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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발루아 왕조 가계도

GoodFortune 2022. 9. 21.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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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카페 왕조를 이은 발루아 왕조는 8명의 왕이 자리를 지켰으며

이후 프랑수아 1세를 시작으로 발루아-앙굴렘 왕조가 시작된다.

 

카페 왕조의 마지막 왕인 샤를 4세는 아들이 없었기에 후계가 문제가 되었다. 

이전 포스팅의 카페 왕조 가계도를 참고해보자.

필리프 3세 - 필리프 4세 - 루이 10세 - 필리프 5세 - 샤를 4세에서 카페 왕조의 후계가 끊어졌다. 당시 후보는 3명이 있었다. 필리프 4세의 동생 샤를 드 발루아의 아들 필리프 드 발루아, 샤를 4세의 누나 이자벨의 아들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 필리프 4세의 동생 루이 데브뢰의 아들이자 루이 10세의 사위인 필리페.

 

제후, 승려들의 회의를 통해 선택된 자는 필리프 드 발루아였다. 필리프 6세로서 왕위에 오르게 되면서 발루아 왕가의 초대 왕이 된다.

필리프 6세 - 장 2세 - 샤를 5세 - 샤를 6세 - 샤를 7세 - 루이 11세 - 샤를 8세 - 루이 12세

 

 

 

필리프 6세

1293~1350 재위 1328~1350

 

필리프 3세의 아들 샤를 드 발루아 백작의 아들이다. 샤를 4세가 남자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필리프 6세가 선택되어 즉위했다. 루이 10세 사망시 살리카법을 근거로 여계계승을 배제했었기 때문에 (루이 10세의 딸 잔 드 나바르는 프랑스 여왕 자리에 오르지 못함) 필리프가 즉위하게 되었다. 샤를 4세는 프랑스와 나바라의 왕이었는데, 나바라 왕국에서는 여계 계승이 인정받으며 루이 10세의 딸 호아나 2세와 그의 남편 필리페 4세가 공동왕위로 오른다.

왕위 후보자 중 한명이었던 에드워드 3세가 필리프의 왕위를 인정하였는데, 5년 후 에드워드와 대립 중인 스코틀랜드 데이비드 2세가 프랑스로 망명하자 필리프가 환대하는 것에 화가 난 에드워드는 프랑스 왕위를 요구했다. 이 일이 1337년 시작된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백년 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1340년 1346년 대패하고 1347년 칼레를 점령당하자 프랑스는 혼란에 빠졌다. 흑사병이 유행하던 시기 1350년 필리프 6세는 사망하였다.

첫번째 부인은 부르고뉴 공 로베르 2세의 딸 잔으로 아들 장 2세를 낳았으며, 두번째 아내는 나바라 여왕 후아나 2세의 딸 수리아 나파로아코 왕녀였다. 

 

장 2세

1319~1364 재위 1350~1364

필리프 6세와 부르고뉴 공작 로베르 2세의 딸 잔 드 부르고뉴 공녀의 아들로 태어났다. 1332년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 얀의 딸 이트카 보헤미아 공주와 결혼하여 샤를, 앙주 공작 루이, 베리공 장, 부르고뉴 공 필리프 등 4남 5녀를 낳았다. 첫 부인 이트카는 장 2세가 왕이 되기 전 사망하였고, 장 2세는 기욤 12세 도베르뉴 백작의 딸 잔 1세 도베르뉴 여백작과 결혼했다.

왕위에 오를 당시 프랑스와 잉글랜드는 백년전쟁을 치루는 중이었다. 1355년 흑태자 에드워드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기옌을 공격하자 아들 샤를과 출전하였으나 대패하고 포로가 되었다. 1360년 브레티니 조약에서 몸값이 300만 크라운으로 책정되었는데 프랑스 국민들에게 부담을 준다는 이유로 잉글랜드에 머물렀다. 런던에서 지내다가 1364년 사망했다.

아들 샤를 5세가 왕위를 이었다. 

 

샤를 5세

1338~1380 재위 1364~1380

 

장 2세와 이트카 보헤미아 공주(본 드 룩셈부르크)의 아들이다. 아버지 장 2세가 백년 전쟁 중 흑태자 에드워드에게 포로로 잡혀가 잉글랜드의 포로가 되면서 왕태자인 샤를 5세가 국정을 맡게 되었다.

샤를 5세는 현재 세금의 기초가 된 정기적인 임시징세를 실시하여 프랑스의 절대왕정 기초를 마련하였고, 잉글랜드에 빼앗긴 노르망디 지역의 영토를 되찾았다. 치세 말에는 잉글랜드에 빼앗긴 영토를 대부분 탈환했다.

1350년 피에르 1세 드부르봉 공작의 딸 잔 드 부르봉 공녀와 결혼하여 샤를 6세,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등 8명의 아이를 낳았다.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의 손자가 훗날 루이 12세로 왕위를 잇는다.)

필리프 4세 시기에 프랑스 아비뇽으로 이주했던 교향청이 1377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에 의해 로마로 돌아갔으나 이듬해 서구교회대분열 사건이 일어났다. 

 

샤를 6세 (친애왕, 광인왕)

1368~1422 재위 1380~1422

샤를 5세와 부르봉의 잔 사이의 아들로 아버지 샤를 5세가 사망하자 12살의 나이로 국왕이 되었다. 숙부 앙주 공작 루이, 베리 공작 장,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와 외삼촌 부르봉 공작 루이 2세 등이 왕의 권한을 가졌는데, 앙주 공작 루이가 섭정을 맡고 파리와 노르망디 관리는 부르고뉴 공작과 부르봉 공작이 맡았다. 베리 공작은 랑그도크와 기옌을 차지했다.

샤를 5세 사망 당시 프랑스 남부 지역에는 불만을 가진 세력들이 있었는데 앙주 공작이 세금을 다시 거두려고 하자 여러 지역에서 반란이 발생했다.

1385년 슈테판 3세의 딸 바이에른의 이자보와 결혼하였고, 1388년부터 친정을 시작했다.

몇 년간 국가를 잘 이끌어 나가다가, 1392년 갑자기 정신병이 발생했다. (이후 샤를 6세는 죽을 때까지 국정을 관장할 수 없었다) 샤를 6세의 정신병으로 왕족들이 다시 권력을 차지하게 되며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와 오를레앙 공작 루이1세(샤를 6세 동생) 두개의 파로 나뉘게 된다.

딸 이자벨은 잉글랜드 리처드 2세와 결혼하였는데, 1399년 리처드 2세가 헨리 4세에 의해 왕위를 찬탈당하자 잉글랜드와의 평화가 깨졌다.

1404년 숙부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가 사망하면서 권력 다툼이 시작되었는데, 필리프의 아들 장 1세가 부르고뉴 공작 자리를 맡았으나 오를레앙 공작의 대립으로 권력을 계승받지 못하였다. 부르고뉴 공작과 오를레앙 공작의 다툼이 심해지며 1407년 오를레앙 공작 루이가 파리의 거리에서 살해당하기에 이르렀다. 오를레앙 공작의 아들 샤를이 새 공작이 되어 대립은 계속 되었다. 1411년 부르고뉴 공작은 잉글랜드 국왕 헨리 4세와 동맹을 맺고 그들을 지원했는데 1414년 헨리 5세는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며 전쟁을 일으켰다. 그해 샤를 6세의 아들 기옌 공작 루이가 사망하고, 1417년에는 아들 투렌 공작 장이 사망하면서 퐁티외 공작 샤를(샤를 7세)가 상속자가 된다.

1418년 부르고뉴파에 의해 파리가 함락당하고 1419년 부르고뉴 공작 장 1세가 왕자 샤를 앞에서 살해당했다. 이후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3세, 왕비 이사보, 잉글랜드 헨리 5세는 트루아 조약에 서명을 하며 왕자 샤를 대신 헨리 5세가 프랑스의 왕위계승자가 되고, 북부 프랑스는 잉글랜드 손에 넘어갔다. 헨리 5세는 샤를 6세의 딸 카트린과 결혼함으로서 자신의 프랑스 왕위 계승권에 정당성을 확보했다. 그러나 헨리 5세와 샤를 6세가 잇달아 죽으며 어린 헨리 6세가 잉글랜드와 프랑스 두 나라의 왕위에 올랐고, 프랑스에서는 샤를 7세가 왕위에 올랐다 (따로 즉위식을 거행)

샤를 6세의 딸 카트린은 헨리 5세와 결혼하여 헨리 6세를 낳았고, 헨리 5세가 사망하자 오웬 튜더와 재혼하여 에드먼드 튜더를 낳았다. 에드먼드 튜더의 아들이 헨리 튜더이며 잉글랜드 튜더 가문의 개창자이다.

 

샤를 7세 (승리왕)

1403~1461 재위 1422~1461

샤를 6세와 바이에른의 이자보의 아들인 샤를 7세가 태어날 당시 잉글랜드와 백년전쟁이 계속되던 시기였다. 가장 치열했던 전쟁 시기로 샤를 7세는 쉽게 즉위식을 올리기도 힘들었다. 한 신하로부터 프랑스를 구할 성녀가 왔다고 전해듣는데 그녀가 잔 다르크이다. 잔 다르크는 샤를 7세에게 왕으로 즉위하라는 계시를 성녀 마리에게 받았다는 말을 하고, 샤를 7세는 잔 다르크가 프랑스를 구원해줄 성녀라고 믿게 된다.

오랜 싸움으로 프랑스 사정은 좋지 않았고, 샤를 7세가 있던 오를레앙은 포위되어 있었다. 잔 다르크는 각 지방 영주들에게 구원군을 받아 샤를 7세를 구출해낸다. 잔 다르크가 오를레앙을 재탈환한 후 샤를 7세는 왕위에 정식으로 올랐다.

1413년 앙주의 마리와 약혼하였고, 1422년 결혼을 했다. 샤를 7세는 마리와의 사이에서 14명의 자녀를 두었다.

즉위 후 잔 다르크는 잉글랜드에게 빼앗긴 영토를 가져오기 시작한다.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한 잔 다르크는 잉글랜드가 항복할 때까지 전투를 해야한다고 주장했고 샤를 7세는 평화협정을 원했다. 샤를 7세가 지시하지 않아도 잔 다르크가 적진을 공격하자 둘 사이에 갈등이 심해졌다. 1430년 오를레앙이 잉글랜드군에게 함락하며 잔 다르크는 포로가 되었는데 샤를 7세는 잉글랜드가 요구한 그녀의 몸값이 비싸다며 잔 다르크를 버리게 된다. 잔 다르크는 잉글랜드에서 마녀라는 혐의로 화형 당해 죽었다.

샤를 7세는 1456년 잉글랜드와 평화협정을 맺고 백년전쟁을 종식시킨다. 전쟁으로 많은 피해를 입은 프랑스를 복구하고 왕권 강화에 정력을 다 한 후 1461년 사망했다.

 

루이 11세 (신중왕)

1423~1483 재위 1461~1483 

 

샤를 7세와 앙주의 마리의 아들이다. 1440년 아버지를 상대로 반란이 일어나자 반란에 참여했었으나 아버지로부터 용서를 받았다. 루이는 끊임없이 아버지에게 저항하여 궁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프랑스의 도피네에서 아버지의 의도에 맞서 사보이아 공작 루도비코의 딸 카를로타와 결혼하자, 샤를 7세가 군대를 보내어 루이는 부르고뉴로 달아나야 했다.

1461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왕위에 올랐으며 강력한 왕권을 추구하여 지방 귀족들, 부르고뉴 공국과 자주 대립했다. 루이 11세는 누구도 믿지 않았기에 신중왕이라는 별명이 있다.

1483년 사망하며 아들 샤를 8세가 뒤를 이었다.

 

 

샤를 8세

1470~1496 재위 1483~1498

 

루이 11세와 카를로타 사이의 아들로 하나뿐인 후계자였다.아버지 사망으로 1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1491년까지 누나인 안 드 부주가 국정을 이끌어나갔다. 1491년 브로타뉴 여공작 안과 결혼하였고, 누나의 간섭에서 벗어나 권력을 차지했다. 샤를 8세는 이탈이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였는데, 나폴리 왕국의 앙주 왕가에 대한 권리를 요구하며 전쟁을 일으켰다. 1495년 프랑스군은 나폴리에 입성하였고, 샤를 8세는 나폴리의 왕 카를로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밀라노, 오스트리아, 베네치아, 교황 알렉산데스 6세는 반 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여 프랑스를 격파하게 되며 샤를 8세는 퇴각하였다.

1498년 스포츠 경기(죄드폼)를 보러 가던 중 문틀에 머리를 강하게 부딪히고 의식을 잃은 후 급사하였다. 샤를의 아이들이 모두 어려서 죽었기에 왕위는 발루아 왕주의 방계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에게 넘어가게 된다.

 

 

루이 12세

1462~1515 재위 1498~1515

 

샤를 6세의 동생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의 손자로 샤를 5세의 증손자가 된다. 1465년 아버지의 작위를 물려받아 오를레앙 공작이 되었으며 14살이 되던 해 루이 11세의 딸 잔 드 프랑스와 결혼하였다.

1483년 샤를 8세에게 맞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1488년 패배한 후 감옥이 유폐되었다가 1491년 풀려났다. 1498년 샤를 8세가 후계 없이 사망하자 루이 12세가 프랑스 왕위에 오르게 된다.

루이 12세는 왕위에 오르 다음 해, 잔과 이혼하고 샤를 8세의 미망인 브르타뉴의 안과 결혼하였다. 밀리노를 요구하며 이탈리아 원정을 하여 밀라노를 차지하여 12년간 통치하였고, 나폴리 왕국에 대한 소유권을 요구하여 1501년부터 3년간 나폴리의 군주 자리에 있다가 전쟁으로 빼앗겼다.

루이 12세는 1504년 재정 개혁과 1508년 세금 동결 및 세금 징수 개선 등을 통해 1506년 투르에서 열린 삼부회에서 '국민의 아버지' 라는 칭호를 얻었다.

브르타뉴의 안 사이에서 프랑수아 1세의 왕비가 된 클로드를 포함한 두 딸을 낳았다. 1514년 안 사망 후, 헨리 8세의 여동생 메리 튜더와 세번째 결혼을 하였다. 세번째 결혼 이듬해 사망했다.

아들이 없었고 딸 클로드의 남편 프랑수아가 왕위에 오르며 발루아-앙굴렘 가문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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