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우스-클라우디스 왕조가 68년 네로 황제의 자살로 끝이 나며 이후 69년에는 네 명의 황제가 있었다.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베스파시아누스 네 명이 한 해에 황제를 지내며 69년은 네 명의 황제의 해로 불린다.
갈바
기원전 3~69 재위 68~69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갈바는 기원전3년 로마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20년 법무관에 임명되었다. 23년 집정관이 되었고 39년 칼리굴라에 의해 방위군 지휘관이 되었다. 레피다와 결혼해 두 아들을 두었으나 갈바가 황제에 오르기 전에 사망했다.
소 아그리피나가 클라우디우스와 결혼하기 전 자신의 재혼상대로 유부남이던 갈바에게 접근하기도 했으나 그의 장모가 공개적으로 질책하며 때리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갈바는 부인 레피다가 죽은 후에도 재혼을 하지 못하고 홀로 살았다.
49년 소 아그리피나가 클라우디우스와 결혼하자, 갈바는 소 아그리피나와 사이가 좋지 않아 10년간 은퇴를 하였다.
68년 네로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가이우스 율리우스 빈덱스에 의해 반란의 주모자로 추대되었으며 네로의 자살 이후 원로원에 의해 황제로 선포되었다. 갈바는 황제가 된 후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네로의 선물을 몰수하였는데 이로 인해 수많은 비판을 받았다.
69년 라인 강 군단이 갈바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며 게르마니아군 사령관 비텔리우스를 추대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던 중 갈바가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프루기 리키니아누스를 양자로 삼고 후계자임을 선포하였다. 피소 리키니아누스는 네로 시대에 피소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추방되었다가 귀국한 명문가의 자손었다. 자신이 후계자라고 생각했던 오토는 쿠데타를 일으켰고, 근위대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갈바는 반란군에 대항하려 하였으나 오토 측의 공격으로 사망하였다. 갈바는 69년 사망한 첫번째 왕이 되었다.
오토
32~69 재위 69.1~69.4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
오토의 집안은 귀족이 아니었지만 정치적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할아버지는 원로원으로 직위를 임명받아 집정관까지 올랐다. 오토는 네로 황제의 젊은 시절 친구로 신임을 받았으나 네로가 오토의 아내 포파이아 사비나와 사랑에 빠져 그를 루시타니아 총독으로 보내고 포파이아 사비나를 자신의 아내로 삼았다. 포파이아 사비나는 네로와 세번쨰 결혼을 하였고 네로의 딸을 낳고 둘째를 임신한 시기에 네로에게 발로 차여 죽었다.
오토는 10년 동안 루시타니아 총독으로 지내며 명성을 쌓았다. 갈바가 네로정권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며 황제 자리에 오르자 오토는 갈바를 지지했으나 합당한 대우를 해주지 않자 실망하게 된다. 오토는 근위대 병사들을 자기 편으로 끌여들여 갈바를 암살하고 황제 자리에 올랐다.
황제가 된 오토는 활동적으로 국정을 펴나갔고, 원로원은 오토된지 3개월만에 비텔리우스가 내란을 일으켜 오토는 자결하였으며 비텔리우스가 황제 자리에 올랐다. 오토는 이렇게 69년 사망한 두번째 왕이 되었다.
비텔리우스
15~69 재위 69.4~69.12
티베리우스 황제의 신임을 받았던 루키우스 비텔리우스의 아들로 48년 집정관에 임명되었고 61년 아프리카 총독, 68년 하게르마니아 사령관이 되었다. 갈바 재위 시절 게르마니아군 반란에서 주모자로 추대되었었고, 이후 오토 재위 시절에도 반란군에 의해 로마가 점령되고 비텔리우스는 황제 자리에 올랐다.
로마로 가는 길 비텔리우스가 보여준 것은 환락, 축제와 무분별한 언동이었다 "죽은 적의 냄새는 달콤하다" 라는 말로 많은 사람들의 적개심을 샀다.
로마로 입성한 비텔리우스는 부하들의 전횡 방치, 환락생활 등으로 무능의 극치를 보여주었으며 도나우 군단이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지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비텔리우스는 도나우 군단에 끌려나와 포로 로마노에서 온갖 모욕과 고문을 당한 뒤 처형당했다.
베스파시아누스
9~79 재위 69~79
베스파시아누스는 징세청부인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와 베스파시아 폴라의 아들이다. 그는 로마에서 최상층에 어려운 가문 출신이었으나 치밀함과 부지런함으로 신분을 끌어올렸다.
유다 지역에서 유대교민족주의 세력에 의해 발생한 유대독립운동이 커지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유대땅으로 파견되었으며 유다인 지도자 요셉을 포로로 잡았다. 이후 로마로 들어가 요셉은 로미 시민원을 얻었고 로마와 유다 간의 절충안을 제시하여 베시파시아누스는 요셉의 도움을 받아 유다를 무리 없이 통치하였다.
네로 자살 이후 3명의 황제가 찬탈전을 벌였으며 베스파시아누스는 로마인에게 선택되어 황제 자리에 올랐다. 최초의 평민 출신 로마 황제가 되어 플라비우스 왕조를 이루었다.
페렌티움 출신 기사의 딸 도미틸라와 결혼하였으나 그가 황제가 되기 전에 죽었고, 재혼하지 않고 해방노예 출신 체니스를 곁에 두었다. 아들 티투스, 도미티아누스, 도미틸라 2남 1녀를 두었다.
티투스
39~81 재위 79~81
베스파시아누스와 도미틸라 사이의 아들이다.
로마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아들 브리타니쿠스과 사이가 좋아 티투스가 황제가 되었을 때 옛 친구의 상을 건립했다고 전해진다.
64년 아레키아 테르트라와 결혼했으나 사별하고, 마르키아 푸르니라와 재혼했으나 65년 원로원 피소에 의한 네로 암살의혹사건으로 아내와 이혼해야 했다. 67년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와 유대인 진압을 함께 하였다. 69년 아버지 페스파시아누스가 황제 선언을 위해 로마로 간 뒤 예루살렘 공략의 사령관이 되어 예루셀렘을 점령하고 73년 대부분의 유대인 반란을 평정했다. 지금 로마 광장 입구의 티투스 개선문은 그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81년에 세운 것이다.
71년 로마로 돌아온 티투스는 황실 근위대 지위를 받고 아버지와 공동통치를 하였다. 79년 아버지 사망 후 황제 자리에 올랐다. 당시 그의 애인은 유대왕가 일족인 베레니케였는데, 당시 로마 시민들은 베레니케를 네로 시대의 클레오파트라를 연상케 하여 티투스가 네로와 같이 될까봐 염려했다고 한다. 티투스는 베레니케와 결혼을 하지 않음으로서 시민의 지지를 잃지 않았다.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시작한 플라비우스 원형 경기장 (콜로세움) 을 마무리하였다. 베수비오 화산 폴발과 대화재가 발생해 재건에 힘을 쓰던 티투스는 황제 자리에 오른지 2년만에 사망하고 동생 도미티아누스가 왕위에 올랐다.
도미티아누스
51~96 재위 81~96
베스파시아누스와 도미틸라의 아들이자 티투스의 동생이다. 베스파시아누스 치세에 집정관을 지냈다. 형 티투스가 아들 없이 죽자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티투스가 황제에 올랐을 때 호민관의 권련을 누리고 싶어했으나 허락받지 못해 형과 사이가 안좋았고 형의 죽음에 관여됐다는 의혹이 있다.
코르불로의 딸 도미티아 롱기나를 남편과 이혼시키고 결혼했다.
황제 자리에 오른 후 귀족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는데 잔인하고 비타협적이며 권위주의적 통치로 인한 것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주님이자 하느님'이라고 부르게 하며 자신을 우상화하여 심한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도미티아누스는 원로원들에게 엄격하며 권한을 축소하였는데, 원로원들의 사생활을 간섭하고 동성애, 근친상간 등의 이유로 원로원들을 처벌했다. 베스타 처녀 사제 중 최고 사제 코르넬리아는 여러 명의 애인을 뒀다는 혐의로 생매장을 시키기도 했다.
89년 게르마니아 총동 안토니우스 사투르니누스가 반란을 일으켜 게르마니아 주둔군에 의해 진압되었으나 도미티아누스는 수많은 사람을 처형했고, 이후에는 원로원 의원을 반역죄로 고발하기도 했다. 93년 이후에는 사상 유례없는 공포정치의 시기였다.
96년 근위대장 2명과 아내 도미티아 롱기나의 음모로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살해당했다. 다음 황제의 자리에 오른 네르바 역시 음모에 가담한 것으로 보고 있다. 원로원은 도미티아누스의 죽음을 기뻐하며 생전의 모든 업적을 지워버리는 '기록말살형'에 처했다.
그의 죽음으로 플라비우스 왕조는 끝이 났고 네르바가 황제에 오르며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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