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것이힘이다/조선역사

세조 왕비 정희왕후 윤씨와 계유정난

GoodFortune 2019. 7. 14.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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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왕후는 조선 7대 임금 세조의 왕비이자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행한 대왕대비였다.

 

정희왕후의 집안에 대해 먼저 살펴보겠다. 친정아버지는 윤번은 고려 우왕 10년에 출생하였고 부인 이씨와의 사이아 3남 7녀를 두었다. 정희왕후는 아홉째였다. 파평 윤씨 집안은 여직족을 몰아내고 9성을 개척한 윤관 장군 이래로 고려의 명문거족이었고, 조선 건국시 윤호가 태조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에서 회군한 공로로 개국공신 2등에 책봉되었다. 태종 이방원은 사위 17명 중 4명을 파평 윤씨 가문에서 맞았다.

 

정희왕후

 

윤번은 음서로 벼슬길에 나아갔지만,과거에 합격하지는 못했다. 음서는 자신의 실력이 아니라 조성 덕에 벼슬을 하는 것이므로 이것만으로는 주류로 행세하기 힘들었다. 윤번은 태종 때 직무를 태만히 하여 태 50대를 맞고 원래의 임소로 돌아가는 처벌도 받았다. 후에도 신천현감으로 재직할 때 부정축재를 하여 파직되었는데 이 후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세종 10년 세종의 아들과 윤번의 딸이 혼인했고, 훗날의 세조와 정희왕후다. 혼일할 당시 수양대군은 12세, 정희왕후는 11세였다. "송와잡설"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수양대군이 혼인하기 전 처음에는 정희왕후 언니와 혼담이 오갔다. 감찰각시가 정희왕후의 집에 가니 이씨 분인이 정희왕후의 언니와 함께 나와서 마주 앉았다. 그 때 정희왕후는 아직 나이가 어렸다. 짧은 옷을 입고 머리를 땋은 정희왕후가 이씨 부인의 등 뒤로 다가왔다. 이씨 부인이 네 차례는 아직 멀었다. 라고 나무라며 들어가게 하였다. 그때 감찰각시가 아이의 기상이 범상치 않아 보통 사람과 비할 바가 아니다. 다시 보기를 청한다 하였는데 감찰각시는 정희왕후를 보면서 끊임없이 칭찬하였고, 왕에게 아뢰어 정혼하게 되었다'

 

세종 가계도

 

수양대군과 혼인한 정희왕후는 20일이 지나 입궐하여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를 보았고, 한동안 궁궐에 머물며 궁궐 법도를 익혔다. 실록에 "시부모를 받들어 섬기는데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음식과 옷가지를 올릴 때는 반드시 몸소 살피는 등 정성을 다하였다. 이 때문에 시부모가 다른 며느리보다 더 사랑하셨다"고 나와있다.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는 첫째 며느리인 휘빈 김씨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세자와 사이가 나빴기 때문에다. 휘빈 김씨는 남편의 사랑을 얻기 위해 요상한 술법을 사용하다가 세종에게 적발되어 세종 1년 7월에 쫓겨났다. 윤씨는 수양대군의 여성 편력에 질투하지 않았다. 수양대군은 왕위에 오르기 전 박팽년의 딸인 근빈 박씨에게 아들 둘을 낳았고, 덕중이라고 알려진 여성에게서도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윤씨가 근빈 박씨나 덕중과 갈등을 빚었다는 기록은 없다. 반면, 순빈 봉씨가 세자빈으로 들어왔으나 여자 문제, 애정 결핍 등의 이유로 세자와 많이 싸웠다. 순빈 봉씨는 술과 동성애로 울분을 달래다 결국 쫓겨나고 말았다. 세종 20년 윤씨는 첫아이를 낳았는데 대군의 부인이지만 궁궐 안에서 해산을 하였다. 이 아이는 세종에게는 첫 손자였다. 3년이 지나 딸을 낳았는데 그때도 윤씨는 궁궐에서 출산했다.

 

 

 

세종 26년 광평대군이 겨우 20세에 죽었고, 한달도 채 안되어 평원대군이 19세의 나이로 죽었다. 소헌왕후 심씨는 몸이 안좋아졌고 1년쯤 후에 요양차 윤씨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으나 보름만에 숨을 거두었다. 조선은 숭유불억을 기치로 내세운 유교 국가였으나 이 시기에 세종과 수양대군, 윤씨 등 왕족은 불교에 심취했다. 소헌왕후가 죽기 전에도 전국의 고승을 윤씨 집으로 불러 정근기도를 올리기도 했다. 세종은 불교에 더욱 빠져들어 경복궁 안에 내불당을 짓기도 했다.

 

세종 30년에 윤씨 친정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남편이 소실을 들이고 아들을 낳자, 윤씨는 더욱 불교에 빠져들었다. 소헌왕후가 죽은 후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가 궁중의 안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는데, 혜빈 양씨의 아들 영풍군이 박팽년의 딸과 혼인했다. 그리고 세종은 박팽년의 또 다른 딸을 수양대군의 소실로 들였다.

 

세종 31년에 건강이 안좋아진 세종은 막내아들 영응대군의 집에 나가 있었는데 건강이 호전되지 않았고 세종 32년에 눈을 감았다. 세종의 뒤를 이어 문종이 왕위에 올랐다. 실록에 따르면 문종 1년에 수양대군의 집에 가마솥이 스스로 우는 일이 있었는데, 이에 찾아온 무당이 '수양대군이 39세에 등극할 징조' 라는 풀이를 했다. 39세면 4년 후에 왕위에 오른다는 말이었다. 문종이 몸이 약했기에 오래 살지 못하리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사람들의 관심은 문종 사후로 모아졌다. 그 즈음 윤씨는 큰아들의 한확의 딸과 혼인시켰는데 큰며느리가 훗날 성종의 어머니이지 연산군의 할머니인 인수대비이다.

 

문종 가계도

 

문종 사후 세자(단종)를 옹위할 핵심 세력은 세자를 보육한 혜빈 양씨, 혜빈 양씨가 낳은 아들 3명 그리고 이들과 혼인한 가문들이었고, 이들이 경계하는 사람은 수양대군과 신빈 김씨의 아들들이었다. 혜빈 양씨와 신빈 김씨는 세종의 후궁들로 양씨는 양반 출신, 김씨는 노비 출신이었다. 소헌왕후 심씨가 승하한 후 두 후궁은 경쟁구도였는데 세종의 원손인 문종의 세자(단종)를 혜빈 양씨가 보육했으므로 신빈 김씨는 주도권 경쟁에서 일찍이 밀려났다. 단종의 생모인 현덕왕후는 순빈 봉씨가 폐위된 뒤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단종을 낳고 3일만에 사망하였다.

 

신빈 김씨는 세종 승하 후 여승이 되었으나 아들들은 세자 옹위 세력들의 견제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훗날 신빈 김씨의 아들 계양군과 익현군은 후에 수양대군이 즉위할때 많은 기여를 했다.

 

문종은 즉위한지 2년만에 세상을 떠나고, 12세의 단종이 즉위했다. 어린 왕이 등장하며 위정부 대신인 황보인, 김종서, 정분 등이 권력을 잡았다. 그들은 수양대군을 견제하기 위해 혜빈 양씨를 입궁시켜 궁중의 일을 주관하게 하였고, 혜빈 양씨는 대비도 왕비도 없는 궁중에서 실세로 부상했다. 그리고 안평대군을 내세워 수양대군과 대립하게 했다.

 

단종 즉위 후 수양대군을 포함한 명나라로 가는 사신 명단이 공포되었는데, 권람, 한명회, 윤씨는 만류하였으나 수양대군은 명나라로 가는것을 결정하였다. 안평대군을 견제하기 위해 김종서의 아들 승규와 황보인의 아들 보석을 데리고 가겠다고 하였다. 수양대군은 섣불리 거사했다가 실패할 위험을 피하고자 확신없는 거사를 피했다. 수양대군은 5개월 후 돌아왔는데 명나라에 동행한 신숙주 등을 자기 사람으로 포섭했다.

수양대군이 없는 조정에서는 집현전 학사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쳤던 정인지가 김종서, 황보인과 대립해 있었고, 수양대군은 정인지의 아들과 자신의 딸을 혼인시켰다.

 

당시 수양대군의 입장에서 그의 마음을 가장 잘 읽은 사람은 한명회였다. 한명회와 권람은 수시로 수양대군의 집에 드나들며 일을 꾸몄다. 수양대군은 무사들을 포섭하는데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감순 홍달손은 당시 한양의 야간 경비를 담당하는 순라군을 감독하는 자리였다. 감순은 약 500명의 순라군을 감시했는데, 한명회와 홍달손은 평소 사이가 좋았다. 한명회는 양정, 유수, 유하 등 궐 안의 내금위 무사들도 포섭했다.

 

 

단종 1년 10월 10일 새벽, 수양대군은 권람, 한명회, 홍달손을 불러 가장 간사하고 교활한자는 김종서라 이르고 가장 먼저 그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했다. 그날 저녁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먼저 죽이고 왕에게 아뢰겠다고 하자, 몇몇 무사들이 반대를 하였다. 왕에게 먼저 아륀 후에 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명회 홍윤성은 먼저 거사하자고 주자했고, 송석손, 유형 등은 왕에게 먼저 아뢰자고 하였다. 논쟁이 길어지자 일부는 달아나기도 했다. 수양대군은 먼저 일어났고, 윤씨는 갑옷을 준비하고 있다가 수양대군에게 입혀주었다. 수양대군은 김종서를 기습 살해하고 홍달손이 장악한 순라군을 동원해 단종이 머물고 있던 행재소를 포위했다. 왕명을받고 행재소로 오던 중신들 중 황보인, 조극관 등 수양대군에게 적대적이었던 사람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안평대군은 귀양에 처해졌다가 사형되었다.

 

수양대군은 영의정, 이조판소, 병조판서 등 조정의 요직을 틀어쥐고 천하를 호령하게 되었다. 정인지는 좌의정, 한확은 우의정에 임명, 권람, 한명회, 신숙주, 홍달손, 홍윤성 등도 요직을 차지하면서 계유정난은 성공했다. 그후 1년 9개월이 지나 혜빈 양씨와 그 소생들도 역모로 숙청되었다. 단종 3년 단종은 상왕으로 물러나고 수양대군은 왕위에 올랐다. 단종의 왕비는 상왕비가 되었고 윤씨는 왕비가 되었다.

 

세조 가계도

윤씨의 큰아들 내외는 세자(덕종)와 세자빈(인수대비)이 되었고, 6세의 작은아들까지 궁으로 함께 왔다. 윤씨의 큰 손자는 훗날의 월산대군인데, 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인 단종 2년에 태어나 얼마 후 경복궁에 들어왔다. 세조의 후궁인 근빈 박씨와, 덕종, 그리고 박씨의 소생 7살 된 덕원군도 함께 입궁했을 것이다. 세조는 왕위에 오른 후 후궁을 새로 들이지 않고 여색을 삼갔다.

 

세조 2년 윤씨의 친정어머니 이씨가 세상을 떠났고, 세조 3년 7월 20세밖에 안된 세자가 몸져 누웠다. 그리고 그 시기에 세자의 둘째 아들이 태어났는데 이 아이가 훗날의 성종이다. 8월에 정희왕후 윤씨와 세조는 며느리와 손자를 궁에 남기고 병든 세자만 데리고 고향집으로 피접을 나갔다. 윤씨와 세조는 스님들을 고향집으로 불러 불공을 올렸는데 9월 2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세자의 큰아들 원자가 1순위였지만 나이가 4세로 어렸으므로 윤씨의 둘째아들인 해양대군이 세자로 결정되었다. 큰며느리와 그 자녀들은 동궁을 해양대군에게 넘겨주고 궐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해양대군이 세자가 된지 3년후인 세조 6년, 한명회의 셋째 딸이 세자빈으로 들어왔다. 세자빈은 다음해에 아들을 낳았으나 산후 5일만에 죽고 2년이 지난 세조 9년에 3세된 원자마저 죽고 말았다. 큰아들과 둘째며느리, 그리고 손자까지 잃은 윤씨와 세조는 큰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고 부처에게 의지했다.

 

세조와 윤씨는 전국의 명산대찰을 유람하며 불교에 의지했다. 세조는 재위 14년째에 세상을 떠나고 둘째아들 예종이 왕위에 올랐지만 재위 1년만인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그리고 딸 의숙공주도 윤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면서 윤씨는 자식들을 모두 먼저 보내게 되었다. 예종이 세상을 떠났을때 윤씨는 큰며느리 한씨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성종)을 후계 왕으로 임명했다. 윤씨는 대왕대비로서 최초로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는데 한명회 등 공신들에게 위임하고 주로 불교에 몰두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성종 14년 2월 대왕대비 윤씨는 두 며느리와 함께 온양 행궁으로 행차했는데, 행차 중에 66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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