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대비는 추존왕 덕종의 왕비로 소혜왕후라고도 하지만 인수대비로 더 유명하다. 인수대비는 덕종 도원군의 아내이자 월산대군과 자을산군 성종의 어머니, 연산군의 할머니이다.
며느리이자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를 쫓아내 죽음에 이르게 한 매정한 대비로 기억되고 있는데 이 일로 손자 연산군에게 행패를 당해 불행하게 최후를 맞이했다. 대비로 지내며 '내훈'을 썼는데 여성들을 유교 윤리로 옭아맨 주범으로 비난받기도 한다.
인수대비를 둘러싼 가계도는 아래 그림과 같다.
수양대군의 큰며느리였던 인수대비 한씨는 계유정난을 겪으며 세자빈이 되었고, 세조 대부터 예종, 성종, 연산군에 이르는 4대에 걸쳐 등장한다. 청주 한씨는 당대의 명문이었다. 아버지인 한확은 3남 2녀중 장남이었는데 인물이 뛰어난 것으로 기록되었다. 첫째 여동생은 공녀로 뽑혀 명나라 황실 영락제에게 갔고, 여비로 책봉되었다. 둘째 여동생도 공녀로 뽑혀 영락제의 손자인 선덕제의 공녀로 갔다. 또한 한확의 둘째딸은 세종의 아들과 혼인하여 조선 왕실에서도 영향력이 강했다. 인수대비 한씨는 둘째언니가 세종의 며느리로 들어가던 해인 세종 19년에 한확의 일곱째 아이로 태어났다. 한확은 2남 6녀의 자녀를 두었다.
수양대군은 문종 사후를 대비해 자신의 야심에 힘을 실어줄 가문을 찾았고, 한확의 딸과 자신의 큰아들(덕종)을 혼인시켰다. 한씨는 덕종이 도원군이었을때 혼인하였고, 세조가 즉위하던 1455년에 왕세자빈이 되었다.
내훈에 따르면 '인수대비는 세조가 왕위에 오르기 이전부터 시부모를 모시는 데 밤낮으로 게을리 하지 않았고, 세자빈이 되어서는 더더욱 며느리 된 도리를 다하였다. 몸수 시부모의 음식을 마련하였으며, 좌우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에 세조가 늘 효성스런 며느리라 칭찬하였으며 효부도서 라고 새겨진 도장을 만들어주어 며느리의 효성을 드러내기까지 했다'고 한다. 한씨가 도원군과 혼인했을때 시댁에는 혼인하지 않은 2살 아래 시누이(의숙공주)와 11살 아래 시동생(예종) 이 있었다.
한씨는 단종 2년 첫아들을 낳았고, 그 아이가 월산대군이다. 월산대군을 낳은지 7개월만에 아들과 함께 경복궁의 동궁으로 들어갔다. 세자빈이 된지 몇달 후 첫째딸 명숙공주를 낳았고, 세조 3년에는 둘째아들 성종을 낳았다. 세조는 왕위에 오른 후 후궁을 들이지 않았는데 세자의 후궁을 들이도록 하였다. 세조 2년 윤 소훈, 신 소훈, 권 소훈이 동궁으로 들어왔다.
세조 2년 우의정이었던 한확은 명나라에 갔었는데, 귀국하던 길에 병이 들어 세상을 떴다. 그리고 세조 3년 둘째아들을 낳을 무렵 세자가 몸이 불편했는데, 아들을 낳고 얼마되지 않아 세자가 세상을 뜨게 된다. 남편을 잃은 한씨는 시동생인 해양대군에게 후계자 자리를 넘기고 궐 밖으로 나가야했다. 남편 대신 왕세자가 된 시동생은 세조6년 한명회의 셋째 딸(장순왕후)과 혼인해 다음해에는 아들(인성대군)까지 낳았다.
궐 밖으로 나갈 당시 한씨는 21세의 나이로 큰아들 월산대군은 4세, 딸 명숙공주는 2세, 막내아들 자을산군(성종)은 생후 5개월이었다. 월산대군은 소심하고 병약한 사람으로 묘사되었는데 예종이 승하한 후, 월산대군은 훗날 자을산군과 함께 후계자로 거론되는데 어려서부터 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탈락했다.
한씨는 세조12년 당시 병조참판을 박중선의 큰딸을 며느리로 들였고, 그해에 홍상에게 딸까지 시집보냈다. 그리고 다음해에 자을산군을 한명회의 막내딸(공혜왕후 한씨)과 혼인시켰다. 한시는 자을산군과 함께 허계지라는 사람의 집으로 피접을 갔었는데 하계지의 수양딸이 한명회의 막내딸이었다.
세조 14년(1468) 세조 뒤를 이어 예종이 왕위에 올랐는데, 왕비는 안순왕후 한씨로 한백륜의 딸이었다. 한명회의 셋째딸인 장순왕후는 아들을 낳고 5일만에 죽고, 세조 9년에 아들도 죽었다. 이후 한씨는 소훈의 내명부 직품을 받고 세자를 섬기다가 예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다. 안순왕후 한씨에게는 아들 제안대군과 딸이 1명 있었는데 예종이 왕위에 오른지 1년만에 세상을 떠나자, 제안대군은 세자 자리에서 밀려났다.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이었던 정희왕후(세조의 왕비)는 원자 제안대군은 너무 어리고, 월산대군은 어려서부터 질병이 있었으므로 후계자로 자을산군을 지목했다.
1469년 한씨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이 성종으로 왕위에 오르자, 인수대비 한씨는 왕의 어머니로 입궐하게 되었다. 인수대비 한씨와 안순왕후 한씨는 동서지간인데 인수대비 한씨는 세자빈으로 있다 궐 밖으로 나갔고, 안순왕후 한씨는 아랫동서지만 예종의 왕비였다. 공식 서열로 보면 안순왕후 한씨가 위였다. 신숙주는 한씨의 남편이었던 세자를 왕우로 추숭하자고 하였고, 그러면서 한씨는 왕대비가 되었다.
이때 궁에는 정희왕후, 인수대비, 안순왕후가 있었는데 서열에 따라 대왕대비, 왕대비, 대비로 불렸다.
자을산군은 13세로 어렸기 때문에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는 그중 실세였다. 성종의 왕비인 공혜왕후는 오랫동안 자식이 없었는데 성종 4년에 윤기견의 딸과 윤호의 딸을 숙의로 임명하여 입궁시켰다. 공혜왕후는 열녀전을 읽으며 후궁들이 들어오면 선물을 주었다고 한다. 공혜왕후 한씨는 병이 들어 친정으로 피접을 나가는 일이 있었는데, 호전되어 다시 입궁했지만 성종 5년 19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성종 7년 윤기견의 딸인 숙의 윤씨가 성종의 왕비로 책봉되었다. 윤씨는 평소 검소하고 하는일에 정성을 다하여 세 대비들도 마음에 들어했고, 임신중이었다. 그랬던 윤씨가 연산군이 되는 첫아들을 낳은 후 후궁들을 질투하며 후궁들을 독살하려 하였다. 중전 윤씨는 아들을 낳치 못하게 하는 방법, 반신불수가 되게 하는 방법, 사람을 해치는 방법 등을 적은 방양서책을 숨겨놓고 비상을 넣은 주머니를 성종에게 들켰다. 대왕대비와 인수대비는 교활해진 윤씨를 피해 원자를 피접이라는 명목으로 궐 밖에서 기르도록 하였다. 원자는 2세부터 궐 밖에서 자랐다. 성종 10년 중전 윤씨는 성종과 크게 싸웠고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면서 폐위되었다.
폐위된 후 성종 13년 폐비 윤씨는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후 인수대비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죽기 시작했다. 성종 13년에는 하나뿐인 딸 명숙공주가 죽고, 성종 14년에는 시어머니 정희왕후 윤씨가, 성종 19년에는 큰아들 월산대군이 죽었다. 성종 25년에는 하나 남은 성종까지 승하하면서,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먼저 보냈다. 그러고도 10년을 더 살았다.
성종의 뒤를 이어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후, 연산군은 생모 윤씨를 복위하려 하였다. 연산군 10년 폐비 윤씨를 제헌왕후로 추숭하면서 정 숙의와 엄 숙의를 때려죽였는데, 인수대비가 항의하자 연산군이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받았다. 인수대비는 이 일로 정신을 잃고 쓰러져서 6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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