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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로마 제국 슈타오펜 왕조와 벨프 왕조

GoodFortune 2022. 10. 18.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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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로마 제국 황제는 로타르 3세를 이어 호엔슈타오펜 왕가로 이어졌다.

호엔슈타오펜가의 세 황제(프리드리히 1세-하인리히 6세-프리드리히 2세)와 벨프가의 유일한 황제(오토 4세)에 대해 기록한다.

 

프리드리히 1세 - 하인리히 6세 - 프리드리히 2세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1122~1190 재위 1155~1190

독일왕 1152~1169 이탈리아왕 1155~1190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 2세와 유디트 벨프의 아들이다. 로타르 3세 이후 독일 왕위를 이은 콘라트 3세의 조카이기도 하다.

독일 역사에는 프리드리히 1세가 여럿이 있는 이유로 바르바로사(붉은 수염) 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경우가 더 많다.

1147년 독일왕 콘라트 3세와 제 2차 십자군원정에 동행했으며 왕의 신임을 얻었다. 1152년 콘라트 3세 사망시 아들이 있었음에도 프리드리히를 후계로 지명하였기에 프리드리히는 독일 왕으로 선출되었다.

독일왕은 로타르 3세 → 콘라트 3세 → 프리드리히 1세로 이어졌으며, 콘라트 3세는 황제는 되지 못하였기에 신성로마제국 황제위는 로타르 3세(1133~1137) → 프리드리히 1세(1155~1190) 로 이어졌다.

먼 친척관계인 포부르크의 아델라이데와 결혼했으나 자녀가 없었고 이혼을 하였다.

이탈리아 원정을 통해 1154년 이탈리아의 왕이 되었고, 1155년 신성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했다. 이듬해 1156년 라인날트 3세의 딸이자 상속녀인 부르군트의 베아트릭스와 결혼하여 부르고뉴의 땅 소유하게 되었고, 그녀로부터 8남 4녀의 자녀를 두었다.

프리드리히 1세는 교황 알렉산데스 3세와 대항하였고 1160년 교황의 파문에 대항하여 대립교황 빅토르 4세를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말라리아로 많은 병사들이 쓰러진 틈을 타 교황과 북부 이탈리아 도시들이 함께 프리드리히를 몰아내었고 간신히 독일로 돌아갔다. 1176년 이탈리아로 다시 원정을 떠났지만 레냐노 전투에서 대패하며 교황과 이탈리아 도시들에 유리한 조건으로 평화 협정을 맺었다.

1190년 프리드리히 1세는 강에서 수영을 하다가 죽음을 맞이했는데 당시 군대를 이끌고 있던 중이었고 프리드리히 1세의 죽음으로 독일군은 죽임을 당하고 극히 일부만 돌아올 수 있었다.

왕위는 두번째 부인 베아트릭스의 아들 하인리히가 이었다.

 

 

 

하인리히 6세

1165~1197 재위 1190~1197

독일왕 1169~1197 이탈리아왕 1186~1197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와 베아트릭스의 아들이다. 형 프리드르히가 5살에 요절하며 차남었지만 4살에 독일 공동국왕이 되었고 9살에 아버지의 이탈리아 원정에 동행했다.

1186년 시틸리아 초대 국왕 루제로 2세의 딸 콘스탄차와 결혼했다. 1190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왕위에 올랐으며 1191년 신성로마 제국 황제 자리에 올랐다. 1194년에는 부인 콘스탄차와 함께 공동왕으로 시칠리아 왕을 겸직하게 되었다.

콘스탄차와는 9년만에 외아들 프리드리히를 낳았고, 1197년 하인리히 6세가 말라리아로 사망한 후 콘스탄차가 시칠리아 여왕으로 단독통치를 하였으나 이듬해 사망하였고 시칠리아 왕위는 아들 프리드리히 2세가 이었다.

 

 

오토 4세

1175~1218 재위 1209~1215

독일왕 1198~1209 이탈리아 왕 1208~1212

 

하인리히 사자공과 잉글랜드의 마틸다의 아들로, 신성 로마 제국 로타르 3세의 외증손자가 된다. 또한 외조부는 잉글랜드의 헨리 2세이며 헨리 2세의 어머니 마틸다의 첫 남편은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5세이다. 남편 사망 후 앙주 조르푸아와 재혼하여 헨리 2세를 낳았다.(참으로 복잡하게 얽힌 왕실의 가계도...) 

그리하여 하인리히 5세의 부인의 두번째 남편의 손자가 오토 4세가 된다.

오토 4세는 벨프 가문의 유일한 독일왕이자 신성로마 제국 황제이다.

하인리히 6세 사망 후 1198년 독일 왕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하인리히 6세의 동생 슈바벤 공작 필리프도 유력후보였으나 오토 4세가 독일 왕위를 차지하고, 필리프의 딸 베아트리체와 약혼하였다.

1208년 오토 4세는 그의 자식들이 황제 자리를 세습하지 않는 다는 약속을 하고 선제후들의 지원을 받아 1209년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다음해 교황에게 파문 당하였고 오토 4세 반대파들은 프리드리히 2세를 새로운 독일왕(로마왕)으로 선출했다. 혼란스러운 내전 중 1214년 부빈전투에서 대패하며 황제 자리에서 퇴위되었고 3년 후 사망했다.

 

 

 

프리드리히 2세

1194~1250 재위 1220~1250

독일왕 1212~1220 시칠리아 국왕 1198~1250 예루셀렘 왕 1225~1228

 

하인리히 6세와 시칠리아의 콘스탄차의 외아들이다. 1197년 아버지가 32살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1198년 어머니마저 사망하여 6살의 나이에 시칠리아 왕위에 올랐다. 1196년 프리드리히는 아버지에 의해 독일왕이 되었으나 아버지 사망 당시 너무 어렸기에 첫번째 아내 콘스탄차 다라곤 왕녀와 결혼했으나 사별하였고, 예루셀렘 왕의 외동딸 이사벨과 결혼하였다.1212년 오토 4세가 파문당하며 독일왕으로 선출되었고, 1220년 서임권을 교황에게 양도하는 조건으로 황제 자리에 올랐다. 신성로마 제국 황제 자리에 오르며 독일왕(로마왕) 자리를 아들 하인리히 7세를 물려줬다. 1225년 예루살렘의 왕이 죽고 왕비 콘스탄차와 함께 예루살렘 왕위에 올랐다.프리드리히 2세는 여러 언어에 능통하고 수학, 기하학, 천문학에 관심이 있어 이탈리아 나폴리에 대학을 세우고 팔레르모 궁전 안에 연구소를 세우기도 하였다. 프리드리히 2세는 이집트 왕조와 편지를 주고받고 이슬람 세계와 활발한 교류를 가졌는데 교황 그레고리고 9세는 매우 못마땅해했다. 교황은 프리드리히 2세가 십자군 원정을 회군해서 돌아온 프리드리히 2세를 파문하였다. 프리드리히 2세가 성지 탈환에 성공하며 파문은 철회되었지만 여러 반대 세력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장남 하인리히 7세도 의심을 하며 사이가 멀어졌다. 1234년 하인리히 7세가 반란을 일으키자 프리드리히 2세는 아들을 독일왕에서 폐위시키고 두번째 부인의 아들 콘라트 4세를 독일왕에 앉혔다. 하인리히 7세는 이탈리아에 유폐되었고 얼마 안있어 사망했다.1250년 고열로 시칠리아에서 사망하였으며 그의 죽음에 교황은 크게 기뻐하였다고 한다.프리드리히 2세는 20명이 넘는 자식들을 두었지만 공식적으로는 4명의 부인을 통해 6남 5녀를 낳은것으로 기록되었다. 장남과 차남은 독일왕위에 올랐지만 젊은 나이에 일찍 죽었다. 적자들과 서자들은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여 호엔슈타우펜 왕조는 단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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