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경왕후 민씨는 조선의 3대 임금 태종(태조의 5남)의 왕비이다. 조선시대에는 부계가 중요했지만, 고려 말에는 모계도 중요했었다. 민씨의 외가는 친가보다 더 대단했던 가문이다. 원나라 간섭기에 고려 왕실과 원나라 황실에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민씨 외할아버지 송선은 최씨 무신정권의 마지막 주자였던 임유무를 처단하고 무신정권을 끝냈던 송송례의 증손자이다. 무신정권이 끝난 후, 고려 왕(충렬왕)이 원나리 황제의 사위가 되어 고려는 부마국이 되었다. 그러나 충렬왕과 충선왕이 왕위를 놓고 다툼을 벌일 때 송씨 가문은 철저히 충렬왕 편을 들었고, 후에 충선왕이 왕위에 오르며 노비가 되었다. 그러나 송씨 가문은 원나라와 관계가 두터웠는데 기황후의 증조할아버지인 기홍영의 사위가 송송례의 송염이었다.
(관계가 복잡하니 관계도를 그려본다)
기황후는 원나라에서 권력을 잡은 후 친정의 3대 조상을 왕으로 추증했는데 아버지 기자오, 할아버지 기관, 증조할아버지 기홍영 모두 왕이 되었다. 왕의 사위가 된 송염은 면천되었다. 원경왕후 민씨의 아버지 송선의 둘째딸은 원나라 황제의 후궁으로 들어가기도 했는데, 이렇게 왕비 민씨의 외가는 기황후의 인척이었다. 3대가 한 순간에 노비로 추락했다가 천운으로 면천된 가문이었다. 그러나 신진사대부들은 송방영과 왕유소를 간신으로 평가했는데, 그들이 보기에 왕비 민씨의 외가는 "한때 노비였던 가문" "반역자의 가문"에 지나지 않았다. 태종도 처가의 배경을 자랑스럽게 여겼을 리 없다. 공식기록에는 민씨의 외가인 송씨 가문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고, 왕비 민씨의 친정어머니 이름만 송선의 딸이었다고 기록했다.
왕비 민씨의 친가는 고려 말 신진사대부 가문 중 대표적인 명문가였다. 충선왕은 고려 왕실의 족내혼을 금하면서 왕실과 혼인할수 있는 가문을 선정해 공포했는데 그 속에 여흥 민씨 가문이 있었다. 고려 왕실이 족내혼을 금지한 것은 고려 왕이 부마가 되자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에다. 원나라 공주를 제1왕비가 되어야 했기에 족내혼은 폐지되었다. 아무 가문에서나 왕비를 들일 수 없었기에 왕비가 될 수 있는 열다섯 가문을 선정했다.
사대부 가문인 민씨와 기황후의 인척인 송씨가 어떻게 혼인을 하게 된데에는 민씨 가문의 명예와 송씨 가문의 돈과 권력의 결합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왕비 민씨는 공민왕 14년 송씨부인의 둘째딸로 태어나 18세가 되도록 시집을 안가고 있었는데, 우왕 8년 당시 민제는 성균관 사성을 맡고 있었고, 이방원은 성균관에 입학했다. 이방원은 민제와 학생과 스승으로 연을 맺었고, 이방원과 민제의 딸은 혼인을 올렸다. 민씨 부인은 혼인 후에도 당시 풍습대로 친정에 살다가 혼인한지 3년만에 첫 딸을 낳았다. 이방원은 17세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영기가 대단했던 것으로 기록된다. 무장 이성계는 이방원의 과거 합격을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정치적, 사회적으로 지위가 올라가면서 문인, 학자들과 어울렸으나 이성계는 무인이었기에, 아들 이방원의 과거 합격이 더욱 뿌듯했을 것이다.
이방원은 위화도 회군 이후 아버지를 도와 정치에서 열심히 하여 집안일에는 무심하였다. 그러던 중 두딸에 이어 첫아들을 보았으나 요절하고 말았다. 이방원이 정몽주를 암살했을 시기에 민씨는 둘째아들을 낳았는데 또다시 요절하였다. 공양왕 3년에 이방원의 생모인 한씨가 세상을 떠나자 이방원은 3년상을 치르겠다며 개경을 떠났다. 하지만 이성계가 낙마하여 크게 다치는 바람에 강씨에 의해 다시 개경으로 올라왔다. 이방원은 아버지를 왕으로 세우기 위해 어떤 악역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조선 건국후 철저히 배신당했다. 강씨는 이방원이 아닌 자신의 아들 방석을 세자로 앉혔다. 정안군이 된 이방원은 정치에서 외면당했고, 그 즈음 민씨는 세번째 아들을 낳았지만 요절했다. 태조 3년 네번째 아들을 낳았는데 다행히 살아남았고, 훗날 양녕대군이 된다. 2년 후 또 아들을 낳았고 훗날 효령대군이 된다.
태조 5년에 왕비 강씨가 죽자 정도전이 강씨의 빈자리를 차고 들어앉고, 정안군 이방원은 더 위험해졌다. 이방원은 정치에서 몰려 집에서 주로 시간을 보냈는데 민씨는 곧바로 셋째 아들을 낳았고, 훗날 세종대왕이다. 세종실록에 태종이 기록하기를 "정축(태조6)에 지금의 주상(세종)이 태어났다. 그때 정도전의 무리가 나를 꺼리며 용납하지 않던 형세였다. 나는 곧 죽임을 당할 것이라 생각하여 늘 울적하고 할일도 없어 무료했다. 나는 대비(민씨)와 번갈아가며 갓난아기를 안기도 하고 업어주기도 하며 무릎에서 뗴어놓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 아이를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끔찍이 사랑하게 되었다" 라고 했다.
태조 7년 정안군은 정도전을 죽이기로 결심했다. 민씨가 미리 준비한 무기해 놓았는데 민씨는 이때부터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민씨의 친정 쪽 사람들이 도움이 되었다. 정안군은 형인 방의(3남)와 방간(4남), 매제인 이백경, 이숙번 등을 모았고, 정도전, 남은 등을 죽였다. 왕비 강씨의 두 아들과 사위도 죽였다.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서 물러나고 정안군의 둘째 형 방과가 왕위에 올랐다. 조선 2대 임금 정종이었다. 이 사건을 제1차 왕자의 난이라 불렀다.
정종1년 민씨는 큰 사위를 이백강을 맞았다. 이백강은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운 이백경의 동생이었다. 정안군 이방원이 실세가 되자 가장 먼저 조박이 도전장을 내밀었는데 조박은 정안군의 동서이다. 조박은 집안의 누이동생 유씨를 수소문했는데, 유씨는 정종과 함께 살다 헤어져 다른 사람에게 시집갔는데 10세쯤 된 아들이 있었다. 조박은 유씨와 아들의 소식을 정종에게 알리고 정종은 이들을 찾아오게 한다. 정종은 유씨를 후궁으로 아들을 원자로 삼았다. 정종의 공식 후계자가 정종의 아들이 된 셈이다. 정안군은 정종과 조박에게 다시 한번 배신당한 꼴이 되었다.
원자가 입궁한지 2개월이 채 안된 정종 2년에 조박의 아들 신언과 이성계의 넷째아들 방간의 큰딸을 혼인시키라는 명을 내렸다. 조박은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방간의 딸을 며느리 삼았고, 이후 민씨의 사돈인 이거이와 이백경을 모함하려 하였으나 정종은 조박을 귀양보냈다. 조박과 사돈을 맺은 방간은 정안군의 목숨을 빼앗을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는데, 정종 2년 방간이 군사를 이끌고 정안군을 공격했다. 정안군은 사전에 정보를 입수해서 먼저 공격하였고, 싸움에서 이겨 방간을 포로로 붙잡았다. 이 사건이 제 2차 왕자의 난이다.
다음날 정안군은 세자가 되어 공식적으로 정종의 후계자가 되었다. 그리고 9개월 후 정종에게 양위받아 정안군은 조선 3대 임금 태종이 되고 민씨는 왕비가 되었다. 민씨는 무력 정변에 필요한 무기를 준비했고 사람들을 모아 태종을 일으켜 세워 나가 싸우도록 한 주역이었다. 그러나 태종은 왕이 된 후 민씨가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했고, 민씨의 친정 세력을 줄여나갔다.
태종은 왕이 된 후, 법을 만들어 합법적으로 후궁을 들였다. 태종 2년 권홍의 딸을 후궁으로 맞아들였고, 중전 민씨의 몸종이었다 태종의 부름을 받아 쫓겨났었던 김씨 아이도 불러들였다. 그 후에도 계속해서 후궁이 입궁했다. 그러던 중 중전 민씨의 몸종이었던 김씨가 태종의 아이를 출산하게 되었다. 이때의 기록을 찾아보면, '김씨가 입궁하자 민씨는 그 아이를 잡아다 친정 행랑방에 가두었고, 12월 한겨울 태동이 시작되자 문밖 다듬잇돌 옆에 내다두게 하였다. 얼어 죽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담에 서까래 두어 개를 걸치고 거적으로 덮어서 겨우 바람과 해를 가리게 하였다. 아들을 낳았는데 원윤 이비가 그 아이였다. 민씨는 김씨와 아이를 벌개의 집 앞 토담집에 옮겨두었고 이불과 요를 빼앗았다. 7일이 지나도록 모자가 얼어 죽지 않자 민씨는 김씨의 아버지와 언니에게 모자를 데려가게 하였다.' 와 같이 태종실력에 실려있다.
그때의 김씨는 훗날 효빈 김씨이고 아들은 경녕군이었다.
태종 6년 태종은 갑자기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겠다고 했는데, 신하들은 모두 반대하였고 9일만에 명령을 거두었다. 태종 7년에 영의정 이화 등이 상소를 올려 태종이 전위하려 했을 때 왕비 민씨의 동생들인 민무구와 민무질 얼굴에 기뻐하는 빛이 나타났다 하였다. 수많은 증인이 나서 동조하였고 민무구와 민무질은 유배에 처해졌다. 왕비 민씨는 3개월 후 민무질의 부인을 몰래 불러 의논하였는데, 이 일로 태종은 음모를 알아채고 왕비 민씨를 두고 경복궁으로 옮겨갔다. 민무구와 민무질은 자진에 처해졌다.
태종 15년 경녕군 생일이 하루 지난날, 태종은 13년 전에 왕비 민씨가 효빈 김씨와 경녕군을 죽이려 했던 일을 꺼내어, 왕비 민씨와 남은 동생들인 민무휼, 민무회를 왕의 아들을 죽이려 한 불충하고 잔인한 사람들이라 비난했고, 민무휼과 민무회도 역모로 몰려 죽었다. 이렇게 민씨의 친정은 멸문되다시피 했다.
태종 18년 왕비 민씨의 막내아들 성녕대군이 죽자, 민씨는 하루하루를 눈물로 보냈다. 성녕대군이 죽고 4개월 후 태종은 세자를 쫓아내고 셋째 아들 충녕대군을 세자로 지명했다. 2개월 후에는 태종은 왕위를 셋째 아들에게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다. 대비가 된 민씨는 궁궐에서 나와 불심에 기대어 여생을 보냈다. 큰아들 양녕대군은 가끔 그를 찾아왔고, 셋째 아들은 정성으로 효도했다. 민씨는 세종 2년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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