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것이힘이다/조선역사

선조 왕비 인목왕후 김씨의 폐위와 인조반정

GoodFortune 2019. 7. 15.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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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목왕후 김씨는 조선 3대 궁중문학의 하나인 계축일기의 주인공으로 유명하다. 계축일기는 서궁에 갇힌 인목왕후 김씨가 광해군에게 갖은 핍박과 설움을 받다가 인조반정으로 해방을 맞는 과정을 그렸다.

 

친정아버지, 동생들, 그리고 하나뿐인 아들 영창대군까지 광해군에게 죽임을 당한 비운의 왕비이다. 계축일기를 통해 추측할 수 있는 인목왕후는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정적, 감상적이고 강직하기보다는 유약한 인물이다. 인목왕후는 광해군의 부인인 왕비에게 죽게 해달라고 애걸복걸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인목왕후 친정아버지인 김제남은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성품이 유약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고 되어있다. 부인인 노씨 부인은 선조 17년에 인목왕후 김씨를 낳았고, 김제남은 당시 10년이 넘도록 과거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후 '난중일기'에 김제남이 의금부도사 자격으로 이순신을 찾아왔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그 사이에 벼슬을 하게 된것으로 추측된다.

 

 

선조의 왕비인 의인왕후 박씨가 아들을 낳지 못하는 바람에 선조는 재위한지 25년이 넘도록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임진왜란으로 어쩔 수 없이 세자를 공빈 김씨가 낳은 광해군으로 결정하였다. 선조와 세자 광해군의 관계는 임진왜란 중 나빠졌다. 선조의 열등감과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광해군은 전선을 누비며 군사들을 격려하고 인심을 안정시켜 신망을 얻었다.

 

선조는 임진왜란 때에 한양을 포기하고 요동으로 망명하려 했던 사건으로 국왕의 권위에 치명상을 입고 열등감에 시달려 세자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선조 33년 의인왕후 박씨가 갑작스럽게 죽으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젊은 선조가 다시 왕비를 들일 것이고, 아들을 낳으면 세자 자리가 바뀔 수도 있었다. 세자는 후궁 소생인데다 생모인 공빈 김씨가 죽고 없었고, 명나라의 승인을 받지 못한 상황이었다.

 

왕후의 소상이 끝나자마자 왕비를 들이겠다 하였고, 처녀 간택이 시작되었다. 아무리 왕이라 해도 세자가 있는 상황인지라 왕비 간택 이후가 걱정이 되는 상황에 양반들은 걱정이 되었다. 김제남 김씨의 딸인 인목왕후는 당시 18세였으므로 간택 단자를 내야 할 대상자였다. 최종 왕비 간택을 앞드고 신료들은 명나라에 세자 책봉을 위한 사신을 보내자고 요청하였으나 선조는 국모를 바르게 세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며 신료들을 질책했다.

 

 

선조 35년 인목왕후 김씨와 선조가 혼인을 하였다. 인목왕후는 1남 1녀를 얻었는데 딸은 정명공주, 아들은 영창대군이다. 인목왕후는 19세의 나이로 51세의 선조의 왕비가 되었는데, 나이 많은 선조의 후궁들의 견제를 받았다. 또한 광해군과 세자빈의 경우, 세자가 김씨보다 9세가 많았고, 세자빈 유씨도 시어머니보다 11세나 위였다.

 

 

김씨에게 적대적인 사람은 우선 선조의 후궁들이었다. 선조는 공빈 김씨, 인빈 김씨, 순빈 김씨 등 많은 후궁을 들였는데 공빈 김씨는 광해군의 생모로 선조 10년 세상을 떠났고, 인빈 김씨는 인목왕후 김씨에게 호의적이었다. 인빈 김씨는 공빈 김씨가 떠난 후 선조의 사랑을 받는 후궁이었다. 인빈 김씨는 아들 4명과 딸 5명을 낳았는데 선조의 사랑도 임해군과 광해군에서 인빈 김씨가 낳은 아들들에게로 옮겨갔다. 그로 인해 임해군과 광해군은 임빈 김씨와 사이가 좋지 않았을 것이다. 인빈 김씨는 인목왕후 김씨를 반겼고, 인목왕후의 남동생에게 외손녀를 시집보냈다. 훗날 인빈 김씨의 소생인 3남 정원군(원종)의 아들인 능양군이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이다.

 

선조는 재혼한 후 광해군을 더욱 심하게 냉대하며 만나려고 하지도 않았다. 인목왕후 김씨는 어리고 경륜도 부족했다. 또한 정치적이지도 못해서 선조를 휘어잡지도 못하고 후궁들을 장악하지도 못했다. 세자 광해군에게 호의를 얻지도 못했다. 김씨는 입궁한 후 정확히 10개월만에 정명공주를 낳았는데, 계축일기에 따르면 광해군의 장인인 유자신이 왕비마마를 놀라게 하여 낙태시키려 하였다고 했다. 대궐에 돌팔매질도 하고, 대궐 사람들을 꾀어 궁녀들의 측간에 구멍을 뚫고 나무로 쑤셔대게 하기도 했다. 그리고 김씨는 둘째 공주를 낳았는데 사산하였다. 선조 39년에 운명의 아들 영창대군을 낳았다.

 

계축일기에 따르면 유자신은 집에서 머리를 싸매고 누워 자나 깨나 왕비마마와 대군 아기씨를 모해하려는 계책만 꾸몄다고 한다. 그러나 아들이 태어난지 2년도 되지 않아 선조가 세상을 떠났다. 김씨 나이 25세에 6세된 딸과 3세 된 아들 딸린 대비가 되었다.

 

화정의 영창대군과 정명공주

 

선조 40년 선조의 병이 악화되어 선조는 세자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는데, 유영경을 비롯한 대신들이 반대했다. 이때 세자 측에서는 왕위를 물려주려다 취소하자 정인홍을 사주하여 선조의 전위를 막은 유영경을 맹렬하게 비난하는 상소를 올리게 했고, 뒤이어 유영경의 반반 상소가 잇따랐다. 왕위를 놓고 정쟁이 심해진 그때 선조 41년 2월 선조는 갑작스럽게 승하하였다. 오전 일정도 아무 문제없이 처리하고 점심도 잘 먹은 선조의 갑작스러운 죽음 탓에 독살 의혹이 돌기도 했다. 계축일기에 따르면 선조대왕께서 돌아가신 그때에 약밥인지 고물인지를 잡수시고 갑자기 구역질을 하시다 위급해지셨다고 되어 있다.

 

선조가 승하하던 날 세자는 대비 김씨에게서 옥새를 건네받고 다음날 곧바로 왕위에 올랐다. 세자에게 전달된 유서에는 '동기 사랑하기를 내가 살아 있었을 때처럼 하라. 참소하는 사람이 있거든 신중히 생각하고 듣지 말라. 이로써 너에게 부탁하니 꼭 내 뜻을 잊지 말길 바란다'라고 쓰여있었다. 또한 대신들에게 전달된 유서에는 '영창대군이 어리고, 자라는 것을 보지 못하니 이것이 걱정스럽다. 내가 죽은 후에 일어날 인심을 헤아리기 어렵다. 만약 사설이 있다면 공들이 사랑으로 보호하여 붙들어주기를 부탁한다' 고 쓰여 있었다.

 

대신들에게 전달된 유서를 보고 광해군은 선조가 자신을 믿지 못한것에 불쾌함을 느꼈고, 인목왕후와 영창대군은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때 인빈 김씨의 사위인 서경주(인목왕후의 남동생의 장인)은 영창대군을 광해군의 의혹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소경으로 만들자고 하였으나 김제남은 따르지 않았다. 인목왕후 김씨는 영창대군을 보호하기 위해 주변의 권력자들을 끌여들였고 광해군은 점점 더 불신하게 되었다.

 

화정의 광해군

 

2019/07/09 - [여러가지 정보] - 광해군과 영창대군

 

광해군 5년 살인강도범 박응서를 체포하였는데, 박응서는 자신은 역모를 획책한 역적이었다는 고변서를 올렸다. 7년 전부터 역모를 꾸몄다 하고 300명을 모아 대궐을 기습해 옥새를 탈취하고 대비전에 수렴청정을 요청하고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고 진술했다. 이에 서양갑이 우두머리라 하였고, 광해군은 서양갑을 잡아들여 고문하였는데 완강하게 부인했다. 광해군은 서양갑의 어머니와 형을 잡아다 고문했고 서양갑의 어머니와 형이 고문을 받다 죽었다. 서양갑은 그날 밤 함께 갇혀있던 사람들에게 말하길 '내가 앞으로 온 나라를 뒤흔들어 어미와 형의 원수를 갚겠다'고 하였다. 결국 서양갑은 역모 혐의를 시인했고 대비 김씨, 영창대군, 김제남까지 연루시켰다. 그날로 김제남, 김씨의 오빠 래, 남동생 규, 선이 체포되었고 김제남은 사약을 받았다.

 

이때 인목왕후는 영창대군을 내어놓겠으나 아버지와 오빠, 남동생을 놓아달라 애원하였으나 광해군은 김제남을 처형하였다. 박응서 사건을 '계축옥사'라고도 한다. 사헌부와 사건원에서는 영창대군을 죽이라는 상소가 올라왔고 광해군은 시간을 끌다가 영창대군을 폐서인으로 강등시키고 출궁시켰다. 당시 8세밖에 안된 영창대군은 강제 출궁되어 도성의 여염집에 구금되었다. 그 후에도 영창대군을 죽여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치자 광해군은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위리안치키셨고 다음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실록에는 '음식을 넣어주지도 않고, 방 안에 가두고 불을 때어 뜨거워 눕지도 못하게 하자 영창대군이 창살을 부여잡고 밤낮으로 울부짖다가 기력이 다하여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씨를 폐하자는 논의는 계축옥사에서 제기되었는데, 박응서가 "대비전에 나아가 수렴청정을 요청하려 했으며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고 진술했을 때 대비는 역적의 수괴로 낙인찍혔다.  성균관 학생 이위경 등이 상소를 올렸으나 광해군은 대비를 폐하지 않았다. 이후 박동량이 박응서 사건과 관련해 조사를 받았는데 그는 "대군 궁방의 사람들은 선왕께서 병환에 시달리게 된 이유를 의인왕후 박씨에게 돌리면서, 하인 수십 명이 요망한 무당들과 함께 유릉에 가서 저주하는 일을 대대적으로 벌였다고 합니다" 라고 언급했다. 대군 궁방이랑 영창대군의 방이며, 영창대군의 하인들이 의인왕후의 능에서 저주의 굿판을 벌였다는 말이고, 이를 사주한 사람은 대비 김씨라는 해석이었다. 고문을 견디지 못한 몇몇 궁녀들은 대비 김씨가 광해군도 저주했다고 자백했다.

 

 

신료들의 폐모론을 주장하는 상소가 계속 되었지만 광해군은 시간을 끌어가면서 상소를 들어주었다. 광해군 10년, 광해군은 백관들이 대비 김씨를 만나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대비라 부르지 말고 서궁으로 부르라 명하였다. 대비를 후궁으로 강등해 처우하는 규정을 만들었는데, 폐비절목이 그것이다. 인목대비는 서궁에서 죽음 같은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광해군은 폐모론을 앞세우는 신료들의 의견에 따라 대비를 폐위시켰다고 생각했지만, 인조반정을 준비한 반정의 주체들은 '폐모살제'라는 명분을 내걸었다. 어머니를 폐위시키고 동생을 죽인 광해군을 폐륜아로 규정했다.

 

광해군 15년 인조반정이 거사되었고, 창덕궁을 장악한 능양군(인조)은 군사들을 서궁으로 보내 대비 김씨를 모셔오도록 하였다. 대비 김씨가 꼼짝도 하지 않자, 능양군이 직접 서궁을 찾아갔다. 이때 대비 김씨는 광해군 부자의 머리를 먼저 가져오라 능양군에게 말했는데, 능양군이 감히 받들지 못하겠다고 하였고, 다음날 대비는 광해군을 폐위하고 능양군을 왕으로 삼는다는 교서를 정식으로 공포했다. 폐위되었던 인목대비는 대왕대비가 되어 입궐하였고 광해군은 군으로 강등되어 제주도에 위리안치되었다. 이후 광해군은 18년이나 감금되었다가 삶을 마감했다.

 

 

인조반정 당시 대왕대비 김씨는 40세였다. 대왕대비는 광해군 모자를 죽이고 살점을 씹겠다 라고 말했을만큼 원한이 깊었다. 광해군 세자는 사사되었고 세자빈은 바다에 투신자살했다. 광해군의 왕비도 목을 매 자살했다. 대왕대비 김씨는 하나 남은 딸인 정명공주의 혼인에 정성을 쏟았는데 인조반정이 일어난 21세까지 혼인을 못하고 있었다. 인조 1년 사위를 간택하여 홍주원이 선발되었고, 이후 김씨는 이들 부부를 의지하며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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