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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합스부르크(압스부르고) 왕조 가계도

GoodFortune 2022. 9. 24.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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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 가문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넓은 영토를 갖고 있던 왕가 중 하나이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배출하면서 유럽을 장악하였고,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가 스페인에서 카를로스 1세로 왕위에 오르며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시작되었다.

 

 

카를로스 1세 - 펠리페 2세 - 펠리페 3세

카를로스 1세 (신성로마 제국 카를 5세)

1500~1558 스페인 왕 재위 1516~1556

 

카를로스 1세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으로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 스페인의 국왕, 이탈리아의 군주를 지냈다. 중근세 유럽에서 가장 많은 국가의 왕관을 쓴 인물로 뽑힌다. 무려 17개의 왕관을 썼다.

어머니는 카스티야 왕국의 여왕 후아나 1세, 아버지는 신성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후계자인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이다. 카시트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을 물려받아 다스린 첫번째 군주로 카를로스 1세를 최초의 스페인 국왕으로 여긴다.

어려서부터 5개국(플랑드르, 프랑스,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언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합스부르크, 부르고뉴, 스페인의 유산을 모두 물려받은 카를은 프랑스 발루아 왕가의 혈통도 받았지만 프랑스와는 대립 관계였다.

1504년 어머니 후아나 1세는 그녀의 어머니 이사벨라 여왕이 사망하자 카스티야의 여왕 자리에 올랐다. 1506년 아버지 필리프가 급사하지 카를은 어린 나이에 부르고뉴 공작이 되었다. 어머니 후아나 1세는 1516년 그녀의 아버지 사망으로 아라곤, 시칠리아, 나폴리 등의 영토를 받게 되었는데, 정신병을 앓고 있었기에 카를이 공동왕으로 선언되었다. 그리하여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왕이 한 명의 왕 아래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또한 1519년 막시밀리안 1세가 사망하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에 오르게 된다.

카를로스 1세의 영토

1526년 포르투갈 마누엘 1세의 딸 이사벨라와 결혼하였고 1남 2녀를 낳았다. (1명은 요절)

재위 기간동안 프랑스와 수많은 전쟁을 하였다. 이탈리아 전쟁 (1521~1526, 1536~1538, 1542~1546 1551~1559) 코냑동맹 전쟁(1526~1530)을 거치며 승리와 패배를 여러 차례 하였다.

1556년 오랜 통치와 수많은 전쟁으로 카를 5세는 퇴위를 결정하였고, 부모로부터 받은 통치권은 아들 펠리페 2세가 가져갔고, 조부로부터 받은 신성로마제국은 남동생 페르디난트 1세가 가져갔다. 2년 후 수도원에서 은둔 생활을 하다 사망하였다.

 

 

펠리페 2세 

(포르투칼 펠리페 1세)

1527~1598 재위 1556~1598

 

카를로스 1세와 포르투갈 마누엘 1세의 딸 이사벨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카를로스 1세로부터 스페인 영토를 물려받으며 막대한 빚까지 물려받았다. 왕위에 있는 동안 4번의 파산 선고를 실시했다.

스페인 왕국의 수도를 바야돌리드에서 마드리드로 옮겼고, 로마 가톨릭을 통한 국가 통합을 이상으로 추구하며 신앙심이 깁은 가톨릭교도였다. 개신교와 이슬림교를 법으로 금지시켰는데, 스페인 내의 무어인들은 3년 동안 스페인어를 익혀야 하며 아랍어를 사용하면 처벌받겠다고 하였고, 무슬림들이 세정식을 행하는 공중목욕탕도 없앴다. 무어인들의 반란을 군대를 보내 진압했다.

포르투갈 세바스티앙이 사망하자 그의 삼촌 엔히크 추기경이 66세로 즉위하였지만 얼마 못가 후계없이 죽게 되며 펠리페 2세는 마누엘 1세의 외손자 자격으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포르투갈의 왕위 계승 후보자로 안토니오가 있었는데 그는 대중의 지지를 얻고 있었지만 사생아였다. (마누엘 1세의 4남 루이스의 사생아이다) 안토니오는 반 스페인 세력을 모았으나 전투에서 스페인이 승리하며 안토니오는 프랑스로 망명했다.

스페인은 포르투갈, 네덜란드, 밀라노 공국, 부르고뉴 공국, 시칠리아 섬 등 광대한 영토를 가지며 해가 지지 않는 제국 이라 불리는 스페인 최전성기를 맞았다. (포르투갈은 60년 동안 스페인의 통치를 받다가 독립전쟁을 통해 주앙 4세가 왕위로 올랐다. 이후로도 포르투갈의 독립전쟁은 28년동안 이어졌으며, 포르투갈의 독립이 인정받은 시기는 1668년이다.)

펠리페 2세는 4번의 결혼을 했는데 첫번째 부인 포르투갈의 마리아 마누엘라는 아들 돈 카를로스를 낳다 사망하였고, 돈 카를로스는 왕위 계승자였으나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사망했다. 두번째 부인은 잉글랜드의 메리 1세이다. 정략결혼을 통해 잉글랜드의 공동통지자가 되었지만 결혼 후 4년만에 자녀 없이 메리 1세가 사망했다.

세번째 부인은 프랑스 앙리 2세의 딸 이사벨로 그녀와의 사이에서 두 딸을 낳고 죽었다. 네번째 부인 막시밀리안 2세의 딸 오스트리아의 아나는 다섯 아이를 낳았는데 펠리페 3세만이 살아남고 모두 일찍 죽었다. 아나의 어머니는 마리아는 펠리페 2세의 딸로 삼촌-조카 사이의 근친혼이었다. 세번째 부인과 네번째 부인은 펠리페 2세의 장남 돈 카를로스와 결혼할 예정이었으나 그가 요절하며 펠리페 2세와 결혼하게 된 것이다.

1598년 펠리페 2세는 암으로 사망했다.

 

스페인 합스부르크(압스부르고) 왕조 가계도

 

 

펠리페 3세

1578~1621 재위 1598~1621

 

펠리페 2세와 네번째 부인 아나의 아들이다. 아나는 펠리페 2세의 조카이기도 하다.

펠리페 3세는 같은 합스부르크 왕가 일족인 신성 로마 제국의 페르디난드 2세 황제의 누이 마르가리타와 결혼했다.

펠리페 3세는 정치를 싫어하여 대부분의 업무를 레르마 공작에게 맡기게 되며, 펠리페 3세는 신하들과 사치스러운 궁정생활을 즐겼다. 이로 인해 스페인은 펠리페 2세의 전성기를 유지하지 못하고 쇠퇴하게 되었다.

 

 

펠리페 4세

1605~1665 재위 1621~1665

 

펠리페 3세와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리타 사이의 장남이다.1640년 포르투갈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포르투갈 국왕 주앙 4세를 왕으로 추대하며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하게 되었다. (이후로도 28년간 독립운동이 진행되었다) 카탈류냐 지방에서도 반란이 일어나며 합스부르크 왕가에 위기가 오고 있었다.

스페인은 근친혼으로 요절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프랑스 앙리 4세의 딸 엘리자베트와 결혼 하여 8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6명의 아이가 요절하였고, 아들 발타사르 카를로스가 16세는 사망하고, 마리 테레즈 도트리슈만이 성인까지  살아남아 루이 13세의 왕비가 되었다. 두번째 부인 여동생 마리아 안나의 딸 마리아나와 결혼하였 5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3명은 요절하였고 딸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21세에 사망, 카를로스 2세만이 성인까지 살았다. 

카를로스 2세가 후계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마리 테레즈 도트리슈와 루이 13세의 증손자 필리프가 펠리페 5세가 되어 스페인 부르봉 왕가의 시조가 된다. 펠리페 5세의 조모 마리 테레즈는 카를로스 2세의 이복남매이기도 하다.

 

카를로스 2세

1663~1700 재위 1665~1700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왕으로, 펠리페 4세와 두번째 부인 마리아나의 아들로, 마리아나는 펠리페 4세의 조카로 근친혼이었다. 카를로스 2세는 신체가 허약하였고 장애를 앓고 있었다. 여러 대에 거친 근친혼이 원인이 되어 주걱턱에 혀가 심하게 커서 입을 다물지 못했고, 상반신이 크고 다리는 왜소한 탓에 움직이기 힘들었다고 한다. 또한 지적장애가 있어 직접 국정을 돌보지도 못하였다. 그럼에도 오를레앙 마리 루이즈와 결혼하였으나 마리 루이즈는 자녀 없이 죽었고, 팔츠노이부르크 마리아 아나와 (오스트리아)와 두번째 결혼을 하였으나 후계를 낳지 못했다. 1700년 카를로스 2세가 사망하며 프랑스의 펠레페 5세가 왕위에 올랐고, 스페인 부르봉 왕가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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