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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카페 왕조 가계도

GoodFortune 2022. 9. 20.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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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카페 왕조는 카롤링거 왕조를 무너뜨린 위그 카페에 의해 시작된 프랑스 왕조이다.

987년부터 1328년까지를 카페 가문이 왕위를 지켰다.

카페 왕조 이전은 카롤루스 왕조였으며 이후는 발루아 왕조이다.

 

위그 카페 - 로베르 2세 - 앙리 1세 - 필리프 1세 - 루이 6세 - 루이 7세 - 필리프 2세 (존엄왕) - 루이 8세 (사자왕) - 루이 9세 (용맹왕, le Prudhomme) - 필리프 3세 (용맹왕, le Hardi) - 필리프 4세 (미남왕) - 루이 10세 - 장 1세 - 필리프 5세 - 샤를 4세 

 

위그 카페

938~996 재위 987~996

 

프랑스 백작 위그와 독일 하이리히 1세의 딸 헤드비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두 명의 할머니들은 카롤루스의 후손이 되기도 하다. 친할머니 베르망두아의 베아트릭스는 카롤루스의 아들 피피노 카를로만의 후손으로 베른하르트의 서자 상리스의 피핀 2세의 손녀였다. 친증조모인 아델라이드는 경건왕 루이 1세의 딸이었다.

 

위그 왕조 개창자 위그 카페의 선조

독일 왕 오토2세, 오토 3세와 랭스의 대주교 아달베롱과 연합하여 카롤루스 왕조 로테르(로테르 2세? 3세? 루이 4세의 아들이다)에 대항하였다. 986년 로테르의 아들 루이 5세가 죽자 987년 귀족들의 추대를 받고 왕위에 올랐다. 귀족들의 추대로 오른 왕이기에 위그 카페의 왕권은 약했고, 강력한 귀족들 사이의 분쟁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996년 사망하면서 공동왕이었던 아들 로베르가 왕위를 이었다.

 

 

로베르 2세

872~1031 재위 996~1031

 

위그 카페와 아키텐 공작 기욤 3세의 딸 아델라이드의 아들이다.

988년 프란돌 백작 아르눌프 2세의 미망인이었던 이탈리아 왕녀 로잘라와 결혼했다가 992년 이혼했고, 996년 블루아 백작 오도 1세의 미망인 베르타와 결혼하였는데, 그녀는 사촌이기도 했다. 이 일로 교환 그레고리오 5세에 의해 파문당하였다가 교황 실베스테르 2세로부터 혼인 무효를 선언받았다.

1001년 아를 백작 기욤 1세의 딸 콩스탕스와 다시 결혼하여 일릭스, 위그 2세, 앙리 1세, 아델, 부르고뉴 공작 로베르 1세 등을 낳았다. 장남 위그 2세는 1017년 공동왕에 선포되었으나 아버지보다 먼저 1025년 사망하게 되었고, 동생 앙리 1세가 1027년 공동왕위에 올랐다. 로베르 2세가 사망후 앙리 2세가 프랑스 단독 통치자가 된다.

 

카페 왕조 가계도

 

앙리 1세

1008~1060 재위 1031~1060

 

로베르 2세와 콩스탕스 다를의 아들로 아버지가 왕위에 있을 때 1027년 공동왕이 되었다. 그의 어머니가 왕의 후계자로 동생인 로베르를 지지하여 로베르 2세가 사망하자 형제들의 반란을 상대해야 했고 1032년  로베르에게 부르고뉴 공작령을 주었다.

신성 로마황제 콘라트 2세의 딸 마틸다와 약혼했으나 그녀가 일찍 사망하였고, 프리슬란트의 마틸다와 결혼했으나 그녀 또한 결혼 후 사망했다. 키예프의 안과 세번째 결혼을 하여 필리프 1세, 엠마, 로베르, 베르망두아 백작 위그 1세를 낳았다.

앙리 1세의 집권기에 프랑스 왕령지의 규모는 가장 작았으며, 이를 보아 초기 카페 왕조가 유약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필리프 1세

1052~1108 재위 1059~1108

앙리 1세와 키예프의 안의 아들로 아버지 앙리 1세가 사망하자 7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14살까지 어머니 안과 플랑드르의 보두앵 4세가 공동왕으로 섭정이 되었다.

1072년 홀란트의 베르타와 혼인하였으나 필리프는 앙주 백작 풀크 4세의 부인 베르트라드 드 몽포르와 사랑에 빠졌다. 필리프 1세는 베르타와 이혼한 후 1092년 베르트라드와 결혼하였는데 이로 인해 교환 대리인 디의 위그에게 파문을 선포받고 교황 우르바노 2세가 다시 한번 파문을 선포하는데 필리프 1세는 그녀와 헤어지겠다고 하고 다시 돌아가는 일을 몇차례 반복했다고 한다.

아버지 앙리 1세에 낮아졌던 왕권이 회복하기 시작하였고 벡셍과 부르즈를 왕령지로 편입시켰다. 

베레타로부터 루이 6세 등 2남 1녀를 낳았고, 베르타르드에게서 2남 1녀를 낳았다. 사후 베레타의 아들 루이 6세가 왕위를 이었다.

 

루이 6세

1081~1137 재위 1108~1137

필리프 1세와 베르타의 아들로 왕권의 발전을 위한 기반 마련에 몰두했다. 루이 6세 치세에 왕령지가 확장되었고 왕권의 영향력이 왕국 전체에 걸쳐 본격적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루이 7세

1120~1180 재위 1137~1180

루이 6세와 아들레이데의 아들로 아버지 루이 6세가 죽자 왕위에 올랐다. 봉건귀족 가문들과(특히 앙주 가문 = 플랜테저넷 가문) 투쟁하였고, 잉글랜드와 분쟁이 있었다. 

루이 7세 시대에 노트르담 대성당 건축이 시작되었고 제 2차 십자군 전쟁도 벌어졌다. 1146~1148년 동안 제2차 십자군 원정에 참가하며 큰 타격을 입으며 왕실 재정이 고갈되고 왕권이 다시 위축되었다. 막대한 영지를 갖고 결혼했던 첫 부인 아키텐의 상속녀 알리에노르와 이 일로 불화가 시작되어 이혼하게 되었는데 알리에노르는 잉글랜드의 헨리 2세와 결혼하게 되며 프랑스 서부 지역 절반을 잉글랜드에 빼앗겼다.

아델 드 샹파뉴에게서 낳은 외아들 필리프 2세에게 왕위를 물려줬다.

 

필리프 2세 (존엄왕)

1165~1223 재위 1180~1223

루이 7세와 샹파뉴의 아델라 사이에 태어난 외아들이다. 아버지 루이 7세가 사망하며 1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반에는 외숙인 앙리 1세 드 샹파뉴 백작이 섭정이었으나 얼마 안가 친정을 실시하였다. 루이 7세에 시작된 앙주 가문(혹은 플랜태저넷 가문)과 항쟁하였는데, 헨리 2세의 아들인 청년왕 헨리, 조프루아 2세와 절친하였고, 1188년 리처드를 부추겨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키도록 하여 헨리 2세를 쫓아버리는데 성공하기도 했다. 리처드 1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제 3차 십자군 원정으로 인해 리처드와 대립하며 리처드의 동생 존에게 왕위를 찬탈하도록 부추겼다. 존의 반란이 실패하자 리처드 1세는 프랑스를 공격하였는데 1199년 리처드가 전사하면서 존이 잉글랜드의 왕위에 올랐다. 존이 왕위에 있는 동안 필리프는 유럽대륙의 영국령 영토를 빼앗아왔는데 1204년 말에는 아키텐과 노르망디 일대의 대부분의 영국령이 필리프 2세에게로 들어왔다. 1214년 존은 연합군을 조직하여 프랑스를 공격해왔으나 필리프 2세는 승리를 거두게 된다. 역사가들은 부빈 전투의 승리로 인해 프랑스가 만들어졌다고 평가할 정도로 의미를 두고 있다.

프랑스 국왕으로서는 최초로 위대한 왕이라고 평가되어 '존엄왕'이라는 별명이 있다.

 

루이 8세 (사자왕)

1187~1226 재위 1223~1226

필리프 2세와 에노의 이자벨 사이의 아들이다. 필리프 2세를 도와 프랑스 전역을 누비고 다니며 전공을 세워 '사자왕'라는 칭호를 얻었다. 1217년 잉글랜드 원정을 감행했으나 실패하였다.

1200년 필리프 2세와 잉글랜드의 존 왕 사이에 체결된 조약을 블랑카 데 카스티야는 루이 8세의 왕비가 되었다.

아들 루이 9세로 왕위를 이었고, 로베르는 아르투아가의 시조가 된다. 막내 아들 샤를 당주(샤를 앙주 = 시칠리아 카를루 1세)는 카페 왕조의 방계인 앙주 카페 왕조의 시조로 시칠리아 왕국의 왕이 되었다. 샤를 당주는 1266년부터 시칠리아 섬과 이탈리아 반도 본토의 나폴리 일대를 지배하다, 1282년 시칠리아 만종 사건으로 시칠리아 섬에서 쫓겨나 나폴리 일부 본토만을 지내했다.

루이 9세 (용맹왕, le Prudhomme)

1214~1270 재위 1226~1270

루이 8세와 블랑카 데 카스티야 사이의 아들이다.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형이 4살에 요절하면서 계승권을 얻게 되었다. 루이 9세가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면서 어머니 블랑카가 섭정이 되었다. 루이 9세가 성년이 되어도 블랑카의 권력 아래 있었다가 1241년에야 왕권을 장악 할 수 있었다.

루이 9세는 40일간 사적 전쟁을 금하는 '40일왕' 제도를 도입하였고, 고문을 완화하며 사적 복수를 금하고 재판결을 위해 왕에게 호소할 수 있는 격쟁 제도를 도입하였다. 이러한 명성이 전해지며 유럽의 여러 왕국들 사이를 중개하기도 했다. 루이 9세는 카페 왕조와 플랜태저넷 가문 사이의 대립을 끝내고, 여러 교회, 수도원, 병원을 건립하고 빈자들을 도왔다.

프로방스 백작 레몽베랑제 4세의 딸 마르그리트 드 프로방스와 결혼하여 11명의 자식을 가졌다. 장남 루이는 요절하였고 차남 필리프 3세가 왕위를 이었다. 아들 중 한명인 로베르는 앙리 4세의 직계 선조이기도 하다.

1270년 마지막 십자군 원정에서 풍토병으로 사망하였다. 

1297년 손자 필리프 4세의 추진으로 보니파시오 8세에 의해 '생 루이 드 프랑스'라는 이름으로 시성되었다.

생전에 성인으로 여겨진 루이 9세는 프랑스 왕보다는 생 루이 (Saint Louis)로 더 많이 불리며, 프랑스 경제, 지식, 예술 재부흥을 일으킨 군주로 평가받는다. 또한 전 유럽에 걸쳐 가장 기독교적인 왕의 상징적 인물이다.

루이 9세, 필리프 2세, 필리프 4세는 세 명의 위대한 카페 직계 군주로 평가 받는다.

 

필리프 3세 (용맹왕, le Hardi)

1245~1285 재위 1270~1285

 

루이 9세와 마르그리트 사이의 아들로 루이 9세와 함께 제 8회 십자군에 출진했다가 아버지가 아프리카 튀니지에서 사망하며 성 밖에서 즉위하였다. 1282년 아라곤 왕 페레 3세의 사주로 발생한 시칠리아 만종사건으로 시칠리아에서 프랑스인이 학살당하고 축출당하자 1285년 아라곤을 침략하였는데 그러던 중 풍토병으로 사망했다.

첫번째 결혼은 아라곤 왕국의 왕 차이메 1세의 딸 이사벨라와 하였다. 이사벨라는 4남을 두었는데 차남이 필리프 4세이다. 장남 루이와 3남은 요절하였고, 4남 샤를 드 발루아는 프랑스 발루아 왕가의 시조로 샤를의 장남 필리프 6세가 발루아 왕조 창건자이다.

두번째 결혼은 브라반트의 마리아와 하여 1남 2녀를 낳았다. 이중 아들 루이는 나라바의 필리페 3세의 아버지가 된다. 루이의 아들 필리프 데브뢰는 루이 10세의 딸 호아나 2세와 결혼하여 나라바의 왕위를 승계했다.

 

필리프 4세 (미남왕) (나바라 필리페 1세)

1268~1314 재위 1285~1314

 

필리프 3세와 첫 왕비 이사벨라 사이의 차남으로 어머니는 1271년에 사망하였고, 브라반트의 마리아가 아버지 필리프 3세와 재혼하였다. (이사벨라의 장남 루이가 요절하였는데 마리아와 관계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아버지가 1285년 아라곤을 침략하다 풍토병으로 사망하며 17세에 왕위에 올랐다. 잘생긴 외모 때문에 '미남왕'이라는 별명이 있는데, 신하들 앞에서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권위 있는 태도를 유지하여 '무쇠왕' '대리석왕'이라 불리기도 했다.

나라바 왕국의 왕 헨리케 1세의 딸 호아나 1세와 결혼하여 호아나 1세와 함께 공동왕으로 나라바 왕을 겸하였다. (필리페 1세)

필리프 4세는 왕 중심의 국가체제를 확립하며 중앙집권 제도와 기구를 정비하였다. 프랑스가 강대국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닦았으며 강한 왕권을 행사했다.

1294~1303년 사이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와 전쟁을 벌이고 1302~1304년 플랑드르 공국과 전쟁을 벌이며 경비 마련을 위해 교회와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하였는데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세금징수를 금지하였고, 이 때문에 교황과 갈등이 있었다. 또한 성직자를 반역죄로 체포하여 투옥시키며 교황과 갈등이 심화되었다. 1303년 교황이 필리프 4세의 파면 교서를 발표할 예정이라는 소식을 접하였고, 필리프 4세는 프랑스 군인들을 보내 교황을 생포하는 아나니 사건을 일으켰다. 아나니 사건 한달 후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사망하였다. 이후 후임 교황 베네딕토 11세 또한 8개월만에 사망하였고 1년간 교황 자리가 비어 있기도 하였다. 1년 후 신임 교황 자리는 프랑스 왕실 지지를 받던 클레멘스 5세가 차지하게 되었는데, 필리프 4세의 강력한 간섭으로 로마에 들어가지 못한 채 프랑스에 체류하게 되었다. 1309년에는 교황청이 프랑스로 이주하여 1377년까지 약 70년간 프랑스 아비뇽에 있었다. (70년간 아비뇽의 교황 7명은 프랑스의 왕 영향 속에 있었다.)

1314년 필리프 4세의 장남과 3남의 부인이 젊은 기사 두명과 간통을 하다 적발하는 사건이 있었다. 두 명의 기사는 대역죄로 사지가 절단되어 처형당했고 두 며느리는 삭발 당한 후 감옥에 유폐되었다. 또한 성전기사단의 23대 단장 자크 드 몰레에게 누명을 씌워 노트르담 대성당 앞에서 그를 화형에 처하였다.

1314년 사냥 중 낙마하여 죽으며 장남 루이 10세가 왕위에 올랐다.

 

루이 10세 (나바라 루이스 1세)

1289~1316

프랑스 왕 재위 1314~1316

나바라 왕 재위 1305~1316

필리프 4세와 나바라 여왕 호아나 1세의 장남으로 1305년 어머니 호아나 1세가 사망하자 루이스 1세로서 나바라 왕위를 계승하였다. 또한 1314년 아버지 필리프 4세가 사망하면서 프랑스 왕이 되었다. 첫번째 왕비 부르고뉴의 마르그리트에게서 호아나 2세를 두었고, 두번째 왕비 앙주 클레멘시아에게서 프랑스의 장1세를 두었다. 루이 10세는 아들 장 1세(호아네스 1세)가 태어나기 전 사망하면서 장 1세가 태어날 때까지 5개월동안 국왕의 자리가 비어있었다.

 

장 1세 (나바라 호아네스 1세)

1316.11.15~11.20 재위 1316.11.15~11.20

루이 10세의 두번째 부인 앙주 클레멘시아 사이의 유복자로 태어나 5일만에 사망하였다. 단 5일동안 프랑스와 나바라의 왕이었다. 그의 죽음에는 프랑스 왕위를 노린 삼촌 필리프 5세가 개입되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5일간 섭정이었던 삼촌 필리프가 왕위를 이었다.

 

필리프 5세 (나바라 펠리페 2세)

1292~1322 재위 1316~1322

필리프 4세와 나바라 여왕 호아나 1세의 차남으로 루이 10세의 동생이다. 유복자로 태어난 조카 장 1세의 섭정을 하였으며, 5일만에 조카가 죽자 왕위에 올랐다. (프랑스와 나바라의 왕) 당시 루이 10세의 딸 잔(호아나 2세)이 있었으나 남성만이 왕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귀족들의 반발이 극심하였으나 끊임없는 설득과 신분회의 개최를 통해 정당성을 획득했다. 필리프 5세 또한 딸 밖에 없었기에 동생인 샤를 4세가 왕위를 이었다.

 

카페 왕조 가계도 - 샤를 4세가 마지막 왕이고 필리프 6세가 발루아 왕조를 시작한다.

 

샤를 4세 (나바라 카를로스 1세)

1294~1328 재위 1322-1328

 

필리프 4세와 나바라 여왕 호아나 1세의 3남으로 프랑스 카페 직계로써는 마지막 왕이었다. 형 필리프 5세가 적자 없이 죽은 후 왕위를 이어받았다.

샤를 4세는 1307년 부르고뉴 공 오토 4세의 딸 블랑슈 드 부르고뉴와 결혼을 하였는데, 아버지 필리프 4세에 의해 간통 협의로 감옥에 유폐되었다. 왕위에 오른 후,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7세의 딸 마리아 폰 룩셈부르크와 결혼했다. 딸이 있었으나 요절했고 마리아 또한 사망하였는데, 이때 마리아는 임신중이어서 제왕절개로 아들 샤를을 출생했다고 한다. 어렵게 태어난 샤를 또한 요절했다.

후계를 위해 샤를 4세는 루이 데브뢰의 딸이며 자신과는 사촌인 잔 데브뢰와 세번째 결혼을 하였는데, 3명의 딸만 낳고 아들은 없었다. 

샤를 4세가 죽자 후계가 문제 되었다. 후보는 3명이 있었다. 필리프 4세의 동생 샤를 드 발루아의 아들 필리프 드 발루아, 샤를 4세의 누나 이자벨의 아들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 필리프 4세의 동생 루이 데브뢰의 아들이자 루이 10세의 사위인 필리페 3세.

제후, 승려들의 회의를 통해 선택된 자는 필리프 드 발루아였다. 필리프 6세로 왕위에 오르게 되면서 발루아 왕가의 초대 왕이 된다.

발루아 왕가부터 나바라와 프랑스의 왕은 나누어졌으며 프랑스는 필리프 6세, 나바라는 필리페 3세와 호아나 2세가 공동왕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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