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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제국 오토 왕조 (오토 1세 오토 2세 오토 3세 하인리히 2세)

GoodFortune 2022. 10. 17.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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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작센, 슈바벤, 바이에른, 프랑켄, 케른텐, 오스트리아, 헝가리, 북부 이탈리아 등의 구성국으로 되어 있는 다민족 영토복합체 제국이다.

중세 초기 800년에 형성되어 1806년 해체될 때까지 유지되었으며 가장 큰 국가는 독일 왕국이었다.

800년 12월 25일 교황 레오 3세가 프랑크 국왕 카롤루스 1세에게 황제의 관을 씌우며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서로마 제국의 부활을 선언했다. 800년부터 888년까지 프랑크계 황제가 있었으며 962년 오토 1세 황제로 즉위하며 독일계 황제가 1806년까지 지속되었다.

역사학자에 따라 800년을 신성로마 제국의 시작으로 보기도 하고 962년을 신성로마제국의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이 포스팅에서는 962년 오토 1세를 시작으로 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를 기록해본다.

 

프랑크계 황제에 대해서는 이전 프랑스 카롤루스(카롤링거) 왕조를 참고한다.

 

 

프랑스 카롤루스(카롤링거) 왕조

프랑스 카롤루스 왕조는 메로빙거 왕조 다음을 이은 프랑스 왕국 두번째 왕조이다. 751년 피핀 3세가 왕위에 오르며 카롤루스 왕조가 시작되었고 843년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3국으로 분리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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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1세 데어 그로세

912~973 재위 962~973

 

하인리히 1세와 링겔하임의 마틸다의 아들이다. 하인리히 1세는 독일의 왕과 황제를 배출한 오토 왕가의 시조로 프랑크 족이 아닌 최초의 독일 군주였다. 마틸다는 프랑스 카롤루스에 저항한 작센 족 지도자 가문의 한 사람의 딸로 추정된다. 하인리히 1세는 유디트와 첫 결혼에서 아들 탕크마르를 얻었지만, 두번째 결혼에서 얻은 아들 오토를 후계자로 지정하였다. 탕크마르는 반란을 일으켰다가 살해되었다. 919년 콘라트 1세가 아들없이 사망하자 유력 귀족이던 작센 공작 하인리히 1세가 독일 국왕이 되었다. 첫 부인 마틸다의 딸 리우트가르트는 콘라트와 결혼하였는데, 콘라트의 외조부 콘라두스 1세는 카롤링거 왕가 단절 이후 동프랑크의 왕(재위 911~918)이었다. 훗날 리우트가르트와 콘라트의 증손자가 잘리어 왕가의 콘라트 2세로 신성로마 제국 황제 자리에 오른다.

929년 하인리히 1세의 유산 상속 과정에서 오토, 하인리히, 브루노 삼형제가 상속자로 언급되었으나 브루노는 가콜릭 사제가 되며 유산 대부분을 오토가 가지게 된다. 하인리히 1세는 앵글로색슨 왕국과의 동맹을 맺으며 앵글로색슨의 왕 에드워드의 두 딸이 독일로 왔는데, 그 중 에드기스를 선택하여 930년 결혼하였다.

936년 아버지 사망으로 독일왕이 되었으며 왕국을 강화시키고 영토를 넓혀나갔다. 이탈리아 로타리오 2세의 미망인 아델라이데가 포로가 되어 지원을 요청하자 951년 이탈리아로 가서 롬바르디아 왕을 자칭하고 아델라이데와 결혼했다.

맏사위 콘라드와 장남 리우돌프가 사망하여 오토는 아델하이데의 아들 오토를 후계자로 정하였다. 아들 오토 위에 두명의 아들이 더 있었으나 요절하여 막내 아들인 오토가 후계자가 되었다. 961년 이탈리아 원정을 통해 베렝가리오 2세와 그의 아들 아달베르토 2세를 격파하고 이탈리아를 손에 넣으며 이탈리아 왕의 자리까지 차지했다.

962년 로마를 차지한 오토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며 오스트리아, 스위스, 독일, 이탈리아를 포함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오토 1세는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에서 그를 황제로 인정하기를 거부하자 비잔티움 제국을 공격하였으며 972년 아들 오토 2세와 비잔티움의 테오파노 공주의 결혼을 성사시켰다.

누이 게르베르가는 기셀비르투스(로트링겐 왕)과 결혼했으나, 기셀베르투스가 오토 1세를 상대로 전투를 벌이다 패하여 사망한 후 서프랑크의 왕 루이 4세와 재혼하였다.

973년 갑자기 고열에 시달리다 사망하였다.

 

오토 2세

955~983 재위 973~983

 

오토 1세와 이탈리아의 아델라이데의 아들이다. 아델라이데는 이탈리아 왕 로타리오 2세의 미망인으로 오토 1세와 두번째 결혼을 하였다. 아버지 오토 1세는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을 공격하여 비잔티움의 요안니스 1세의 조카 테오파노 공주와 아들 오토 2세를 결혼시켰다. 테오파노는 오토 2세보다 12살이나 많았다.

테오파노와의 사이에서 1남 3녀를 두었으며 아들 오토 3세가 왕위를 이어갔다. 

961년 이탈리아와 독일의 공동왕위에 올랐으나 어린 나이였기에 명목 상 왕이었고 973년 아버지 사망 후 단독 황제가 되었다.

즉위 후 사촌형인 베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가 왕권에 도전하고 내전이 발발하여 오토 2세는 하인리히를 감옥에 가두었고, 어머니 아델라이데와 부인 테오파노의 사이도 좋지 않아 어머니를 부르고뉴 왕국으로 보내기도 하는 등 내부 갈등이 많았다.

또한 동쪽의 슬라브족, 서쪽의 서프랑크, 북쪽의 덴마크이 침략해오고 남쪽에서는 로마 귀족들의 반란이 있었다. 

오토 2세는 981년 로마로 입성하여 로마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 남이탈리아로 진군하였으나 아랍인들에게 패하였고, 983년 말라리아로 28살 젋은 나이에 로마에서 사망했다.

유해는 베드로 대성당에 안치되었는데 역대 독일 국왕 중 유일하게 본국에 묘지를 못한 인물이 되었다.

 

 

오토 3세

996~1002 재위 996~1002

 

오토 2세와 테오파노의 아들이다. 983년 아버지가 젊은 나이로 사망하여 3살의 나이에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며 어머니 테오파노가 섭정이 되었다. 14세가 된 후 친정을 시작하였다.

카롤루스 대제를 동경하여 수도를 로마로 옮기고 카롤루스 대제를 모방하여 팔라티나 언덕에 왕궁을 짓고 그의 관례를 따라하였다. 이탈리아의 정치에 깊이 관여하고 자신의 측근을 교황으로 선출시켰으나 로마인들이 반발하여 폭동을 일으켰고 피난 중 21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21세에 미혼인 채로 사망해 후계자가 없었으며 오토 2세의 유일한 아들이었기에 황제 자리는 육촌 형제인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4세가 뒤를 이어 하인리히 2세로 즉위하였다.

 

 

하인리히 2세

1014~1024 재위 1014~1024

독일왕 1002~1024 이탈리아왕 1004~1024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와 브루군트의 기셀라의 아들이다. 오토 3세의 육촌 친척으로 오토 3세의 조부 오토1세와 하인리히 2세의 조부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1세는 형제이다. 그의 아버지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는 오토 2세 치하에 반란을 일으켜 투옥되기도 하였다.

999년 룩셈부르크 백작 지그프리트 1세의 딸 쿠니군데와 결혼하였다.

오토 3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며 1002년 독일왕이 되었고, 1004년 이탈리아의 와, 1014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독일 왕위를 가장 먼저 계승한 하인리히 2세는 하인리히를 반대하는 세력에 의해 이탈리아 왕이 된 이브레아의 아르두윈에 맞서기 위해 이탈리아로 갔다. 하인리히는 베로나를 점령하고 1004년 이탈리아의 왕이 되었으나 교황 요한 18세로부터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인정받는데 실패했다.

이후 독일로 돌아갔으나 1013년 아르두윈이 또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며 하인리히 2세는 이탈리아로 가서 반란을 진압하였다. 1014년 교황 베네딕토 8세에게 황제의 관을 받으며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자리를 차지했다. 

하인리히 2세는 주교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주어 성직자들을 통제하였고 왕권을 강화했다. 

1024년 젊은 나이에 후계도 남기지 못하고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여 신성로마제국 오토 왕가의 마지막 왕이 되었다.

1147년 교황 클레멘스 2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아내 쿠니군데도 1200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면서 성인으로 지정된 유일한 독일왕이 되었다.

 

하인리히 2세가 후계 없이 죽으며 오토 1세의 딸 리우르가르트와 프랑켄 가문의 콘라트 적왕의 증손인 잘리어 가문의 콘라트 2세가 후계를 이었다. 콘라트 2세는 1024년 독일 왕이 되었으며 1027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어 잘리어 왕가의 시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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