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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 왕국의 왕실 가계도 (프리드리히 대왕)

GoodFortune 2022. 10. 17.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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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 왕국은 현재 독일 북부 지역에 위치한 왕국으로 1701년부터 1918년까지 존재했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브란덴부르크와 프로이센 공국과 합하여 프로이센 왕국을 세우고 프르드리히 1세로 프로이센의 왕이 되었다.

 

독일제국은 1871년부터 1918년까지 존속했던 국가이며 현재 독일의 모태이다.

 

제1차 세계 대전 패전으로 재정이 붕괴하고 공화국으로 바뀌고 독일국이라는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프로이센 왕실 가계도

프리드리히 1세

1657~1713 재위 1701~1713

 

프로이센 호엔촐레른 왕가의 초대 국왕으로 부란덴부르크 선제후였다.

브란덴부르크의 프리드리히 빌헬름과 루이제 헨리에테 판 오라녜나사우의 아들이다. 신성 로마 황제 레오폴트를 지지를 받으며 프로이센 공국을 왕국으로 승격시켜 국왕의 자리에 올랐다.

헤센 카셀의 엘리자베트 헨리에테와 결혼하여 루이제 도로테아를 낳았으며 엘리자베트 헨리에테는 4년 후 사망했다. 두번째 결혼은 잉글랜드 조지 1세의 누이 조피 샤를로테와 결혼하여 2남을 낳았다. 프르디르히 1세는 루이 14세의 베르사유 궁전을 본떠 베를린 궁정을 지었다.

두번째 부인 사망 후 1708년 메클렌부르크 슈베린의 조피 루이제와 결혼했으나 자녀를 두지 않았다.

전쟁과 행정에 관심이 없고 낭비벽이 심했는데 아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이러한 아버지 낭비벽을 매우 싫어해 부왕의 사치품을 모두 팔기도 했다.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와 손자 프리드리히 2세는 프로이센을 북부 독일 최강자로 키워나갔다.

 

 

(완) 프리드리히 1세 (오른) 조피 샤를로테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1688~1740 재위 1713~1740

 

브란덴부르크 프리드리히 3세(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1세)와 조피 샤를로테의 아들이다.

1706년 사촌이자 영국 조지 1세와 칠레의 조피 도로테아의 딸 조피 도로테아와 결혼하여 7남 7녀의 자녀를 두었다. (손자녀는 무려 38명을 남겼다)

아버지 사망 후 왕위에 올랐을 때 프로이센은 재정 악화 상태였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아버지의 사치품을 모두 팔았으며 호화로운 국왕의 생활을 지내지 않고 금욕적인 삶을 살았다. 그러나 가부장적이며 권위적이고 거친 성격으로 시종과 시녀, 왕비와 아이들까지 때렸다고 한다. 이러한 성격으로 자식들은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사망 후 딸은 기념하는 연회를 벌이기도 했다.

20년간 경제와 군사 성장을 일으켜 강한 프로이센의 군대를 가졌으며 새로운 세금 제도와 같은 다양한 변화와 개혁들을 소개했다. 1740년 통풍으로 사망하였다.

(완)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오른) 조피 도로테아

 

프리드리히 2세 (프리드리히 대왕)

1712~1786 재위 1740~1786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와 하노버의 조피 도로테아의 아들이다. 첫째형과 둘째형이 요절하여 3남이었음에도 왕세자가 되었다. 아버지는 난폭한 성격으로 아랫사람들을 함부로 대했지만 어머니 조피 도로테아는 반대 성향을 가졌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음악, 예술을 좋아하였는데 이를 반대하던 아버지는 프리드리히 2세를 종종 떄렸다고 한다. 1730년 왕세자 시절 프리드리히는 육군중위 폰 카테의 도움을 받아 가출을 시도했지만 체포되었다. 왕세자 프리드리히 앞에서 카테는 참수당하였고 프리드리히는 감옥생활을 하다 3개월 후 사면 받았다.

1733년 오스트리아 브라운슈바이크-베버른 공 페르디난트 알베르트 2세의 딸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와 결혼했다. 엘리자베트는 용모도 아름답고 성실한 아내였지만 두 사람 사이에 다정한 결혼생활은 없었고 아이도 없었다.

1740년 아버지 사망 후 프리드리히 2세는 왕위에 올랐고 계몽주의적인 개혁정책을 실시했다. 고문 폐지, 언론 검열 폐지, 종교 차별금지를 법으로 제정하였고 오페라 극정 건설을 실행하였다.

1740년 신성로마제국 카를 6세의 죽음으로 프리드리히 2세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지인 슐리지엔을 침공하였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전쟁이 발발했다. 카를 6세가 아들 없이 죽자 딸 마리아 테레지아가 모든 영토와 권리를 상속받은 것에 대한 반발이었고 이날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리드리히 2세는 원수가 되었다. 프리드리히는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7세를 지원하여 그를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 올렸다. 1744년 슐레지엔을 침공하여 승리를 거두었고 1745년 드레스덴 조약을 체결하여 슐레지엔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았다. 이 조약에서 프리드리히는 '대왕'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며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유럽 어디에서도 최고 실권자 대접을 받았다.

1756년 작센 공국을 침공하면서 7년 전쟁이 시작되었고, 여러 위기가 있었지만 1763년 승리를 거두며 오스트리아와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이후 합스부르크 왕조는 힘을 상실하고 신성 로마 제국을 통치할 수 없게 되었다.

1786년 건강이 악화되며 사망하였다. 후계가 없었기에 왕위는 조카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에게 이어졌다.

 

프리드리히 2세의 기마상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1744~1797 재위 1786~1797

 

아우구스트 빌헬름 왕자와 루이제 폰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 부인의 아들이다.

1758년 아버지 사망 후 추정상속인이 되었고, 1786년 삼촌 프리드리히 2세 사망 후 왕위에 올랐다. 그는 삼촌의 치세에 했던 많은 제도를 바꾸었다. 프랑스식 세금 징수 제도를 개혁하고 무역을 장려하며 관세를 줄였다. 또한 독일어 금지를 해제하고 많은 독일 작가들을 환영하였다.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와 결혼하여 1녀를 두었으나 애첩을 두고 문란한 생활을 했다. 아내가 바람을 피우다 임신하고 도망가다 잡히는 사건으로 이혼했다.

헤센다름슈타트의 프레데리카 루이자와 두번째 결혼을 하여 7명의 자녀를 두었다. (두 명의 애첩에게 8명의 사생아가 더 있었다.)

1797년 사망하였고, 왕위는 두번째 아내의 장남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에게 이어졌다.

 

프로이센 왕실 가계도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1770~1840 재위 1797~1840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와 두번째 부인 프레데리카 루이자의 아들이다. 아버지의 문란한 생활을 보고 자라며 아버지에 대한 혐오감이 컸다.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와 결혼한 후 첩을 두지 않았다. 루이제 왕비 사이에서 5남 4녀를 두었으며 왕비 사후 아우구스테 폰 하라흐와 재혼했으나 자녀는 없었다.

제2차 대프랑스 동맹에서 중립을 지켰고, 제3차 대프랑스 동맹에서는 중립을 지키다 동맹국에 가담하며 예나 전투에서 나폴레옹 1세의 프랑스 제국군에게 참패하게 된다.

제 4차 대프랑스 동맹 시기에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와 오스트리아 메테르니히 편에 섰으며 영국, 오스트리아, 프랑스와 대립하였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1795~1861 재위 1840~1861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의 아들이다.

바이에른의 공주 엘리자베트 루도비카와 결혼하였고 1840년 아버지 사망 후 왕위에 올랐다.

1848년 푸랑크푸르트 국민의회가 독일 통일과 민족주의를 주창하며 그를 황제로 추대하였으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그들을 폭도라 생각하며 황제 추대를 거부하였다. 1848년 독일혁명에서 프로이센 군대는 시위대에 발포하며 혁명은 실패로 끝났다.

1858년 뇌졸중으로 동생 빌헬름이 대리청정을 하였으며 후계자가 없었기에 동생이 왕위를 이었다.

 

빌헬름은 독일 제국의 초대 황제가 되었으며 다음 포스팅에서 계속 이어가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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