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 로마 제국의 오토 왕가를 이어 황제의 자리를 계승한 황제는 콘라트 2세이다.
콘라트 2세의 증조모는 오토 1세의 딸 리우트가르트이며, 외고조부가 오토 1세가 된다.
리우트가르트는 프랑켄 가문 출신 콘라트 적왕과 결혼하였고 그들의 증손자 콘라트 2세는 잘리어 왕가의 시조가 되었다.
콘라트 2세
990~1039 재위 1027~1039
슈파이어 백작 하인리히와 알자스의 아델라이데의 아들이자 오토 1세의 후손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 하인리히가 케르텐 공국의 계승권을 동생에게 빼앗기고 슈파이어 백작만을 보유하게 되며 콘라트의 유년기는 귀족이라 말하기 힘든 환경이었다. 아버지는 일찍 사망하고 어머니는 재혼을 하여 숙부에 의해 양육되었다.
1024년 육촌인 하인리히 2세가 후계 없이 일찍 사망하여 왕위 선출 회의가 소집되었고 콘라트 또한 선거에 참여했다. 그는 타고난 인품과 지성으로 왕으로 선출되어 독일 왕(프랑크의 왕)이 되었다. 이후 프랑크의 왕은 없어졌으며 로마인의 왕으로 불린다. 1027년에는 교황 요한 19세에 의해 황제로 선출되었다.
브론스위크 백작 브루노 1세와 슈바벤 공작 에른스트 1세의 미망인이던 슈바벤의 기셀라와 결혼하였는데 근친혼이라는 이유로 교황청의 인정을 받지못했다. 기셀라는 콘라트의 증조모 리우트가르트의 동생 리우돌프의 4대손이었다.
기셀라로부터 1남 2녀를 낳았고 아들 하인리히 3세는 후계자로 1028년 로마인의 왕이 되었고, 1039년 이탈리아의 왕으로 봉하여 공통 통치자가 되었다.
하인리히 3세
1017~1056 제위 1046~1056
콘라트 2세와 기셀라의 아들이다. 아버지 사망 후 로마인의 왕위에 올랐으며 1046년 이탈리아로 원정을 가서 3명의 교황을 폐위 시키고 자신을 수행한 독일인 성직자를 클레멘스 2세로 교황으로 옹립한 후 황제에 올랐다. 즉위 후에도 3명의 교황을 스스로 지명하여 로마 교황을 황제 지배 아래 두었다. 4명의 교황은 모두 독일인 성직자였다.
1036년 크누트 대왕의 손녀 덴마크의 군힐다와 결혼했으나 2년 후 군힐다가 사망했다. 이후 1043년 푸아투의 아그네스와 두번째 결혼을 하였으며 아들 하인리히 4세를 낳았다.
1053년 바이에른의 벨프, 하 로렌의 고드프리 3세 등의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3살 된 아들 하인리히 4세를 독일 왕으로 임명했다. 1056년 39살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며 6살 된 하인리히 4세가 왕위에 올랐고 아그네스가 섭정이 되었다.
하인리히 4세
1050~1106 재위 1056~1105
하인리히 3세와 아그네스의 아들이다. 3살에 로마인의 왕이 되었으며 1056년 아버지 사망으로 6살의 나이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어머니 아그네스의 섭정이 불안정하였기에 왕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1062년 퀼른 대주교 안노 2세는 하인리히 4세를 납치한 후 모후 아그네스의 퇴진을 요구하였고, 아그네스는 섭정에서 물러났고 안노 2세가 권력을 잡았다.
1066년 사보이아 백작 오도네의 딸 베르타와 결혼했다. 그러나 2년 후 베르타를 궁에서 쫓아낸 후 이혼하려고 했으나 교황청의 거부로 실패했다. 베르타와의 사이에서 3남 3녀를 낳았다. 이중 막내아들 하인리히 5세가 훗날 하인리히 4세의 뒤를 이어 황제에 오른다.
1077년 하인리히 4세는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 서임권 투쟁을 벌이다가 하인리히 4세는 교황 그레고리고 7세에게 파문당하였다. 하인리히 4세는 이탈리아 북부 카노사 성으로 자신을 파문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찾아가 용서를 구하게 된다. 이 사건은 카노사의 굴욕이라 불리며 황제와 교황 간의 권력다툼에서 교황권이 우위를 차지하게 된 사건이다.
교황이 파문을 해제하자 하인리히 4세는 바로 교황에 대해 적대 행위를 재개했다. 1080년 교황 그레고리고 7세는 루돌프를 새로운 독일왕으로 승인하고 하인리히 4세를 또 파문하며 내전이 벌어졌으나 루돌프가 전투 중 사망하며 종식되었다. 1080년 로마 원정을 시작한 하인리히 4세는 권력 장악에 성공하여 1084년 로마를 탈환하여 교황을 폐위하며 복수하였다.
1087년 장남 콘라트를 독일 공동왕으로 봉하였는데, 1093년 콘라트는 반란을 일으키다 진압을 당하고 1098년 독일왕에서 폐위되었다. 차남 하인리히 5세를 후계로 지명했지만 하인리히 5세 역시 1104년 반란을 일으켰다. 하인리히 5세는 어머니 베르타와 교황 파스칼 2세의 지원으로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를 감금시켰다. 감옥에서 탈옥한 하인리히 4세는 복위를 노렸으나 아들 하인리히 5세에게 진압당하고 병으로 사망했다.
하인리히 5세
1086~1125 재위 1111~1125
콘라트 2세와 베르타의 차남이다. 형 콘라트가 하인리히 4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며 폐위되며 후계자가 되었다. 아버지 생전에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선서를 했지만 1104년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 하인리히 4세를 감금시켰고 1105년 퇴위시켰다.
하인리히 4세부터 황제와 교황사이의 서임권 투쟁이 계속되어 하인리히 5세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1110년 로마 원정을 단행했다. 하인리히 5세는 군사를 움직여 교황과 고위 성직자들을 투옥하여 성직 임명권을 강제로 받아내고 1111년 황제 즉위 대관식을 거행했다.
하인리히 5세가 독일로 돌아가자 로마 가톨릭교회는 하인리히 5세를 파문하였고 각지의 영주들이 하인리히 5세에 대항했다. 작센 공작 주플린부르크의 로타르를 중심으로 한 반란은 1115년 하인리히를 패배시켰고 여러번의 교섭으로 1122년 황제는 주교의 상징인 홀과 반지를 수여하는 권리를 포기하고 교회법에 따른 주교 선출에 동의하는 보름스 협약이 체결됐다. 보름스 협약으로 독일 왕국에 대해서만 주교와 수도원장의 선거에 황제가 참석하는 것이 인정되고 다른 왕국에 대해서는 포기하게 되며 황제의 권위가 하락되었다.
1114년 잉글랜드 헨리 1세의 마틸다와 결혼하였으나 아들이 없었기에 잘리어 왕조가 단절되었다. 하인리히의 조카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 2세가 후계자로 지목되었으나 영주들이 거부하였고, 주플린부르크의 작센 공작 로타르가 로타르 3세로 왕위에 올랐다. 왕비 마틸다는 이후 앙주 백작 조르푸아 5세와 재혼하여 세 명의 아들을 낳았으며 장남은 잉글랜드의 왕 헨리 2세가 된다.
로타르 3세
1075~1137 재위 1133~1137
주플린부르크 백작 게프하르트의 아들이다. 1125년 하인리히 5세가 후계 없이 사망하자 이탈리아와 독일 왕이 되었고 1133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로타르 3세는 1106년 하인리히 5세가 아버지 하인리히 4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 하인리히 5세와 함께 했으며 작센 공작에 임명되었다. 서임권 분쟁에서 하인리히 5세에 반대하며 1115년에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1125년 하인리히 5세가 사망하자 로타르는 강력한 황제 후보가 되었는데 그는 오토 왕조의 시조 오토 1세의 조카의 7대손이기도 하다.
1127년 로타르 3세는 독일왕으로 선출되었고 1132년 이탈리아에서 시칠리아 왕 루지에로 2세와 싸워 1133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 올랐다.
1137년 시칠리아의 루지에로 2세에 대한 원정을 하여 남부 이탈리아에서 몰아내고 돌아오는 길에 알프스 산맥을 넘다가 사망했다. 후계 없이 사망하게 되며 황제 자리는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에게 이어졌다.
로타르 3세가 남긴 딸 게르트루드의 손자는 훗날 오토 4세로 황제자리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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