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것이힘이다/조선역사

조선의 마지막 임금 고종

GoodFortune 2019. 8. 4.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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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조선 26대 임금 / 대한제국 초대 황제)

1851-1919

재위 1864-1907

 

고종은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여흥부대부인(순목대원비) 민씨의 둘째아들이다.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은 조선 16대 임금인조의 직계후손이었다. 고종의 직계선조를 따져보면 인조의 셋째아들 인평대군의 장남 복녕군, 그의 차남 의원군, 그의 차남 안흥군 이숙, 그의 장남 이병원, 그의 차남 남연군 이구 그리고 그의 4남 흥선대원군으로 내려온다.

 

고종 선조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은 아들이 없었던 은신군(사도세자의 서자)의 양자로 입적하여 영조의 양증손자 자격으로 왕위계승권을 획득했다. 철종이 후손 없이 사망하자 왕위 계승권은 철종의 이복형인 회평군과 영평군의 아들들과 철종의 호적상 6촌인 흥선군의 아들들 사이로 압축되었다. 흥선군은 일찍부터 신정왕후 조씨(효명세자 빈)를 자주 찾아 친분을 쌓고, 자신의 아들중 한명을 추존임금 익종(효명세자)의 양자로 삼는 조건을 내밀었다. 고종은 왕위에 오르기 전 조선23대 임금 순조의 아들 익종과 신정왕후 조씨의 양자로 입양되어 익성군의 군호를 받고 조선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1864년 1월 12세의 고종이 즉위하자 흥선대원군이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국정을 이끌었다. 흥선대원군에게는 차남이었던 고종 위로 적장자인 이재면이 있었는데, 철종 사망 무렵 이미 성인이었기에 왕위계승권 서열에서 밀리게 되고 12세였던 차남인 이명복이 오르게 되었다. 미성년자인 왕을 조종하기 쉬울 것이라는 흥선대원군과 조대비의 마음이 통했을 것이다.

 

흥선대원군 가계도

 

흥선대원군은 고종 즉위년(1864)부터 고종 10년(1873)까지 국정을 이끌었다. 대왕대비였던 신정왕후 조씨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나 실권은 모두 흥선대원군에게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안동 김씨 가문의 딸과 고종을 혼인시키겠다 약속하였는데 지키지 않고, 고종 2년(1866) 몰락하던 남인 출신의 여흥 민씨 집안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 그녀가 훗날 명성황후이다. 흥선대원군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친정오라비와 언니, 친사촌형제가 없는 며느리를 왕비로 간택했는데, 외척 세력을 키우지 않고자 하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흥선대원군은 유교의 위민 정치를 내새워 전제왕권의 확립을 추구했고, 밖으로는 서구 열강의 침략적 자세에 대하여 척왜강경정책으로 대응하였다. 흥선대원군은 구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세력을 축출하였고,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겪으며 단단한 쇄국정책을 펼치고 척화비를 전국에 설치했다.

 

 

고종 10년(1873)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와 유학자, 안동 김씨, 풍양 조씨, 여흥 민씨 등에 의해 축출된 후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고종의 초기 10년은 흥선대원군의 섭정 단계였고, 친정 이후에는 민씨 일가의 집권과 부패에 시달렸다.

 

고종 가계도

고종4년(1868) 귀인 이씨로부터 첫 아들 완화군을 얻었고, 명성황후는 돌보지 않았다고 한다. 완화군이 태어나자 대원군은 기뻐하였고,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대립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원자가 태어났으나 5일만에 요절하였고 순종이 되는 황태자 척은 고종10년(1874)에 태어났다. 귀비 엄씨는 8살에 궁녀로 들어와 명성황후 민씨의 시위상군이었다. 고종의 총애를 받게 되자 명성황후에 의해 쫓겨났다가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 시해당한 후 닷새 만에 고종의 명으로 입궁했다. 1897년 아들을 낳았고, 그가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한 후 황태자로 책봉된 영친왕이다. 귀인 장씨는 의친왕의 어머니인데, 1877년 의친왕을 낳자마자 명성황후에 의해 쫓겨나 10년 뒤 사망했다고 한다. 귀인 정씨는 1915년 황자 이우를 낳았는데 1년도 안되어 뇌막염으로 일찍 잃었다. 덕혜옹주의 생모 귀인 양씨는 1905년 궁녀로 입궁하여 1912년 고종의 막내딸 덕혜옹주를 낳았다.

 

 

흥선대원군은 축출된 후, 1874년 명성 황후와 민씨 일족 및 고종을 폐출하고 흥선대원군의 장자인 완흥군(고종 형)을 추대하려고 하였다. 완흥군은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아버지에게 불만이 있어 명성황후 측에 가담하기도 했다. 외가인 민씨 쪽에 아부한 것 때문에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축출된 후에도 관직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흥선대원군의 추대사건 이후 완흥군은 고종의 냉대를 받았다. 1881년에는 흥선대원군 서자인 이재선을 조선 군주로 옹립하려는 쿠테타를 기도했으나 실패했다. 이재선은 추대음모 사건으로 사사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일본인과 결탁하여 명성황후의 암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유길준에 따르면 흥선대원군은 명성 황후를 제거해 달라고 일본 공사관에 수시로 부탁했다고 한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붕기한 구식군대의 추대로 흥선대원군이 재집권하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가 이미 죽었다고 거짓 보고한 뒤 장례까지 치르게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군사적 압력으로 임오군란은 진압되고 흥선대원군은 1883년 청나라 톈진으로 압송된다. 1개월만에 고종은 복권하였고 그뒤 청나라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고종황제

갑신정변은 1884년 12월 4일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 개화당이 청나라에 의존하려는 척족 중심의 수구당을 몰아내고 개화정권을 수립하려한 무력 정변이다. 갑신정변 당시 개화파가 고종을 보필하였으나 고종의 입장은 중립적이었으며, 개화파의 혁명이 수포로 돌아가자 고종은 급진 개화파와 그들을 후원한 일본을 경계하며 의심하게 된다. 그후 청나라의 압력은 더욱 거세지고 러시아의 위협 증대와 이에 대항하는 영욱 군함이 거문도를 불법 점령하는 거문도사건(1885~1887)이 잇달았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났고, 일본 군대는 왕궁을 포위하고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민씨 일파를 축출하고 중도 개화파를 중심으로 친일 정부를 수립하여 갑오개혁을 단행했다. 친일 정부는 청나라와의 모든 조약을 독단으로 파기하고 일본군에 청나라 북양군을 조선에서 몰아내도록 허가했다. 흥선대원군이 1894년 7월부터 8월까지 섭정했으나 일본에게 은퇴를 강요받는다. 흥선대원군은 도승지까지 오른 장손 이준용(흥친왕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다 발각되어 이준용은 1895년 강화도로 유배되었고, 대원군은 아소정에 유폐된다.

 

서양 삼국(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서양 삼국은 일본에 간섭하게 되었는데, 고종과 명성황후는 친서방정책을 강화했다. 일본보다 강한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도록 했다. 1895년 10월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에 의해 살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유길준과 개화파 등이 일본 낭인을 도왔고 흥선대원군과 친대원군계 세력도 살해에 가담했다. 윤치호는 입궐하여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연루된 조선인을 폭로했는데, 흥선대원군, 우범선, 이두황 등 조선인 협력자들의 이름을 듣고 고종은 충격을 받았다.

김홍집은 고종을 감금하고 을미개혁을 시행, 연호를 건양으로 고치고 단발령을 공포했다. 이 일로 인해 을미의병이 일어난다.

 

1896년 고종은 친러파인 이완용 등의 종용과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불안을 느끼고, 왕태자 척과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아관파천을 단행했다. 고종은 을미4적으로 김홍집, 유길준, 정병하, 조희연을 거론하였고, 김홍집 내각은 붕괴되었다.

 

영친왕 순종 고종 순정효황후(순종 비) 덕혜옹주 사진으로 덕수궁 석조전에서 직접 볼 수 있다.

 

1897년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하여 환구단을 짓고 하늘에 고하는 제사를 지낸 후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로 새로 정하고 대한제국의 제 1대 황제 광무제로 즉위하였다. 대한제국 선포 후 미국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서재필 등이 독립협회를 창단하였는데, 보수 대신들의 황국협회를 결성하여 대립하였고, 고종은 두 단체를 강제 해산시켰다.

 

1898년 고종의 어머니인 여흥부대부인 민씨가 사망했고, 그해 흥선대원군이 잇달아 세상을 떠났다. 당시 고종은 흥선대원군 장례식에도 나타나지 않을 만큼 사이가 좋지 않았다.

 

1899년에는 조카 이준용이 쿠테타를 3번이나 기획하였다. 전 참봉 장윤상이 자신이 일본에서 이준용을 모셨다고 하며 이준용이 귀국하면 고종 대신 국왕이 될것이라 하였고, 소문으로 장윤상, 신현표, 이지현, 어용선 등이 처벌받았다. 1900년에 안경수, 권형진을 심문하는 중에 1894년 이준용이 명성황후와 세자궁을 처단하려 하였고 이 역모 사건이 을미사변으로 이어졌다는 진술이 나왔다. 유생들은 이준용을 일본에서 불러다 처형하자 하였지만 이준용은 귀국을 거절했다.

일본 망명 직후부터 이준용은 귀인 엄씨의 빈 책봉을 반대하였는데, 당시 고종은 명성황후의 빈자리를 대체할 인물로 엄상궁을 택하였다. 이준용은 신분이 낮은 엄상궁을 왕후로 삼는것은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조치라며 반대하였다. 고종은 밀지를 내려 이준용을 제거하려 하였지만, 제거 계획이 성공하지 못하였다.

 

고종은 1903년 러시아 황제에게 친서를 보내어 동맹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했고, 1904년 대외적으로 중립국을 선포하였으나 일본의 강요로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여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 고종은 일본의 침탈에 대비하며 군대 창설을 실시하고 군제 개혁을 준비하였으나 1905년 을사조약으로 군제 개혁을 이루지 못하였다. 1905년 대한제국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 제국 주한 공사 하야시 콘스케에 의해 체결된 을사조약은 불평등 조약임을 강조하여 을사늑약이라 불리기도 한다. 고종은 을사조약 승인을 거부하였으나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은 찬성을 표했고, 이 다섯명을 을사오적이라 한다. 을사조약의 체결로 거국적인 항일운동이 전개되었고, 일제는 이를 억압하였다. 고종은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국제 사회에 알리려 노력하였는데, 1906년 작성된 국서, 호머 헐버트 특별위원에게 건넨 친서, 프랑스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 1907년 헤이그 특사 이상설에게 준 황제의 위임장 등이 있었다.

 

 

 

1904년부터 이토 조선통감은 고종에게 조카 이준용의 귀국을 허락하라고 강요하였는데, 여러번 쿠데타를 일으키고 명성황후 암살의 가담자라고 확신하고 있던 고종은 이준용의 귀국 요구를 거절했다. 통감은 내각회의를 통해 이준용 연루건을 무죄임을 결정하였고, 이준영은 입국하게 되었다. 이준용은 12년 7개월간의 해외 망명생활을 마치고 대한제국으로 들어왔다.

 

황태자 척에게 아들이 없었는데 일본 정부는 태자 책봉이 유력한 의친왕 강이 반일성향과 자주 독립의지가 강하여 부담스럽게 생각했다. 엄귀비는 아들 황자 은(영친왕)의 황태자 책봉을 원하고 있었고, 황태자 척은 병이 있어 아들을 얻는것이 불가능했다. 고종은 황태자 척의 후계자를 의친왕으로 생각했지만, 엄귀비의 간청과 일본의 영친왕 지지 등 여러 중론을 접하게 되면서 일곱째 아들 영친왕을 잠재적 후계자로 낙점했다.

 

1907년 일본군은 군대를 풀어 한양 주변을 장악하고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켰다. 또한 고종은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로 이완용과 일본제국에 의해 강제 퇴위되었고, 황태자 척에가 양위했다. 1910년에는 이태왕으로 격하되어 덕수궁 함녕전에 유폐되다시피 했다. 고종은 1919년 68세의 나이로 덕수궁 함녕전에서 세상을 떠났다. 고종 독살설이 유포되기도 했는데 독살설로 3.1운동이 일어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2009년 일본 국회 헌정 자료실에서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지시로 친일파 대신들이 '고종 황제 폐하가 즐겨 마셨던 식혜에 독약을 탔다'는 주장이 적혀 있는 일본 궁내성 관리 구라토미 일기의 사본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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