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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발루아 앙굴렘 왕조 가계도

GoodFortune 2022. 9. 22.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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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발루아 왕조의 방계로 루이 12세가 아들 없이 사망하자 그의 사위인 푸랑수아 1세가 왕위를 이으며 발루아 앙굴렘 왕조가 시작되었다. 발루아 왕조는 발루아 직계가문, 발루아-오를레앙가, 발루아=앙굴렘가 세 개의 주요 가문을 배출했다.

5명의 왕이 발루아-앙굴렘 왕조의 왕위를 지켰으며 앙리 3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며 부르봉 왕조가 시작되었다.

프랑수아 1세 - 앙리 2세 - 프랑수아 2세

프랑수아 1세

1494~1547 재위 1515~1547

 

프랑수아 1세는 샤를 드 앙굴렘과 사이보아의 루이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샤를은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의 후손으로 루이 12세와 사촌이다. 루이 12세의 딸 클로드와 결혼하여 루이 12세의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프랑스는 살리카 법 때문에 여성의 왕위계승이 불가하였고, 그로 인해 프랑수아 1세가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1515년 프랑스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영향을 받던 시기였다. 프랑수아 1세는 르네상스 예술의 주요 지지자로 예술가들을 많이 후원하며 프랑스로 초청하였는데 그 중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있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탈리아를 떠나 프랑스로 이주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작품은 프랑수아1세가 초청하여 프랑스에서 완성된 그림이다.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와 같은 이탈리아 화가들의 예술품을 수집하였다.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예술 작품은 프랑수아의 통치기간에 이루어진 작품들이 많다.

1520년 프랑수아 1세는 프랑스 북부 발링헴에서 잉글랜드 헨리 8세와 회담을 가지며 함께 신성 로마 제국 카를 5세를 견제하려 했는데 헨리 8세가 이를 피하면서 계획은 무산되었다. 선왕 루이 12세가 실패했던 이탈리아 침공을 시도했으나 스페인군에 밀려 퇴각했고, 동맹자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카를 5세편이 되면서 이탈리아 반도 역시 스페인 손에 들어갔다. 이후 4차 6차 7차 이탈리아 전쟁에서도 패하면서 스페인은 최고 전성기를 누렸고 프랑수아 1세는 외교적으로는 실패한 군주였다.

부인 클로드는 7명의 자녀를 낳고 24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고, 프랑수아 1세는 필리프와 카스티야 여왕 후아나의 장녀 합스부르크 가문의 엘레오노르와 재혼했다. 엘레오노르는 포르투갈 마누엘 1세의 미망인이었다. 둘 사이에 자녀는 없었다. 

 

앙굴렘 왕조 가계도

 

앙리 2세

1519~1559 재위 1547~1559

 

프랑수아 1세와 브르타뉴 여공작 클로드의 차남이다. 태어나자마자 오를레앙 공작위를 받았다. 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가 맺은 마드리드 조약으로 앙리는 형인 왕세자 프랑수아와 인질이 되어 4년간 에스파냐에 머물렀다. 1533년 메디치가의 로렌초 2세의 딸이자 유일한 상속녀인 카트린 드 메디치와 결혼하였는데, 그는 가정교사이자 친구였던 디안 드 푸아티에게 마음이 있었다. 1536년 형 프랑수아가 급사하며 왕세자가 되었으며 아버지 사망 후 왕위에 올랐다.

1448년 왕세자 프랑수아의 부인으로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를 프랑스 궁정에서 받아들인 일에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6세와 충돌하게 된다. (당시 스코틀랜드의 어린 여왕은 에드워드 6세와 강제 결혼이 되는 상황을 피해 프랑스로 망명했다.) 1550년 앙리 2세의 군대는 스코틀랜드를 영향권 아래 넣었고 잉글랜드로부터 칼레를 되찾았다.

1551년 합스부르크가와의 전쟁으로 왕실 재정이 악화되던 중, 합스부르크 제국이 스페인과 오스트리아로 양분되며 전쟁 지속 명분이 약해졌다. 1559년 카토-캉브레지 조약으로 전쟁을 종식시켰다. 이 조약의 일환으로 딸 엘리자베트와 합스부르크의 펠리페 2세가 결혼을 하였다. 결혼 행사 중 앙리 2세는 직접 마상 창시합에 참가했다가 눈 부상을 입었는데 이로 인해 사망했다.

앙리 2세의 사고사를 예언해 유명해진 사람이 바로 노스트라다무스였다.

앙리 2세는 카트린 드 메디치와의 사이에서 프랑수아 2세, 엘리자베트(스페인 왕비), 샤를 9세, 앙리 3세, 마르그리트(프랑스 왕비) 등 10명의 자녀를 낳았다.

마르그리트는 앙리 드 기즈와 사랑에 빠졌으나 어머니 카트린의 방해로 실패하였고, 나라바 왕국 여왕 호아나 3세의 아들인 앙리(훗날 앙리 4세)와 결혼하였다. 마르그리트는 가톨릭 신자이고, 앙리는 개신교 신자였기에 종교적 갈등이 있었으나 정략 결혼을 하게 된다. 두사람의 결혼 6일 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전야에 개신교 지도자 중 한명인 가스파르 드 콜라니 제독이 앙리 드 기즈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프랑수아 2세

1544~1560 재위 1559~1560

 

앙리 2세와 카트린 드 메디치 사이의 장남으로 결혼 11년만에 태어난 첫 아들이었다.

1558년 스코틀랜드 제임스 5세의 딸 메리 스튜어트와 결혼하였다. 메리 스튜어트는 제임스 5세가 급사하여 생후 9개월만에 스코틀랜드의 여왕이 되었다.

결혼을 한 다음해 앙리 2세가 사고로 사망하며 왕위에 올랐다. 프랑수아는 어린 나이로 몸도 약하였기 때문에 삼촌 기즈 공작 프랑수아와 로레인 추기경 샤를이 국사를 운영했다. 이들의 권력이 커지자 프랑수아의 혈족인 나라바 왕 앙투안 드 부르봉과 콩데 공작 루이가 기즈 집안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이가 발각되어 처형되거나 구금되었다. 1560년 프랑수아 2세는 귀에 발생한 농양으로 사망하였다.

이후 메리 스튜어트(메리 여왕)은 헨리 스튜어트와 재혼하여 아들을 낳았고 그는 제임스 6세로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메리 여왕은 헨리 7세의 외증손녀였기 떄문에 제임스 1세가 왕위로 오르며 잉글랜드의 스튜어트 왕조가 시작되었다.

 

 

샤를 9세

1550~1574 재위 1560~1574

 

앙리 2세와 카트린 드 메디치의 아들이다. 형 프랑수아 2세가 후계 없이 죽자 10세에 왕위에 올랐다. 충동적이고 잔혹한 행동을 곧잘 하여 정신이 불안정하다는 평가가 있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어머니 카트린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프랑스는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종교 전쟁이 시작되는 단계였는데 카트린은 양파벌 간의 화해를 위해 노력했지만 상황이 악화되기만 했다. 1572년 누이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와 나바라 왕국의 앙리 드 부르봉(훗날 앙리 4세)과 결혼 첫날밤인 성 바르톨로메우스 축일에 위그노들에 대한 대학살이 일어나 개신교 신자 대부분이 가톨릭 교도들에게 학살당하는 대학살이 일어났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의 딸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와 결혼해서 외돌딸 마리 엘리자베트를 낳았지만 요절하며 남은 자녀는 없었다. 정부 마리 투쉐와의 사이에서 사생아 샤를을 낳았는데 앙굴렘 백작이 되었고, 사생아이기에 왕위 계승은 하지 못하였다.

 

 

앙리 3세

1551~1589 재위 1574~1589

폴란드 국왕 재위 1573~1575

 

앙리 3세는 폴란드의 왕이자 프랑스의 왕이다. 앙리 2세와 카트린 드 메디치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572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군주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가 사망하자 카트린은 공석인 폴란드 국왕 자리에 앙리를 내세웠고 폴란드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1572년 성 바르톨로메우스 축일의 대학살 이후에도 프랑스를 떠나지 않자, 형 샤를 9세의 통첩을 받고 폴란드로 떠났다. 폴란드 귀족들과 고위 성직자들이 모든 권한을 인정받아 헨리크 조항을 채택해 왕으로서의 모든 권한을 박탈당하고 수용한 규정에 따라야만 했다. 폴란드에서 4달을 지내다가 형 샤를 9세가 죽자 폴란드의 크라쿠프 왕궁에서 도망쳐 프랑스로 돌아왔다. 프랑스 왕위에 오른 뒤 로렌가 루이즈 드 보데몽과 결혼하였다. 폴란드 귀족들은 앙리 3세가 폴란드로 돌아오기를 간청했지만 앙리 3세는 폴란드로 가지 않았고, 폴란드는 새로운 국왕 선거를 치루게 되었다.

앙리 3세는 왕위에 오른 후 미뇽이라 불린 총신들에 대한 지나친 총애, 동성애적 취향 등으로 비난 받았다. 

앙리 3세는 후계를 이을 아들이 없었기에 왕위 계승권을 둔 내전이 발생하며 가톨릭 신성동맹과 갈등을 빚었다. 동생 프랑수아마저 사망하며 개신교 수장이던 나라바 왕 앙리 드 부르봉(앙리 4세)이 왕위 계승자가 되었고, 앙리 3세는 내전 중 1589년 암살당하며 앙굴렘 왕조는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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