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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프랑크 왕국의 초대 왕조 메로비우스(메로빙거) 왕조

GoodFortune 2022. 9. 15.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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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프랑크 왕국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프랑크 왕국의 초대 왕인 클로비스 1세는 메로비우스(메로빙거) 왕조의 창시자이다. 메로베우스라는 이름은 프랑크족 족장 메로베크에서 유래하며 메로베크는 서로마 제국의 군인이었다. 그의 아들 힐데리히 1세 또한 서로메 제국에서 용병대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의 아들이 프랑크 왕국 초대왕인 클로비스 1세이다.

 

클로비스 1세 (클로도베쿠스 1세)

446~511

재위 481~511 (프랑크족 왕) 486~511 (프랑크 왕국 왕)

 

프랑크족의 한 지파인 잘리어 프랑크족 부족장 힐데리히 1세와 튀링겐의 왕녀 바신느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죽자 481년 부족장 자리를 이어받았으며 프랑크족 통합을 시작하였다.

486년 프랑크족을 통일하여 프랑크 왕국을 세우게 된다. 프랑크 왕국은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3국 왕실의 기원이 된다.

클로비스의 아내 클로틸다는 열렬한 로마 교회 신자로 클로비스에게 개종을 권하였고, 클로비스는 508년 랭스에서 부하 3000명과 함께 세례를 받아 개종하였다. 이로 인해 클로비스는 로마 교회와 갈라이 현지인들의 지지를 받게 된다. 클로비스는 꾸준히 군사 원정을 나서 서고트 왕국의 군대를 푸아티 부근 부이예에서 격파하고 알라리크 2세를 살해하였다. 511년 파리에서 사망하며 프랑크 왕국은 살리카 법에 따라 아들들에게 4개로 분할되며 프랑크 왕국은 랭스, 오를레앙, 파리, 수아송으로 나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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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카법?

프랑크 왕국 클로비스 1세 말년에 만들어진 법전으로 게르만족 관습법을 기반으로 하였다. 이 법 중에 '딸은 토지를 상속받을 수 없다'는 것이 있다. 작위는 토지에 붙어 다니므로 딸은 작위를 상속받을 수 없게 된다. 여성의 왕위 계승이나 여계 왕손을 인정하지 않는 제도를 통틀어 가리키는 법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살리카법은 프랑크 왕국의 법률이었기에 다른 유럽 국가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잉글랜드에서는 여성의 왕위 계승이 허용되었기에 많은 여왕들이 왕위에 올랐다.

 

테우데리쿠스 1세(재위 511~533)는 메츠와 랭스 지역을 받아 아우스트라시아의 초대 군주가 되었다. 아버지 사망 후 아들 테우데베르트 1세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548년 테우데베르트 사망 후 그의 아들 테오발트가 있었으나 555년 사망하며 클로타리우스에게 흡수된다.

클로도메리우스 1세(재위 511~558)는 오를레앙 지역을 받았으며 524년 튀링겐 족 정벌 전쟁 중 전사하였다. 그의 영지는 동생 킬데베르투스 1세와 클로타리우스 1세가 나누어 가졌고, 아내 라데군다는 클로타리우스 1세의 첩이 되었다. 세 아들 중 두 아들은 훗날을 염려하여 두 동생들에게 살해되었고 장남 클로도알드만 수도원으로 피신하였다.

킬데베르투스 1세는 파리 지역을 받아 형제들과 함께 튀링겐 족 정벌 전쟁에 함께 하였다가 형 클로도메리우스 1세가 죽자 동생과 함께 그의 영토를 분할해 가졌다. 아들 지게베르트가 먼저 사망하여 그의 영지는 동생 클로타리우스 1세에게 넘어갔다.

클로타리우스 1세는 수아송과 네우스트리아를 받아 수아송의 군주가 되었다. 클로도메리우스 1세가 전사하자 킬데베르투스 1세와 함께 조카들을 살해하고 영토를 나누었다. 555년 테우데리쿠스 1세의 손자 테오발트가 죽고, 558년 힐데베르트 1세와 지게베르트가 죽고 클로타리우스 1세는 프랑크 왕국 전체를 재통일 하게 된다.

 

클로타리우스 1

재위 511~558 (수아송 군주)

재위 558~561 (프랑크 왕국)

프랑크 왕국을 재통합 한 클로타리우스 1세는 통합 3년만에 열병으로 급사하며 다시 네 아들에게 프랑크 왕국을 분할 상속하게 된다. 프랑크 왕국을 재통합했지만 클로비스 1세의 자손들 중 정치적으로 가장 무능했다는 비판이 있다. 6명의 아내를 두었는데 라데군다(원래 형의 아내였다)를 심하게 학대하여 성 레미 주교로부터 제명도 당하였고, 560년 쿤시아의 아들 크롬이 반란을 일으키자 처형하였다. 잔인하고 무자비하여 가족간에도 경쟁의식이 강했다.아들 카리베르투스는 파리, 오를레앙을, 시게베르투스 아우스트라시아, 곤트라누스(군트람)는 부르군드, 킬페리쿠스는 네우스트리아와 수아송을 받았다.

 

카리베르투스 1세 (재위 561~567) 는 아들이 없이 사망하여 사후 영토는 형제 시게베르투스 1세와 킬페리쿠스 1세에 의해 분할되었다.

시게베르투스 1세 (지게베르트 1세, 재위 561~575)는 파리를 분할하는 과정에서 이복동생 킬페리쿠스 1세와 갈등하였다. 킬페리쿠스 1세가 자신의 본처 갈스빈타를 살해하자, 그녀의 자매 브룬힐트의 부탁을 받고 네우스트리아를 공략하여 킬페리쿠스 1세는 패하였다. 그러나 승리 축하연 도중 자객에 의해 암살당했다.

킬페리쿠스 1세 (힐페리히 1세, 재위 561~584) 는 네우스트리아 분국의 왕위에 올랐으나 이복형제들과 영토전쟁을 벌이다 암살되었다.

곤트라누스 1세(군트람, 재위 561~592)는 부르쿤트 왕위에 올랐다. 사후 기독교 성인으로 기성되어 성 군트람으로 불린다.

 

 

킬데베르투스 2세

아우스트라시아 프랑크인의 왕 재위 575~595

부르군트 프랑크인의 왕 재위 592~595

시게베르투스 1세와 브룬힐트의 장남으로 575년 아버지가 암살 당한 후 아우스트라시아의 왕으로 즉위했다. 어머니 브룬힐트가 섭정하였는데 592년 곤트라누스 1세가 후사없이 사망하며 부르군트를 상속받게 된다.

595년 사망 후 아우스트라시아는 테오베르트 2세에게, 브루군트는 테오데리히 2세에게 상속했다.

 

클로타리우스 2세

재위 613.10.10~629.10.29

킬페리쿠스 1세의 서자로 어머니는 프레데군다이다. 아버지 뒤를 이어 네우스트리아의 왕위에 올랐다. 아우스트라시아의 시게베르투스 2세 등이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할 위기도 있었으나 군트람(곤트라누스 1세)의 보호로 무사했다. 613년 브룬힐트의 섭정 통치를 못마땅히 여긴 피핀 1세, 아르눌프 등 아우스트라시아의 유력 귀족과 내통하여 브룬힐트를 처형하고 프랑크 왕국을 재통일 한다. 623년 장남 다고베르투스 1세가 왕위를 이어받으며 메로베우스 왕조의 전성기를 누린다.

 

다고베르투스 1세

재위 629~639

아버지 클로타리우스 2세와 공동국왕으로 내정되었고 629년 프랑크 왕국을 재통일했다. 다고베르투스 사망 후 프랑크 왕국의 권력은 지역 귀족들에 의해 와해되었다.

네우스트리아, 부르군트는 클로도베쿠스 2세, 프랑크 왕국은 킬데리쿠스 2세, 아우스트라시아는 시기베르투스 3세에게 귀속되었다.

 

카리베르투스 2세

아키텐의 왕 재위 629~632

쿨로타리우스 2세의 아들, 다고베르투스 1세의 이복동생으로 아키텐의 왕위에 올랐다. 재위 3년만에 바스크족의 침략 때 암살되었다.

핑크색이 다고베르트 1세의 영토, 초록색이 카리베르투스 2세의 영토

 

클로도베쿠스 2세

재위 639~657

다고베르투스 1세의 아들로 네우스트리아와 부르쿤트의 왕이었다.

 

시기베르투스 3세

638~656

다고베르트 1세의 아들로 아우스트라시아의 왕으로 사후 가톨릭 성인에 추서되었다. 아버지 사망 후 매일 기도하고 가난한 이들의 구제사업과 수도원 건설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였다. 그의 재임 중 12개의 수도원을 세웠다고 한다. 사망 당시 아들이 어려(당시 다고베르투스는 아우스트라시아 궁재 그리모알트가 납치해 수도원으로 비밀리 추방되었고, 그리모알트의 아들이 시기베르투스 양자로 들어가 왕위에 오른다.)  양자로 지목한 킬데베르투스 3세 아돕티부스가 왕위를 이었다.

 

킬데베르투스 3세 아돕티부스

656~657

시기베르투스 3세의 양자가 되어 어린 다고베르트 2세를 제치고 일시적으로 아우스트라시아의 왕위에 올랐다. 아버지는 그리모얄트 1세로 피핀 1세의 손자였다.

 

클로타리우스 3세

네우스트리아,부르군트 재위 658~673

아우스트라시아 왕 재위 657~662

클로도베쿠스 2세의 아들로 아버지를 이어 즉위하였으나 즉위 당시 4살이었다. 노예 출신 어머니 바틸드가 섭정하다가 수녀원에 유폐되면서 궁재들의 세력 다툼에 시달리게 된다. 후사 없이 사망하며 킬데리쿠스 2세가 왕위를 잇는다.

 

킬데리쿠스 2세

아우스트라시아 왕 재위 662~675

클로도베쿠스 2세와 노예 출신 발데힐데스의 아들이다. 배다른 숙부 시기베르투스 3세의 딸인 빌리힐데스와 결혼하여 아우스트라시아의 상속자가 되었다. 즉위 초반에는 장모인 힘네힐데스가 섭정하였다. 아키텐의 공작 에우도 등과 연대하여 피핀 2세 헤르스탈에 대항했으나 실패하고 폐위당하였다. 아들 킬페리쿠스는 수도원에 보내졌다가 훗날 다시 추대되어 킬페리쿠스 2세로 즉위하게 된다.

 

테우데리쿠스 3세

네우스트리아, 부르군트의 왕 675~691

아우스트라시아의 왕 679~691

데우데리쿠스 (데우데리히/데우데리크) 3세는 클로타리우스 3세의 아들로 궁재 에브로인의 영향 아래 왕위에 올랐다. 부르군트의 반란과 에브로인의 실각, 형 킬데리쿠스 2세의 네우스트리아 점령으로 2년간 폐위 상태에 있었다. 킬데리쿠스 2세가 암살당한 후 675년 네우스트리아의 왕위를 되찾았지만 궁재 에브로인(네우스트리아 궁재)과 헤르스탈의 피핀 2세(아우스트리아 궁재)에게 실권을 양보해야만 했다.

피핀2세와 마르틴의 누이인 클로틸드와 결혼하여 아들 킬데비르투스 4세, 클로타르 4세, 클로비스 4세 등을 두었다.

 

다고베르투스 2세

재위 676~679

다고베르투스 1세의 손자이자 시기베르투스 3세의 아들로 656년 아버지 사망 후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 그리모알트에게 납치되었다. 다고베르투스는 푸아티의 주교 손에 비밀리에 맡겨졌고 아일랜드의 수도원으로 추방당했다. 당시 다고베르투스 2세를 찾지 못한채 그리모알트의 아들인 킬데베르투스 3세가 아우스트라의 왕위에 올랐다.

수도원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666년 켈트 족 공주 마텔데와 결혼하였으나 그녀가 출산 중 사망하자 두번 째 아내 지젤 드 라제와 결혼하였다.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 시기베르투스 4세를 낳았고 그 시점에 왕위에 복위하게 된다.

오랫동안 유배되어 있던 다고베르투스는 아우스트라시아의 왕위에 올라 왕권 강화에 힘썼다.

사냥 중 살해되었는데 살해 배우는 아우스크라시아의 궁재 에브로인 혹은 피핀 2세으로 추정된다.

 

킬데베르투스 4세

695~711

테우데리쿠스와 클로틸다의 아들로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 피핀 2세가 실권을 행사하며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다고베르투스 3세

711~715

킬데베르투스 4세의 아들로 왕위에 올랐다. 재위 중 왕권의 실권자인 피핀 2세가 사망하였으나 실권회복에 실패하였다.

 

킬페리쿠스 2세

프랑크인의 왕 재위 718~721

네우스트리아의 왕 715~718

킬데리쿠스 2세의 아들로 궁재 카롤루스 마르텔루스가 실권을 행사하던 시기의 왕이었다.

 

테우데리쿠스 4세

재위 721~737

다고베르투스 3세의 아들로 카롤루스 마르텔루스(카롤링거 왕조)가 섭정하며 실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킬데리쿠스 3세

재위 743~751

메로빙거 왕조의 마지막 왕이다. 카롤루스 마르텔루스가 섭정하며 실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부친은 킬페리쿠스 2세 혹은 테우데리쿠스 4세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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