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것이힘이다/조선역사

사도세자 장조왕비 혜경궁 홍씨

GoodFortune 2019. 7. 15.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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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정조의 생모, 그리고 한중록의 작자로 유명하다. 혜경궁 홍씨는 남편 사도세자의 비극을 방조하여 냉혹하다는 평과, 정조와 같이 훌륭한 아들을 키워낸 좋은 어머니라는 상반된 이미지를 함께 갖고있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사도세자는 정신병자였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고, 그런 남편을 견디면서 아들을 잘 키워낸 것으로 기록했다. 하지만 반대의견으로는 한중록을 정치적 목적에 의해 쓰여졌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혜경궁 홍씨는 영조 11년 한양에서 셋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홍봉한, 어머니는 이씨 부인이다. 홍씨의 친정인 풍산 홍씨는 당대 노록을 대표하던 명문 가문이었다. 노론이라는 가문 배경은 홍씨의 일생을 따라다녔다. 노론은 서인에서 파생된 당파로, 선조 대에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면서 당쟁이 본격화되었고, 서인이 인조반정에 성공하면서 서인이 승리했다. 홍씨의 5대 조상은 인목대비의 유일한 사위인 홍주원인데 인조반정 성공 후 홍주원은 서인 중에서도 핵심이었다. 홍주원의 아들 홍만용은 장원 급제 후 노인으로 활약했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이 중앙 정계를 장악했는데,서인 내부는 주도권을 놓고 분열되었다. 송시열과 그의 제자 윤증의 갈등에서 시작되었는데 송시열 편에 섰던 사람들이 노론, 윤증 편에 섰던 사람들이 소론이었다. 서인들 중 원로급들이 노론이 많았고, 젊은 사람들은 소론이 많았다.

 

영조 가계도

 

영조 19년 영조는 세자의 혼인을 위해 금혼령을 내리고 처녀 간택을 했다. 초간에는 약 100여명의 처녀들이 참여했으나 홍씨는 이미 세자빈으로 내정되어 있었다. 한중록에서는 사도세자의 생모인 선희궁과 사도세자의 누나인 화평옹주가 미리 불러서 예절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다. 홍씨는 삼간택을 거쳐 세자빈으로 결정되었다. 홍씨는 별궁에서 50일을 머무르며 중중 법도를 배웠다. 영조 20년 세자와 홍씨는 혼인을 했고, 창덕궁에 들어갔다. 그때 둘다 10세밖에 되지 않은 미성년이었으므로 한동안 각자 따로 자야만 했다.

 

 

 

홍씨가 세자빈으로 입궁했을때, 숙종의 세번째 왕비인 인원왕후와 영조의 왕비 정성왕후 서씨, 그리고 효장세자의 부인인 현빈 조씨가 있었다. 이들 셋은 자녀가 없기에 홍씨를 손녀 혹은 딸처럼 예뻐했다. 세자의 생모인 선희궁도 세자빈이 된 홍씨와 잘지냈다. 또한 세자의 누나였던 화평옹주도 홍씨의 든든한 편이었다.

 

혜경궁 홍씨

 

영조 24년 화평옹주가 난산 끝에 죽었는데 영조의 편애를 받던 화평옹주가 죽으면서 세자와 세자빈은 든든한 후원자를 잃게 되었다. 화평옹주를 잃고 영조는 옹주의 집으로 행차하여 통곡하며 밤을 지새울 정도로 슬퍼하였는데, 영조는 이복형 경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되면서 그가 경종을 독살했다는 유언비어가 널리 퍼져 있었다. 영조 4년에는 경종의 복수를 한다며 이인좌가 무력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고, 첫째아들 효장세자와 4명의 딸들도 독살되었다. 이런 상황을 뚫고 살아남은 화평옹주에 대한 영조의 사랑은 컸으며 화평옹주의 죽음 이후 영조는 병석에 눕는 일이 잦았다.

 

세자빈 홍씨는 15세가 되어 세자와 합방을 하게 되었는데, 합방을 얼마 앞둔 어느날 새벽 3시에 영조가 느닷없이 선위교서를 내렸다. 성년이 된 세자에게 왕위를 넘기겠다는 것이었다. 이전에도 이런일이 있었기에 대신들은 영조의 선위교서를 취소하라고 요구했고, 세자는 문 밖에 꿇어 엎드려 통곡하며 취소해 줄 것을 요청했다. 영조와 대신들은 한발씩 물러나 세자가 대리청정을 하기로 합의했다.

홍씨는 합방 후 10개월 후에 임신을 하였고 다음해에 첫째아들 의소세손을 낳았다. 영조에게는 첫 손자였는데 영조는 기뻐하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의소세손은 3세가 되던 3월에 세상을 떠나고, 그해 9월에 둘째아들을 낳았다. 이 아들이 훗날의 정조다.

 

영조는 화평공주를 예뻐하듯, 큰며느리인 현빈 조씨를 예뻐했는데 영조 27년에 현빈 조씨가 세상을 떠났다. 그후 궁에서 현빈 조씨의 궁녀 문씨를 만났고, 궁녀 문씨는 임신까지 했다. 궁녀 문씨는 세자를 모함하기 시작했다. 세자는 이즈음부터 영조에게 반항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영조 33년에는 인원왕후 김씨와 정성왕후 서씨가 연이어 승하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홍씨와 세자를 예뻐하던 대비와 왕비가 떠나고, 영조와 세자는 직접 충돌하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영조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 세자를 질타했고, 세자는 죽어버리겠다며 우물에 뛰어드는 소동까지 벌였다. 뿐만 아니라 세자는 사람을 죽일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다.

 

세자빈 홍씨는 '화증이 더하여 사람 죽이기를 시작하오니, 그때 당번 내관 김한채를 먼저 죽여 그 머리를 들고 들어오셔서 궁녀들에게 효시하오니 내가 그때 사람의 머리 벤것을 처음 보았다' 라고 하였다. 내관 김한채를 죽인것은 자신의 행동을 문씨나 영조에게 밀고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해에 영조가 세자의 살인 행각을 알게 되었고, 영조가 세자에게 왜 그랬는지 이유를 묻자 "마음에 화증이 나면 견디지 못해 사람이나 짐승을 죽여야 마음이 풀어지기에 그랬습니다. 사랑하지 않으시니 서럽고, 꾸중하시니 무서워서 화가 되어 그렇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세자는 다중인격자처럼 멀쩡한 사람이었다가 화가 나면 살인을 저지를 정도로 다른 사람이 되었다. 영조 38년부터 세자는 영조가 없는 곳에서 못할 말을 하기 시작했는데, 칼로 영조를 찔러 죽이고 싶다는 표현을 하였다. 세자빈 홍씨는 어머니인 선희궁에게 세자의 근황을 자세히 알렸다. 선희궁은 "차라리 세자의 몸이 없는 것이 옳겠소. 삼종혈맥이 세손꼐 있으니 천만번 사랑하여도 나라를 보전하기는 이 수밖에 없겠소"라고 했다. 즉, 세자를 포기한다는 말이었다.

 

영조와 사도세자

선희궁은 영조에게도 직접 찾아가 세자의 근황을 고하였고, 세손을 건져 종묘사직을 지키기를 고하였다. 훗날 영조가 직접 쓴 선희궁 묘표에는 '임오년의 일에 미쳐서 종묘사직이 능히 편안하고 세신군민이 능히 보존된 것은 실로 선희궁의 공덕이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세자는 한여름 뒤주에 들어가 갇혔다. 세자가 뒤주에 들어가는 날 세자는폐서인이 되었으므로 홍씨는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나가야 했다. 세자가 갇혀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창경궁에 머물러 있는 영조와 선희궁은 세자의 울부짖음을 들었을 것이다. 창경궁에 머물던 영조는 19일에 경희궁으로 옮겨갔고, 20일에 세자는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세자의 죽음 후에 세자의 위호를 회복하고 사도세자라 이름 지었는데, 사도세자가 복위되면서 다시 입궁했고, 살아있는 세자의 부인이 아니므로 세자빈이 아닌 혜빈으로 불렸다. 영조는 왕비 서씨가 세상을 떠난 후 환갑을 훨씬 넘은 66세에 15세의 어린 왕비를 새로 맞이했는데 홍씨는 열살이나 어린 왕비를 시어머니로 모시게 되었다. 사도세자가 죽었을때 영조는 69세, 정순왕후는 18세, 홍씨는 28세, 선희궁은 67세였다. 영조의 나이로 보았을때 왕비가 아들을 낳을 가능성은 없었고, 후계 구도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새 왕비가 후계를 결정하게 되었기에 홍씨는 아들에 대한 걱정이 많았다.

 

영조는 홍씨가 재입궁한 후 3개월이 지나서야 영조를 대면할 수 있었다. 혜빈 홍씨는 남편을 죽인 시아버지에게 원망과 비난 대신 고맙다고 인사하며 세손을 경희궁으로 데려가셔서 가르쳐달라 하였다. 홍씨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떠나보냈으나 영조의 사랑을 독차지 하게 되었으니 홍씨에게는 좋은 결정이었다.

 

정조 가계도

당시 홍씨의 시누이인 화완옹주가 궁에 들어와서 살았는데 남편을 일찍 여읜 데다 자녀고 없어서 영조는 궁궐로 들어와 살도록 하였다. 영조는 화완옹주를 몹시 총애했고, 화완옹주는 자식이 없어선지 세손을 예뻐했다. 화완옹주는 혜빈 홍씨에게서 세손을 떼어내려 하며 제 아들인 양 독차지 하려 하였다. 영조 40년 영조는 세손을 효장세자의 후사로 삼는다고 느닷없이 선포했다. 사도세자의 3년상이 끝나기도 전이었는데, 이런 상황을 만든 사람은 화완옹주였다. 영조는 큰아들 효장세자와 현빈 조씨에게 애틋한 마음이 있었기에 세손을 효장세자의 후사로 삼았다.

 

1776년 3월 마침내 혜빈 홍씨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고, 정조는 생모를 혜경궁으로 높이고 효도했다. 혜경궁이 환갑이 되던 해에는 생모를 모시고 사도세자의 무덤이 있는 수원에도 행차했다. 혜경궁 홍씨는 정조가 승하한 후에도 15년을 더 살았다. 그리고 순조 15년 81세의 나이로 창경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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