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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카롤루스(카롤링거) 왕조

GoodFortune 2022. 9. 18.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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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카롤루스 왕조는 메로빙거 왕조 다음을 이은 프랑스 왕국 두번째 왕조이다. 751년 피핀 3세가 왕위에 오르며 카롤루스 왕조가 시작되었고 843년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3국으로 분리되었다. 이후에도 카롤루스 왕조가 이어졌으며 987년 카페 왕조가 시작된다.

 

카롤루스 왕조의 시조는 메츠의 아르눌(582~641)과 란덴의 피핀1세(580~640) 이다. 메로빙거 왕조의 클로테르 2세에 대한 헌신으로 피핀 1세는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로, 아르눌은 메츠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이 두사람이 동맹을 맞고 자식들을 결혼시켰다.

 

피핀 1세

아우스트라시아 궁재 카를로만의 아들로 브라반트의 공작이자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였다. 피핀은 메로빙거 왕조의 클로타리우스 2세, 다고베르투스 1세, 시기베르투스 3세의 궁정에서 궁재로 왕들을 도왔고, 기독교를 전파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피핀 2세

630~714 재위 687~714

 

프랑크 왕국 궁정 행정관 피핀 1세의 딸 베가와 아르눌프의 아들 안세기셀의 장남이다.

662년(혹은 669년) 아버지 안세기셀이 아우스트라시아의 귀족에게 암살당하자 그 귀족을 살해하여 복수하였다. 모젤 지역의 딸 플렉트루데와 결혼하여 아들 드로고, 그리모알트 2세를 낳았으며 두번째 부인 알파이스로부터 카롤루스 마르텔루스와 힐데브란트를 낳았다.

679년 다고베르투스 2세가 암살당한 후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고, 687년 네우스트리아의 왕 테우데리쿠스 3세와 궁재 에브로인과 정쟁을 하여 네우스트리아, 부르군트의 궁재까지 겸했다.

아우스트라시아, 네우스트리아, 부르군트의 궁재 자리에서 프랑크 왕국 전체의 실권을 장악하고 '프랑크의 왕자이자 공작'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카롤링거 왕조 시조 피핀 1세와 아르놀프, 초대 국왕 피핀 3세

 

카롤루스 마르텔루스 (샤를 마르텔, 카를 마르텔)

아우스트라시아 궁재 재위 715~741

프랑크인의 왕 권한대행 재위 737~741

 

피핀 2세와 알파이다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이다. 어머니 알파이다는 노예 출신 여성이라고 알려져있다.

이 때문에 카를루스 마르텔루스를 피핀의 정당한 계승자로 인정하지 않기도 한다.

그는 아버지 피핀2세가 죽은 뒤, 궁재직 계승권에 반발하여 쿠데타를 일이켜 궁재 자리에 올랐다.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로 아우스트라시아, 네우스트리아, 부르군트 3개로 나뉜 프랑크 왕국 전체를 지배했다. 킬리페쿠스 2세(718~721), 테우데리쿠스 4세(721~737)의 메로빙거 왕조의 왕들이 왕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실권은 카롤루스 마르텔루스에 있었다. 737년부터는 공석이던 프랑크 왕국을 대신하여 왕국을 통치하기도 했다.

사망 후 프랑크 왕국의 궁재직은 카를로만 1세와 피핀 3세가 나누어 차지했다. 

카롤루스 마르텔루스는 왕들을 축출하지 않고 프랑크의 공작이라는 직함으로 활동하였는데, 이슬람 군대를 격퇴하면서 교황청에서 왕위를 제의하였으나 거절하기도 하였다.

훗날 로마 교회는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는데 공이 컸던 카를루스 마르텔의 아들 피핀 3세의 왕위를 승인하게 된다.

 

피핀 3세 - 카롤루스 1세 - 루도비쿠스 1세

 

피핀 3세

프랑크 왕국 왕 재위 751~768

카롤루스 마르텔루스와 로트루드 드 트레베의 차남으로 프랑크 왕국의 왕위 된 첫번째 카롤루스 왕가의 사람이다.

카롤루스 마르텔루스는 사망 후 장남 카를로만 1세는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를 차남 피핀 3세는 네우스트리아의 궁재 자리를 차지했다. 747년 카를루스 1세가 모든 지위에서 물러나 수도원으로 은퇴하였는데 피핀 3세와의 권력투쟁에서 패하고 반강제적으로 은퇴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아들 드로고 2세가 궁재 자리를 이어받았으나 피핀 3세에 의해 강제 퇴진당하고 수도원에 들어갔다.

레온의 백작 하리베르트의 딸 '랑의 베르트라다'와 결혼하였다. 그녀의 할머니는 테우데리쿠스 3세의 딸로 메로빙거 왕조의 혈동이었고, 테우데리쿠스 3세의 아내 클로틸드는 피핀 2세의 누이가 된다. 피핀 2세가 베르트라다와 결혼하기 전 '레우트베르가'라는 여성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다고 하여 반대파들은 훗날 베르트라다에 낳은 카를로만 2세와 샤를마뉴를 사생아로 규정하였다.

그가 궁재로 있는 시기 프랑크 왕국의 왕은 킬데리쿠스 3세였는데, 피핀은 궁재의 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왕위를 노렸다. 피핀은 교황 자카리아에게 사신을 보내 프랑크 왕국의 실권이 없는 명목상의 국왕 문제에 대해 물었고 750년 초 교황에게 대표단을 보내 자신을 국왕으로 승인해줄 것을 요청했다. 교황 자카리아가 승인하게 되며 킬데리쿠스 3세는 폐위당해 수도원으로 보내지고 피핀은 프랑크 왕국 국왕으로 즉위한다.

왕위 오른 피핀 3세는 기독교 선교 정책을 적극 지지하며 교황과의 유대를 공고히 하였다.

 

 

카롤루스 1세 (샤를마뉴)

742~814

프랑크인의 왕 768~814

로마인의 황제 재위 800~814 (신성 로마 제국 시조)

제 2대 프랑크 국왕이자 초대 신성 로마 황제로 카롤루스 대제로 불린다. 

피핀 3세와 베르타라다의 장남으로 정식 결혼하기 전에 태어난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이 때문에 반대파들은 카롤루스를 사생아라며 공격하기도 했다. 

아버지 피핀 3세 사망 후 동생 카를로마누스 1세와 함께 왕국을 통치했다. 동생인 카를로만과 카롤루스는 서로 본인이 아버지의 후계자라고 주장하며 다툼이 있었다. 둘 사이에 전쟁의 위기가 닥쳤으나 카를로마누스 1세의 죽음으로 고비를 넘기게 된다.

카롤루스 서부, 중부유럽 대부분을 차지해 프랑크 왕국을 확장했으며 이탈리아를 정복하여 800년 12월 교황 레오 3세에게 롱로마 황제와 대비되는 서로마 황제직을 수여받았다. 그는 황제가 된 후 예술, 종교, 문화를 크게 발전시켜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일으켰다.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로마 제국에서는 샤를 1세 (혹은 카를 1세) 로 알려져있다.

카롤루스의 첫 부인은 데시데라카였는데 아들 피핀 4세가 곱사등이라는 이유로 이혼을 당하였고 피핀 4세는 사생아로 격하되었다. 피핀 4세는 이에 불만을 품고 792년 아버니를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고 수도원에 유폐당했다.

카롤루스는 말년에 제국을 분할해 아들들에게 나누어줄 계획을 세웠지만, 차남 피핀 카를로만, 3남 소 샤를, 장남 피핀 4세가 연이어 사망하여 막내아들 루도비쿠스 1세(루이 1세)를 후계자로 선언한 후 공동황제로 대관식을 올렸다.

카롤루스가 죽은 후 프랑크 왕국은 급속히 쇠퇴했다. 남쪽으로 이슬람, 북쪽으로 바이킹족 동쪽으로는 마자르족의 침공이 잦았다.

 

 

카를로마누스 1세 (카를로만)

751~771 재위 768~771

 

피핀 3세의 둘째 아들이자 카롤루스의 동생이다. 아버지 피핀 3세가 사망한 후 부르군트와 네우스트리아, 아키텐, 알레만니아를 상속받았다. 형 카롤루스와 갈등하여 어머니 베르트라다가 나서 중재했지만 실패하였고, 771년 급사했다. 카를로만이 죽자 부인 게르베르가는 어린 아들 대신 자신을 왕으로 선언하고 영토를 통치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자녀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도주하던 중 카롤루스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카롤루스 왕조 가계도 (주요 인물만 정리됨)

 

루도비쿠스 1세 (루이 1세, 루트비히 1세)

778~840

프랑크의 왕 재위 814~840

아키텐 국왕 781~814

서로마 제국 황제 813~840

카롤루스 1세의 6번째 아들(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났을 당시 이복형 피핀 4세와 친형 피피노, 샤를 등이 있었으나, 형들이 모두 사망하게 되며 분할없이 모든 제국을 상속받았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세 아들 로타리우스 1세, 피핀, 루도비쿠스 2세에게 영지를 상속하고 사후 상속권을 발표했다. 죽은 형 피피노 카를로만의 아들 베른하르트 1세가 이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루도비쿠스 1세는 부인 에르망가르드가 죽자 바이에른의 유디트와 결혼하였는데 그녀에게서 막내아들 샤를(대머리 샤를)이 태어났다. 루도비쿠스 1세는 이미 상속령을 내려 아들에게 분할된 영토의 일부를 떼어 샤를 2세에게 상속하려 했는데, 세 아들은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두번의 반란에서 실패하고 843년 3차 반란 때 루도비쿠스는 폐위당하고 수도원에 감금되었다가 교황의 지지로 제위에 복귀했다. 이후 막내 아들 샤를 2세에게 많은 영토를 상속하였는데, 838년 차남 피핀이 죽자 상속지의 대부분을 또 다시 샤를 2세에게 상속하였다. 3남 루도비쿠스 2세는 이에 반란을 일으켰는데 840년 루도비쿠스가 사망하며 반란은 더욱 심화되었다. 

 

로타리우스 1세

795~855 재위 840~855

루도비쿠스 1세와 에르망가르트의 장남으로 그의 이름은 프랑크족 이름인 클로타리우스(클로타르)의 변형된 형태이다. 로타르라고도 부른다.

817년 후계자로 내정 받고 공동황제가 되었고 822년 총독으로 파견나간 이탈리아의 왕이 되었다.

821년 투르의 백작 위그의 딸 이르멘가르트와 결혼하였다. 아버지 사망 후 프랑크 왕국 국왕와 로마 황제 자리에 올라 단독으로 통치하려 하였는데 이에 루도비쿠스 2세와 샤를 2세는 반란을 일으켰다. 843년 베르됭 조약을 맺으며 북해에서 이탈리아 반도까지 로타리우스 1세가 가지고, 서부는 샤를 2세, 동부는 루도비쿠스 2세(게르마니쿠스)가 가지게 되어 프랑크 왕국은 3개로 분열되었다. 이듬해 844년 아들 루도비쿠스 2세(이우니오르)에게 이탈리아의 왕위를 넘겼다.

855년 두 아들 로타리우스 2세와 프로방스의 샤를에게 왕국을 분할하여 상속하였다. 로타리우스 2세는 프리슬란트와 로트링겐, 샤를에게는 프로방스와 부르고뉴, 리옹을 넘겼다. 

빨강색 - 샤를 2세, 보라색 -로타리우스 1세, 초록색 - 루도비쿠스

 

 

루도비쿠스 2세 게르마니쿠스 (루트비히 2세, 독일왕)

802~876 재위 843~876

루도비쿠스 1세 피우스의 3남으로 817년부터 바이에른의 왕이었으며 843년 베르됭 조약부터 동프랑크의 왕이었다. 동프랑크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기원으로 루도비쿠스 2세를 초대 군주로 본다. 게르마니쿠스는 독일왕으로 번역될 수 있다 (조카 또한 루도비쿠스 2세인데 그는 이탈리아왕으로 구분한다.)

827년 바이에른 공작의 딸 아르톨프의 엠마와 결혼하여 3남 4녀를 두었는데 딸 이르멘가르트는 조카 루도비쿠스 2세와 결혼하였다.

855년 형 로타리우스 1세가 죽자 영토가 아들들에게 분배되었는데, 이복동생 샤를 2세가 차남 로타리우스 2세의 영토를 차지하려 하자 나서서 막아주었다. 훗날 로타리우스 2세가 적장자 없이 죽자 루도비쿠스 2세와 샤를 2세는 그의 영토 로트링겐을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아들 위그가 나타나자, 샤를과 루도비쿠스는 그를 사생아로 정하고 (로타리우스 2세와 발트라다의 결혼을 무효화함) 로트링겐에서 추방했다.

861년부터 영토 분할을 계획했으나 아들들이 상속령에 연이어 반란을 일으켰다. 864년 아들 카를로만 3세에게 바이에른 왕국을 넘겨줄 것을 강요당하였고, 세 아들에게 영토를 나누어주게 된다. 카를로만 3세에게 바이에른, 소 루트비히에게 작센, 프랑켄, 튀링겐을 주었으며 뚱보 샤를 3세에게 슈바벤과 라이티아를 주었다. 이후에도 아들들은 873년까지 계속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870년 메르센 조약에서 서프랑크의 카롤루스 칼부스와 로트링겐을 분할하여 독일과 오스트리아 영역을 확정했다.

875년 조카이자 사위였던 루도비쿠스 2세(이탈리아왕)가 루도비쿠스 2세(독일왕)의 장남 카를로만 3세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고 사망하였는데, 루도비쿠스 2세(독일왕)의 이복동생 샤를 2세가 이를 알고, 신성로마제국의 요한네스 8세 교황의 지지를 받아 제관을 차지하였다. 루도비쿠스 2세(독일왕) 3남 샤를을 이탈리아로 보네 카를로만의 추대 협상을 지원하고 2남 루트비히를 통해 샤를 2세와 담판하여 프랑켄과 작센에서 군대 소집권을 주기로 하고 전쟁을 종결하게 된다.샤를 2세가 서로마 제국 제관을 차지하자 제지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던 중 급사했다.

 

카롤루스 2세 칼부스 (대머리 샤를 2세)

로마인의 황제 재위 875~877

이탈리아 국왕 재위 875~877

서프랑크인의 왕 재위 843~877

루도비쿠스 1세와 두번째 부인인 유디트 사이의 아들이다. 늦둥이로 태어난 카롤루스로 인해 루도비쿠스는 이미 세 아들에게 내린 상속령을 재분할하겠다고 하여 분란이 있었다. 

843년 베르됭 조약에서 네우스트리아, 프랑스 등 프랑크의 서쪽 땅을 자치하였다. 지금의 프랑스 지역의 왕위에 오르며 근대적 국가 프랑스의 첫 군주로 간주된다. 실제 대머가 아니라 태어났을 때 영토를 분배받지 못해 영토가 없다는 뜻이 와전되어 대머리 라는 별명이 붙었다.

오를레앙의 이르멘가르트와 결혼하여 네 아들을 두었다. (카를로스 샤를 3세, 샤를로망, 루도비쿠스 2세, 로타르) 카를로스는 838년 이복삼촌 피핀이 죽은 후 아버지 샤를 2세가 아키텐의 왕위를 주장하여 853년 아키텐의 왕위에 올렸다. 그러나 아키텐의 귀족들은 서프랑크로부터 독립을 원하였고 피핀 2세를 왕으로 추대하며 지지하였기에 카를로스는 실권이 전혀 없는 이름만 왕이었다. 후계자 없이 사망하였고 아키텐은 루도비쿠스 2세가 차지하게 된다.

* 카를로스 파르불루스 샤를 3세 샤를 소년왕은 루도비쿠스 2세의 아들 샤를 3세와 다른 인물. 루이 2세(말더듬이) 아들 샤를 3세와도 다른 인물로 헷갈리지 말자.

샤를로망은 일찍이 수도원에 보내졌는데 이유는 알려져있지 않다. 성직자였지만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샤를 3세가 아키텐의 왕위에 오르자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반란에 실패하며 감옥에 투옥되기도 했다. 아버지 샤를 2세에 반하여 여러번 저항운동을 했고 감옥이 갖혔는데 마지막엔 동프랑크 왕국으로 가 루도비쿠스 2세(독일왕)의 보호를 받으며 살았다. 막내 아들 로타르는 절름발이로 신체적 장애를 갖고 태어났다고 한다. 일찍 수도사로 보내져 수도원 원장을 지내며 살다 866년 사망했다.

샤를 2세는 동프랑크 왕국의 영토를 노리며 이복 형제인 루도비쿠스 2세(독일왕)과 그의 아들들과 여러 차례 맞섰다.

 

카롤루스 왕조 (주요인물만 표기함) *노란색은 이탈리아 독일왕이다.

루도비쿠스 2세 발부스 (말더듬이왕 루이 2세)

서프랑크인의 왕 877~879

아키텐의 왕 866~877

카롤루스 2세 칼부스(샤를 2세)와 이르멘가르트의 아들로 856년 네우스트라의 왕위에 올랐고, 866년 아키텐의 왕위에 올랐다. 그의 형제들은 모두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하며 샤를 2세의 유일한 후계자가 되었다.

브르타뉴 백작 에리스포에의 딸과 약혼하였으나 일가가 바이킹 족에 살해되며 약혼이 깨졌고, 862년 부르고뉴의 안스가르데와 결혼했다. 아버지 카롤루스 2세는 안스가르데의 집안 지위가 낮다며 결혼을 반대하여 비밀리에 결혼했다고 한다. 2남 3녀를 모두 비밀리에 양육하였는데 875년 카롤루스 2세에게 발각되며 이혼당하였다. 당시 안스가르데의 아들 루도비쿠스 3세와 카를로마누스 2세 등 그녀의 아이들은 아키텐에서 내쳐졌다. 이후 카롤루스 2세는 파리의 아델하이드와 재혼을 하여 아들 샤를을 낳았고 훗날 샤를 3세가 된다.

866년 형 샤를 3세가 사고로 죽자 아키텐의 왕으로 임명되었다. 875년 아버지 샤를 2세가 신성 로마 황제가 되어 서프랑크와 이탈리아를 오가는 2년간 섭정을 맡았다. 876년 동프랑크으로 망명한 형 샤를로망이 죽고 877년 아버지 샤를 2세가 사망하며 루도비쿠스 2세는 유일한 후계자로 서프랑크의 왕위에 올랐다. 그는 왕위에 오르면서교황 요한네스 8세를 설득하여 안스가르데와의 이혼을 무효화시키고 내쳐진 두 아들을 정식 왕자로 공인받았다.

왕위에 오른지 2년만에 갑작스럽게 사망하며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키도 했다. 루도비쿠스 2세는 어린 두 아들 루도비쿠스 3세(루이 3세)와 카를로마누스 2세(샤를로망 2세)가 공동으로 즉위하였다. (프로방스와 부르군트에서는 유력 귀족인 보소 5세가 왕위에 오른다.)

 

루도비쿠스 3세 (루이 3세)

서프랑크인의 왕 재위 879~882

루도비쿠스 2세와 안스가르데의 장남으로 879년 아버지 사망후 카를로마누스 2세와 서프랑크 왕국의 공동왕으로 올랐다. 880년 영토를 분할하여 루도비쿠스 3세는 네우스트리아와 일드프랑스 지역을 차지하게 된다. 바이킹족을 격퇴하고 카를로마누스 2세와 함께 프로방스 보소 5세를 공격하였다.

882년 재위 3년만에 사망하게 되는데 게르몽 후작의 딸을 연모하여 그를 뒤쫓다 낙마사고로 사망했다. 사후 동생 카를로마누스 2세가 단독으로 왕의 자리를 지켰다.

 

카를로마누스 2세 (샤를로망 3세)

서프랑크의 왕 재위 879~884

루도비쿠스 2세와 안스가르데의 차남으로 879년 아버지 사망후 형 루도비쿠스 3세와 함께 서프랑크 왕국의 공동왕으로 올랐다. 루도비쿠스 3세의 친동생이며 카롤루스 3세 심플렉스는 이복동생이다.

형 루도비쿠스 3세와 카를로마누스 2세는 아버지가 왕위에 오른 후 어머니 안스가르데와의 이혼을 무효화하며 정식 왕자로 공인을 받게 되었다. 아버지 사망 후 동프랑크 왕국의 루도비쿠스 3세 청년왕(독일왕, 이름이 같아 주의..)이 쳐들어왔으나 두 형제가 함께 격퇴하였다. 880년 영토 분할시 로트링겐을 형과 공동으로 물려받으나, 동프랑크 루도비쿠스 3세(루트비히 3세)가 870년의 메르센 조약은 불법이라며 로트링겐을 요구하게 되며 독일 루도비쿠스 3세(루트비히 3세)에게 넘기게 된다.

즉위 후 어머니 안스가르데는 루도비쿠스 2세의 계비 아델라이드가 간통했다고 비난하였고, 임신중이던 아델라이드는 궁에서 쫓겨났다.

884년 사냥 중 사고로 인해 부상당하여 수일 후 사망했다. 카롤루스 라는 서자가 있었지만 적자는 없었다. 이복동생 샤를은 나이가 어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롤루스 3세 크라수스(독일왕 루도비쿠스 2세의 아들)에게 넘어가게 되면서 카롤루스가 잠시 (884~887년) 통일되게 된다.

 

카롤루스 왕조 (주요인물만 기록함)

카롤루스 3세 크라수스 (샤를 3세 비만왕)

로마 황제 재위 881~887

서프랑크의 왕 재위 884~887

이탈리아왕 880~887

루도비쿠스 2세(독일왕)과 바이에른의 엠므의 3남으로 독일어 카를, 프랑스어 샤를로 불린다. 비만이었기에 비만왕 샤를 3세, 뚱보 샤를이라는 별명이 있다. (서프랑크의 샤를 3세는 샤를 2세의 아들이다.)

862년 슈바벤의 리첼다와 결혼하였으나 적자는 없었고 사생아만 몇명 있었다. 서자 알레만의 카를만은 일찍 사망하고, 다른 서자 베른하르트를 후계자로 삼으려 했지만 실패하였다.

아버지가 세 아들 (카를로만, 루도비쿠스 3세, 샤를 3세)에게 땅을 분할해 줄때 알레만니아, 슈바벤, 라이티아를 받았다. 훗날형 카를로만에게서 이탈리아와 바이에른을 받고, 둘째형 루도비쿠스 3세가 후계없이 사망하며 작센과 슈바벤을 물려받아 동프랑크 왕국을 재통일하였다. 884년에는 서프랑크 왕 샤를로망 2세가 후계없이 사망하자 서프랑크 국왕까지 겸하게 되면서 프랑크 왕국을 잠시나마 재통일하게 되었다.

서자 베른하르트의 후계자 임명은 실패하였고 외드와 베렝가르가 각각 서프랑크와 이탈리아를 차지하게 되었다.

 

오도 1세 (외드)

재위 888~898

루도비쿠스 1세 의 딸 아델라이드로 모계로 카롤링거 왕조의 후손이며, 아버지 로베르 르 포르는 프랑스 귀족 가문원으로 태어나 앙주 백작, 오세르 백작, 느베르 백작이었다. 로베르는 훗날 카페 왕조의 선조가 된다. (위그 카페의 증조부이다)

887년 비만왕 샤를 3세에게 투르네의 영지를 받고, 서프랑크 왕국의 섭정에 임명되었다가 샤를 3세 사망 후 국왕으로 추대된다. 

적자가 없이 사망하여 파리 백작위는 동생 로베르 1세에게 주었다.

893년 샤를 3세 생쁠이 자신이 선왕(루이 2세)의 아들임을 주장하며 왕위를 요구하였고 동프랑크의 왕인 아르눌프가 일단 승인하였다. 당시 샤를 3세 생쁠이 13세로 어렸기에 아르놀프는 샤를 3세와 오도 1세를 보름스로 소환하였는데, 두 차례에 걸쳐 샤를 3세가 거부하자 아르눌프는 외드를 지지하게 된다. (왕위는 오도 1세와 샤를 3세가 대립하는 상황으로 5년간 이어졌다.) 897년 왕위를 포기했던 샤를 3세는 898년 외드가 후계자로 지목하여 서프랑크 왕위에 올랐다.

피핀 카를로만의 서자 베른하르트의 후손 테오드라트와 결혼하였으나 딸만 두어 후계자가 없었다.

 

 

샤를 3세 (카롤루스 3세 심플렉스, 단순왕)

879~929  재위 898~922

루도비쿠스 2세 발부스 (말더듬이 루이 2세)와 계비 아멜라이드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는 사망하였다. 이복형 카를로마누스 2세가 사망했을 당시 5세로 어렸기에 왕위에서 밀려났고, 삼촌 샤를 3세가 사망했을 떄에도 어렸기에 왕위에서 밀려났다. 893년 오도 1세가 왕위에 있을 때 랭스 대주교 풀크 등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 이후 외드와 5년간 왕위로 대립하게 된다. 계속된 내란으로 897년 왕위를 포기했다가 외드가 죽으면서 후계자로 왕위에 올랐다.

당시 외드의 동생 로베르는 바이킹과의 교전에서 여러번 승리하여 막강한 영향력이 있었다. 

907년 프레데누나와 결혼했으나 딸만 6명 낳고 사망하였고, 919년 잉글랜드 알프레드 대왕의 딸 에드지푸와 재혼하였다.

샤를은 로트링겐의 업무와 고문관들에게만 신경을 쓰고 네우스트리아의 귀족을 소외시켜 920년 서프랑크 귀족들은 샤를의 퇴위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922년 네우스트리아 귀족들이 파리에서 반란을 일으켜 외드의 동생 로베르 1세를 왕위에 올렸다. 샤를은 로트링겐으로 피신하였는데, 로베르 1세는 즉위 후 군사들을 이끌고 로트링겐과 전쟁을 을으켰다. 샤를은 서프랑크로 되돌아와 로베르 1세와 싸웠으나 수아송전투(923년)에서 패배하였으나 자객을 보내 로베르 1세를 죽였다. 

왕위는 로베르의 사위 부르고뉴의 라울이 올랐고, 샤를 3세의 아내 에드지푸와 아들 루이 4세를 데리고 잉글랜드로 갔다.

샤를은 4년간 테오도리히 성에 감금되었다가 페로네 성의 감옥에 유폐되었다가 929년 감옥에서 굶어 죽었다.

 

로베르 1세

재위 922~923

느스트리 백작 로베르 르 포르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트비히 1세(루도비쿠스 1세)의 딸 아델라이드의 아들이다. 

서프랑크 왕국을 침략하던 바이킹을 격퇴하며 명성을 얻었다. 898년 형 외드(오도 1세)가 사망했을 때 샤를 3세가 왕위에 올랐고, 이후 바이킹을 여러번 격퇴하면서 영향력을 키워갔다.

890년 베르망두아 백작 헤르베르트 1세의 딸 베아트릭스와 결혼하였는데 카롤루스 1세 마그누스(샤를마뉴) 의 후손이다. 두번째 결혼에서 위그 르 그랑을 낳았다.

922년 왕으로 추대되었고 샤를 3세와 싸우던 중 수아송전투에서 샤를 3세가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되었다. 로베르 1세의 아들 위그 르 그랑은 왕위 계승권을 요구하지 않았고 사위인 라울(라둘푸스 1세)이 서프랑크 왕위에 올랐다. (위그 르 그랑의 손자가 위그 카페가 카페 왕조를 세운다)

 

라울푸스 1세

재위 923~936

로베르 1세의 사위로 서프랑크의 왕위에 오른 라울은 리처드 정의공 브르고뉴 공작의 아들이다.

아버지 리처드 정의공으로부터 부르고뉴의 공작의 지위를 물려받고 로베르 1세의 딸 엠마와 결혼하였다. 프로방스 보소의 조카손자였던 라울은 장인과 함께 샤를 3세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켜 샤를 3세를 쫓아내고 로베르 1세를 왕위에 올렸다. 소아송전투에서 장인 로베르가 죽자 네우스트리아의 귀족들에 의해 서프랑크 왕위에 올랐다.

로타링기아를 병합하려는 독일왕 하인리히 1세와 맞써 싸웠으나 925년 로타링기아는 독일에게 빼앗겼다.

부인 엠마에게서 루이라는 아들과 유디트라는 딸이 있었으나 행방이 알려져 있지 않다. 헤르베르트 2세를 공격하여 935년 항복을 받아내었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병에 걸려죽었는데 카롤루스 왕가 지지파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루이 4세

재위 936~954

샤를 3세 단순왕의 아들로 아버지가 귀족들에 의해 폐위되자 어머니 에드지푸와 함께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936년 라울푸스 1세가 사망하자 서프랑크 귀족들에 의해 추대되어 왕위에 올랐다. 프랑크 공작 위그 르 그랑과 갈등하며 보내었는데 서프랑크 왕국의 실권은 이미 위그 가문에게로 넘어갔다. 위그 르 그랑은 동프랑크 국왕 오토 1세와 동맹을 맺고 샤를 3세와 대항하였다.

루이 4세는 아버지 샤를 3세가 통치하던 로타링기아를 회복하길 원하였고 동프랑크 왕국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는데, 루이 4세가 군사를 이끌고 로타링기아로 가게 되면서 오토 1세와 영토 분쟁을 하게 된다. 오토 1세는 위그 백작에게 군대를 제공하여 랭스를 침략하도록 하였고 941년 루이의 군대는 대패하였다. 루이 4세는 로타링기아의 영유권 주장을 포기하고 평화조약을 맺는다. 이후 독일의 하인리히 1세의 딸인 게르베르가(오토 1세의 여동생)와 정략결혼을 하게 된다.

945년 노르망디를 공격하다가 군사들에게 잡혀 포로가 된 루이 4세는 위그 르 그랑에게 넘겨져 파리 감옥에 투옥당했다. 아내 게르베르가를 통해 오토 1세에게 도움을 청해 풀려났다. 자신의 영토를 되찾은 루이 4세와 위그 르 그랑은 계속해서 갈등하다가 950년 오토 1세의 중재로 화해하게 된다. 954년 낙마 사고로 갑자기 사망하며 왕위는 아들 로테르에게로 갔다.

 

로타리우스 (로테르 2세)

재위 954~986

동프랑크의 왕 루이 4세와 독일 하인리히 1세의 딸 게르베르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954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13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게 되며, 파리 백작 공작 위그가 섭정이 되었다. 귀족들은 위그를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으나 어머니 게르베르가가 독일 친정에 연락하여 오토 1세, 쾰른의 대주교 브루노 등의 개입하에 로테르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서프랑크 귀족들은 로테르에게 위협적이었기에, 로타르는 외삼촉 쾰른 대주교 브루노 3세에게 도움을 청하여 후견인을 맡았다.

955년 위그와 로테르는 푸아티에를 손에 넣었으나 위그는 곧 사망하였다. 이탈리아 왕 로타르 3세와 아델라이드의 딸 엠마와 결혼하여 아들 루이 5세를 낳았다. 

965년 후견인 퀼른 대주교 브루노가 죽고, 969년 어머니 게르베르가가 사망하자 로테르는 독일 침공 계획을 수립한다. 978년 위그 백작 아들 위그 카페와 함께 독일을 침공했으나 서로 승패를 나누다 오토 2세가 파리를 침공하여 동생 샤를을 프랑크의 왕으로 선언하였다. 위그 카페의 군사력으로 복위하였다. 

986년 병으로 사망하였고 왕위는 아들 루이 5세가 이었다.

 

루이 5세

재위 986~987

로테르 2세와 이탈리아의 왕 로타르 3세의 딸 엠마의 아들로 태어났다. 969년 아키텐의 윌렘 3세의 딸 아들라이드와 결혼하여 아키텐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아들라이드가 2년 후 아를로 도망가버렸다. 980년 앙주의 백작 풀크 3세의 딸 아들라이드와 다시 결혼하였으나 4년만에 이혼하였다.

986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왕위에 올랐다. 랭스의 대주교 아달베롱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오토 3세와 동맹을 맺으라 하였으나 루이는 듣지 않았다. 이듬해 승마를 하다 낙마 사고로 사망하였다.

후계자가 없었고 동생 외드는 986년 사망하였다. 서자 아르눌프가 있었으나귀족들은 위그 카페를 왕으로 선출하였다.

루이 5세를 마지막으로 카롤루스 왕조는 끝이났고, 카페 왕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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