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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것이힘이다/삼국시대 21

신라 3대 화랑 관창 사다함 김유신

이번에는 3대 화랑 관창 사다함 김유신에 대한 포스팅을 해보겠다. 먼저 신라시대의 화랑은 신라 진흥왕(576년) 때에 인재 선발을 목적으로 만든 조직이다. 초기에 원화로 시작되었는데 여성 우두머리가 낭도를 거느린 조직이었다. 원화인 남모, 준정 사이에 분란이 일어나자 남성을 우두머리로 하여 소년들로 구성된 화랑을 창설하였다. 풍월주, 화랑, 낭두, 낭도 등으로 구성되어 각각의 위계가 있었다. 화랑들의 우두무리가 풍월주인 이유로 풍월도 라고도 하였고, 선도를 따른다 하여 국선도 라고도 불렸다. 대체로 왕과 귀족의 자제로 이루어졌다. 무열왕, 경문왕 등도 화랑 출신이었다고 한다. 무열왕, 문무왕에 이르는 동안 가장 흥왕하였다가 그 후로는 침체의 길을 걸었다. 신문왕 때 김흠돌의 난으로 일시 폐지되었다가 다시..

신라 장군 김유신 업적과 가계도

김유신(595-673)은 신라 화랑의 우두머리였으며 태대각간이었고 신라에 귀순한 가야 왕족의 후손이다. 김유신은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중국 당나라를 물리치며 삼국통일을 이루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6대 진평왕부터 30대 문무왕에 이르는 다섯 명의 왕을 섬기며 신라의 중요 인물로 성장하였으며 신하로서 왕으로 추봉된 유일한 인물이다. 김유신은 무열왕 즉위 및 삼국통일에 기여한 공으로 순충장렬흥무대왕으로 추촌되었다. 김유신의 증조부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10대 국왕 구형왕이으로 김유신은 김수로왕의 12대 손이다. 금관가야 구형왕은 세 아들과 함께 신라에 항복하며 신라의 진골로 편입되었다. 가야에 대한 포스팅은 아래를 참고한다. 2019/09/23 - [아는것이힘이다/삼국시대] - 철의 나라..

철의 나라 가야와 금관가야 왕 계보도 김유신 선조

가야는 지금의 경상도 땅인 낙동강 서쪽에 있던 나라로, 작은 나라가 하나둘 들어서다가 열두 나라가 되었다. 이 열두 나라는 서로 동맹을 맺어 돕기로 하였다. (가야 연맹) 평상시에는 왕이 따로 나라를 다스리다가 큰일이 생기면 하나의 나라처럼 움직였다. 열두 나라 중 김수로왕이 세운 금관가야의 힘이 가장 컸으며, 금관가야가 이끌어 가는 열두 나라를 '가야' 라고 부르게 되었다. 금관가야가 가장 힘이 커진데는 철의 힘이 컸다. 금관가야는 김해에 위치하고 있었고, 철광산이 많이 있었다. 철을 다루는 기술이 발달하여 금관가야 사람들이 만든 철제 농기구와 무기는 아주 뛰어났다. 금관가야의 이름 또한 '쇠를 관리하는 나라' 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금관가야는 왜와 낙랑에 철을 팔고 귀한 물건들을 들여와 서로 다른나..

백제 멸망시기 혜왕 법왕 무왕 의자왕

백제 28대 혜왕(598-599)은 성왕의 차남으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598년 12월 왕위에 올랐으나 고령으로 바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백제 29대 법왕(599-600)은 혜왕의 아들로 왕위에 올랐다. 위덕왕 시절 백제의 장군으로 고구려군과 맞써 싸웠다. 불교를 숭상하여 사비에 미륵사를 짓게 하였다. 법왕도 왕위에 오른 후 얼마 안있어 사망하였다. 법왕의 아들은 30대왕 무왕과 서자인 진이왕이 있다. 무왕을 법왕의 친생자로 보지 않는 견해에서 무왕의 생부로 거론되는 인물 중 하나가 진이왕이다. 일본 도요타 씨와 오우치 씨 가문의 15대 선조로 기록되어 있다고 하며 일본 신찬성씨록과 도요타 씨와 오우치 씨 족보에 의하면 진이왕이 백제 무왕의 아버지로 기록되어 있다. 백제 30대 무왕(600-641)은..

백제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 무령왕 성왕 위덕왕 가계도

백제 22대 문주왕(475-477)은 개로왕의 아들이다. 에는 개로왕의 아들로, 에는 개로왕의 동생으로 기록되었으나 를 따르겠다. 475년 고구려가 한성을 공격하자 태자 문주는 개로왕의 명을 받아 신라에 가서 원병을 요청했다. 신라 군사 1만명과 돌아왔으나 한성은 이미 함락되었다. 그사이 개로왕은 승하하였고 문주왕은 뒤를 이어 즉위했다. 일설에는 개로왕이 죽음을 예견하고 태자 문주를 피신시킨 것이라는 설도 있다. 문주왕은 수도를 한성에서 웅진(공주)으로 옮겼다. 477년 문주왕은 동생인 부여곤지를 내신좌평으로 명하고, 장남 삼근을 태자로 세웠다. 백제의 귀족들 내부 갈등이 심하였던 당시 정권을 장악했던 18대 전지왕의 외척 병권좌평 해구의 쿠데타에 의해 암살당했다. 백제 23대 삼근왕(477-479)은 ..

백제 13대 근초고왕부터 21대 개로왕 가계도

백제의 13대 어라하 근초고왕(346-375)는 11대 비류왕의 둘째 아들이다. 마한 54개 연맹체 중 하나였던 백제국이 차츰 국가의 모습을 갖출 무렵 태어났다. 346년 계왕의 뒤를 이어 왕으로 오른 근초고왕은 마한 54개 연맹체를 통일하여 백제의 전성기를 지낸 왕이다. 에 따르면 366년 백제가 소백산맥을 넘어 가야, 탁순국, 안라 등 가야연맹 7개국을 정벌하고 남쪽으로는 침미다례를 무찌르고 비리 등 4읍의항복을 받았다고 한다. 366년 신라(흘해 마립간)와 동맹을 맺고 368년 명마 두필을 신라에 보내기도 했다. 369년 고구려 고국원왕이 치양성으로 쳐들어왔으나 태자 근구수를 보내 고구려군을 무찔렀다. 당시 고구려로 도망쳤다가 돌아온 백제인 사기가 고구려의 군사정보를 제공하여 태자가 고구려군을 격퇴..

백제초기 어라하 온조왕부터 12대 계왕 가계도

백제의 왕의 칭호는 '어라하'였다. 백제조에 의하면 '왕의 성은 부여씨이고 이름은 어라하라 하는데 백성은 건길지라고 부른다.' 어라하는 한자어로 왕과 같다 백제의 건국자이자 초대 어라하인 온조왕(기원전18~28)는 고구려의 동명성왕과 소서노의 아들이다. 고구려의 왕자였으나 동명성왕의 부인 예씨와 적자 유리명왕이 기원전 19년 부여에서 고구려 졸본으로 오자, 어머니 소서노, 형 비류와 함께 남하하여 비류는 미추홀에 자리를 잡고 온조왕은 위례성에 수도를 정하고 이름을 '십제'라 했다.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 살 수 없어 백성들이 위례로 떠나자 비류는 자결했고 온조는 이들을 받아들인 후 나라의 이름을 '백제'라 하였다. 본래 성은 '해'였으나 그 계통이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 '부여'를 성으로 삼았다...

고구려 왕 계보

고구려는 백제 신라와 함꼐 삼국시대를 구성한 국가로 그 영토가 만주, 한반도 북부, 러시아의 연해주와 몽골 동부까지 걸친 나라로 700년 동안 존재하였다 (기원전37~668년) 5세기 장수왕 때 국호를 고려로 바꾸었으나 왕건이 건국한 같은 이름의 왕조와 구분을 위해 고구려로 통칭되고 있다. 고구려 1대 주몽 동명성왕에서 28대 보장왕에 이르는 왕계보이다. 고구려는 668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였 고구려의 마지막 보장왕의 아들 안승(보덕왕)이 신라에 귀순하여 김씨성을 받았다.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 부흥 운동은 지속되었고 671년까지 당나라에 항전하였다. 698년 고구려 장수 출신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하며 고구려 부흥 운동은 일단락되고 고구려는 발해에 의해 계승되었다.

고구려 마지막왕 보장왕과 연개소문 가계도 고구려의 멸망

고구려 28대 왕 보장왕(642-668)은 평원왕의 손자이자 고대양의 아들이다. 연개소문이 27대 왕 영류왕을 살해하고 보장왕을 왕위에 올랐다. 당시 실권은 연개소문에게 있었으며 연개소문은 스스로 대막리지에 올라 정권을 장악했다. 642년 신라는 백제의 공격으로 대야성을 빼앗겼다. 선덕여왕은 김춘추를 고구려에 사신으로 파견해 구원병을 요청하였으나 연개소문은 거절하였다. 643년 신라는 당에 사신을 보내 원군을 요청하였고, 당시 고구려 침략을 계획하고 있던 당 태종은 신라의 손을 잡았다. 644년 백제와 고구려가 신라를 협공하자 당나라는 고구려와 백제에게 신라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으면 군사를 일으키겠다고 하였고 고구려는 당나라 요구를 거절했다. 645년 당 태종은 돌궐군과 거란군을 동원하여 30만 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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