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엔슈타우펜 왕조의 프리드리히 2세 이후에 약 20년간 (1254년~1273년) 대공위 시대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의 추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의 요청으로 열린 프랑크푸르트 선제회의에서 합스부르크가의 루돌프 1세를 황제로 선출하며 대공위시대는 종결되었다. (* 루돌프 1세는 독일왕위에 올랐으나 황제 즉위에는 실패하였고, 대공위시대 종결 후 첫 황제는 룩셈부르크의 하인리히 7세였다.)
루돌프 1세
1218~1291
독일왕 재위 1273~1291
루돌프 1세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첫번째 독일왕이다. 합스부르크 백작 알브레히트 4세의 장남으로 아버지에게 슈바벤의 합스부르크 성을 물려받았다. 1254년 후엔베르크 백작의 딸 게르트루드와 결혼하였다.
루돌프는 대부인 신성 로마 제국 프리드리히 2세를 자주 방문하여 황제와 그의 아들 콭라트 4세와 친분을 쌓았다. 대공위 시대에 루돌프는 넓은 영토를 지배하게 되며 강력한 귀족이 되었다.
1273년 선제회의에서 7표 만장일치로 독일왕으로 선출되었다. 루돌프 1세는 즉위 후 많은 정략결혼을 통해 친인척 관계를 맺으며 왕권을 강화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에게 황제 승인을 받았으나 선제후들의 견제로 황제에 오르지 못하였고 아들 알브레히트를 독일 왕에 즉위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아돌프 폰 나사우
1250~1298
독일왕 재위 1292~1298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견제한 신성로마 제국의 제후들이 선출한 독일왕이다. 그러나 황제로부터 공인받지 못하여 황제 자리에는 오르지 못하였다. 루돌프 1세의 아들 알브레히트 1세와 전쟁 중 살해되었다.
알브레히트 1세
1255~1308
독일왕 재위 1298~1308
합스부르크 왕가의 루돌프 1세와 호엔베르크의 게르트루트의 아들이다. 1291년 아버지 사망했을 당시 아돌프 폰 나사우와 왕위를 놓고 경쟁했으나 실패하였고 1298년 아돌프 폰 나사우를 물리치고 독일왕위에 올랐다.
1299년 프랑스의 필리프 4세의 딸 블랑슈와 아들 루돌프를 결혼시켰다. 1306년 보헤미아의 바츨라프 3세가 사망한 후 아들 루돌프 1세가 보헤미아 국왕으로 즉위했으나 이듬해 전투 중 사망하였다. 알브레히트는 1308년 조카 요한 파리키다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루돌프 1세와 알브레히트 1세는 황제 대관식을 치루지 못했지만, 합스부르크 왕가는 이후 1452년 프리드리히 3세를 시작으로 오랜시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를 유지했다.
하인리히 7세
1273~1313 재위 1312~1313
독일왕 재위 1308~1313
이탈리아왕 재위 1311~1313
룩셈부르크 백작 하인리히 5세의 아들이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알브레히트 1세가 암살당한 후 라인 궁중백 루돌프와 경쟁했으나 독일왕으로 선출되었다. 룸셈부르크 왕가의 첫번째 왕이었다.
즉위 후 망명한 보헤미아 왕국의 공주 엘리슈카와 아들 요한이 결혼하였는데, 엘리슈카의 청에 따라 하인리히 7세는 프라하를 함락시키고 자신의 아들을 보헤미아 국왕 얀으로 즉위시키며 룩셈부르크 가문이 보헤미아 왕위까지 겸하게 되었다.
1312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에 오르기 위해 로마로 가 부재중인 교황을 대신해 로마의 추기경들에 의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오랫동안 비어있는 황제의 자리를 차지한지 1년만에 나폴리 왕국을 공격하던 중 사망했다.
루트비히 4세
1282~1347 재위 1328~1347
독일왕 재위 1314~1347 (루트비히 5세)
이탈리아왕 재위 1327~1347
합스부르크 왕가의 루돌프 1세의 외손자이자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 2세와 마틸다의 아들이다. 비텔스바흐 왕가의 첫번째 신성로마 제국 황제였다. (이후 비스텔바흐 왕가의 카를 7세 알브레히트가 1742년 황제로 올랐다.)
사우의 아돌프와 알브리히트의 독일 왕위 경쟁에서 형 라인 궁중백 루돌프는 나사우의 아돌프의 사위였기에 아돌프 편을 들었고, 어머니 마틸다는 아들 알브레히트를 지지했다. 1298년 알브레히트가 아돌프를 이기며 독일 왕위에 올랐고 형 루돌프의 영향력은 감소했다. 1314년 하인리히 7세가 사망하며 그는 형 루돌프와 하인리히 7세의 아들 얀을 제치고 왕위 후보자가 되었으며 외사촌 프리드리히와 경쟁했다. 당시 양쪽의 지지자들에 의해 루트비히와 프리드리히는 각각 왕위에 오르며 7년 동안 왕위를 두고 다툼을 하였다. 1322년 루트비히는 전투에서 승리하여 프리드리히를 포로로 잡고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경쟁을 해결했다.
1346년 교황 클레멘스 6세의 지원으로 룩셈부르크의 카를 4세가 대립왕으로 선출되었으나 루트비히 4세는 카를에 대항하여 진압하였다. 1347년 뮌헨에서 곰사냥을 하던 중 심장마비로 사망하였고 루트비히의 아들들은 카를 4세에 맞서기 위해 대립왕 권터 폰 슈바르츠부르크를 지지했으나 권터가 사망하며 카를 4세가 독일 왕이 되었다.
카를 4세
1316~1378 재위 1355~1378
보헤미아 왕 재위 1346~1378 (카렐 1세)
룩셈부르크 왕가의 보헤미아 왕 얀과 엘리슈카 프로셰미슬로브나의 아들이다. 어머니 엘리슈카는 프르셰미슬로 왕조의 바츨라프 2세(보헤미아 왕)의 딸이자 바츨라프 3세의 여동생이다. 1346년 루트비히 4세와 대립하던 교황 클레멘스 6세와 동맹하였고 대립왕으로 추대되었으나 신성 로마 제국 주교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1347년 루트비히 4세 황제가 사망하며 대립왕이던 카를은 독일왕이 되었고 아버지 뒤를 이어 보헤미아 국왕이 되었다.
1354년 이탈리아로 가서 1355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자리에 올랐다. 1356년 신성 로마 제국의 법률 금인칙서를 공포했는데, 교황의 간섭 없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선출이 가능해졌다.
카를 4세 치세에 보헤미아의 프라하가 신성 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었기에 프라하에 그의 동상이 있다. 프라하 카렐 대학교를 설립하여 프라하에 중앙유럽 최초의 대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지기스문트
1368~1437 재위 1433~1437
이탈리아 국왕 1431~1437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1387~1437
독일왕 1410~1437
보헤미아 국왕 1419~1437
카를 4세의 차남이며 바츨라프 4세의 동생이다.
1411년 로마 교회의 세명의 교황을 폐하고 새 교황 마르티노 5세를 선출하여 교회의 대분열을 막았다. 1415년 교회 개혁의 선두에 섰던 보헤미아의 성직자 얀 후스를 화형에 처해 후스 지지자들의 반란이 있었으며, 5년 후 진압을 하였으나 대패하였다. 이후 1420년대 대부분을 반란을 진압하는데 힘을 쏟아야 했다.
두번째 부인 바르바르로부터 딸 엘리자베트만 있었으므로 룩셈부르크 왕조는 단절되었고, 엘리자베스의 남편인 알브레히트 2세가 독일 왕위에 올랐다. 알브레히트 2세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4세의 아들로 독일왕 알브레히트 1세의 고손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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