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것이힘이다/조선역사

조선 불운의 공주 경혜공주

GoodFortune 2019. 10. 23.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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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혜공주

1436-1474

 

문종 가계도

경혜공주는 조선 5대 임금 문종(재위 1450-1452)과 현덕왕후 사이의 딸이며 단종의 친누이이다. 1436년 경혜공주가 태어났을 당시 문종은 즉위 전이었고 어머니인 현덕왕후 권씨는 세자의 후궁이었다. 현덕왕후는 문종의 세번째 부인으로 첫번째 부인 휘빈 김씨, 순빈 봉씨가 폐출된 후 세자빈이 되었다. 휘빈 김씨는 세자의 사랑을 받기 위해 갖가지 비방을 쓰다가 폐위되었고 순빈 봉씨 또한 세자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고 상상임신을 했다가 유산하였다 거짓말을 한 죄로 폐위되었다. (궁녀와 동침한 이유로 폐위되었다고도 한다.) 세자의 두 부인이 폐위된 후 이미 두 딸을 낳은 권씨가 세자빈으로 승격되면서 경혜공주는 '현주'에서 '군주'로 승격되었다. 그녀의 언니는 태어난 후 얼마 안있어 요절했다.

 

 

 

세자빈 권씨는 1441년 단종을 낳고 하루만에 사망했다. 1450년(세종32) 15세에 참판 정충경의 아들 순의대부 정종과의 혼인하였고 정종은 영양위에 봉해졌다. 세종이 승하한 후 문종이 즉위하였고 경혜공주는 공주로 책봉되었다. 문종이 재위 2년만에 승하하고 남동생 단종이 즉위했다. 단종은 향교동 경혜공주 집을 자주 찾았고 세조가 일으킨 계유정난이 있던날 밤에도 경혜공주의 집에서 자고 있었다.

 

공주의 남자의 경혜공주

 

경혜공주의 남편 정종은 1455년(단종3년) 금성대군 사건에 연루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었다가 경기도 양근으로 옮겨졌다. 공주가 병이 나자 단종은 세조에게 사람을 보내어 정종을 한양으로 불러들이라 일렀다. 한양으로 온 정종은 공주의 병이 낫자 다시 유배되었다. 1456년(세조2) 사육신 사건으로 죄가 가중되어 수원을 거쳐 전라도 광주까지 유배되었고 공주는 정종을 따라 갔다. 경혜공주는 유배지에서 아들 정미수를 낳았으며 정종은 1461년 승려 성탄 등과 결탁해 모반을 꾀했다는 혐의로 거열형을 당했다. 당시 경혜공주는 임신 중이었다.

 

경혜공주는 남편의 죄에 연좌되어 가산이 적몰되고 유배되어 순천의 관비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실록에는 정종이 죽은 후 여승이 되었다고 기록되었다. 야사인 <연려실기술>에서 노비로 끌려간 경혜공주가 "나는 와의 딸이다. 비록 죄가 있어 귀양을 왔지만 수령이 어찌 감히 나에게 관비의 사역을 시킨단 말이나?"라고 당당하게 말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공주의 신분을 유지했다고 하며, 2012년 발견된 경혜공주 사망 전 작성된 재산 상속에 관한 기록인 경혜공주 분재기에서 공주가 노비였다는 이야기가 허구라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경혜공주가 유배지에서 낳은 아들 정미수는 세조비인 정희왕후가 궁궐로 데려와 길렀고 경혜공주는 딸을 출산한 후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다. 당시 정업원에 출가했는데 그 정업원에는 경혜공주의 올케이자 단종비인 정순왕후 송씨가 출가해 있었다. 경혜공주와 정순왕후는 정업원에서 그렇게 다시 만났다.

 

1465년(세조11) 경혜공주가 출가한지 4년 정미수가 10살이 되던 해에 경혜공주는 세조를 찾아갔다. 조선 궁궐에서 왕과 왕세자가 아닌 남자는 10살이 되면 나가야했다. 예종실록에서 '경혜공주가 정미수를 데리고 왕을 알현하니, 왕이 눈물을 흘리면서 나(예종)로 하여금 다시 죄를 되풀이 되지 않게 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경혜공주의 두 자녀는 면천되었고, 자을산군이 성종으로 즉위한 후 정미수는 돈녕부 벼슬을 하였다. 경혜왕후는 자신의 아들이 벼슬에 오른것을 본 후 얼마안되어 38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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