조정에서 쫓겨났고 윤원형 형제가 조정을 장악했다. 이렇게 대윤을 몰아내고 소윤이 정권을 차지한 사건을 을사사화 라고 한다.

 

1547년 9월 양재역에 '위로는 여왕, 아래로는 간신 이기가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곧 망할것이다' 라는 벽서가 붙었다. 윤원형 일파는 윤임에 대한 처벌이 미흡해서 생긴것이라 주장하였고, 명종은 윤임의 잔당 세력과 정적들을 제거하였다. 이때 중종의 서자인 희빈 홍씨의 아들 봉성군도 함께 제거되었다. 을사사화의 여파는 6년에 걸쳐 계속되었고, 윤임 등을 찬양하였다는 죄명으로 유배되거나 죽은 자가 거의 1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정미사화로 윤원형과 윤원로의 사이가 멀어졌는데 문정왕후는 윤원형의 손을 들어주었다. 윤원형의 사촌 윤춘년은 윤원로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고, 윤원로는 파직 유배되고 사사되었다.

 

문정왕후는 불교의 중흥에 힘을 썼다. 불교의 양종과 선과를 설치하고 승려 보우를 가까이 하였다. 문정왕후의 숭불 정책은 갈수록 심해졌고, 승과를 부활시키고 승려 보우에게 병조판서직을 제수시키기도 했다. 보우의 병조판서 임명은 많은 대신들의 불만을 가져왔다. 윤원형의 첩인 정난정을 아꼈는데 정난정의 소개로 보우 또한 알게 되었다. 문정왕후의 불교 중흥책에 유교 사상가들의 반발이 극심했는데, 아무도 그녀를 통제할 수 없었다. 문정왕후의 월권행위는 계속되었고, 여왕으로 불릴만큼 왕권을 마음대로 휘둘렀다. 명종이 장성한 후에도 수렴청정을 계속했고 명종이 28세가 되는 1563년까지 섭정을 계속 했다. 명종이 자신의 청을 들어주지 않으면 왕에게 매일을 하거나 독설을 쏟기도 했다.

 

조선생존기 임꺽정

 

민심이 흉흉해지며 임꺽정 같은 도적이 나왔다. 임꺽정은 경기도 양주의 백정으로, 정확한 가계는 알려지지 않았다. 소문으로는 그의 아버지가 백정이라 마을 사람에게 천대당했고, 동네 우물물도 먹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임꺽정이 집에서 거리가 있는 불곡산까지 가서 물을 떠다 마셨다고 하는 얘기가 있다. 어떤 이들은 그의 아버지가 지방관의 탐학으로 살해되면서 의적이 되었다고도 한다. 임꺽정은 중종, 명종 시기에 양주 일대와 철원, 황해도 봉산군과 해주부, 구월산일대에서 활동했다. 임꺽정은 고을 관아를 습격하고 관리를 살해하였는데, 관아의 창고를 털어 양곡을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563년 명종의 아들 순회세자가 죽자 명종은 더욱 실의에 빠졌다. 1565년 문정왕후는 병세가 악화되어 누웠고 5월 5일 세상을 떠났다. 백성들은 문정왕후의 사망 소식에 환호했다고 한다. 문정왕후가 죽고 난 후 승려 보우는 요승으로 몰려 귀양갔다가 살해당했고, 불교는 다시 탄압받았다.

 

'조선생존기' 정난정

 

윤원형의 첩인 정난정은 부친 정윤겸과 노비가 된 반가 여성 사이에서 서녀로 태어나 어릴적 기생이 되었다. 윤원형의 부인은 대윤 일파인 김안로의 질녀 김씨였는데, 정난정이 몰아내고 안방 주인이 되었다. 명종8년 문정왕후가 정난정을 적처로 올리라는 전교를 내려 정실이 되었다. 정난정은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어 궁궐을 마음대로 출입하였고 승려 보우를 문정왕후에게 소개시킨 것도 정난정이었다. 성리학자인 사대부들은 정난정에 대한 반감이 극심하였다.

문정왕후가 승하한지 5개월 후 김씨의 계모 강씨가 윤원형과 정난정이 본부인 김씨를 독살하였다며 관아에 고발하였다.  문정왕후의 힘을 잃은 윤원형은 양사의 탄핵을 받아 벼슬을 잃었다. 이후 첩 정난정과 함꼐 자살하였다고 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