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투스
기원전 63~ 14 (재위 기원전 27~14)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이다.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며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로 불렸다.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외할머니의 남동생인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유언장에 따라 그의 양자가 되어 후계자가 되었다.
아버지가 평민이었기 때문에 어머니 아티아가 귀족이었음에도 옥타비아누스는 평민층에 속하였는데,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어 귀족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제2차 삼두정치를 열어 로마를 지배하였다. 클레오파트라와 결혼을 한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와 대립하게 된다. 이후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오스와 클레오파트라를 물리치고, 로마 공화국의 최고 권력자가 된다. 기원전 27년 내전이 종결되며 자신에게 위임된 특권을 원로원과 로마 시민에게 반납하였다고 선언하였으나, 로마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존엄한자(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수여하였다.
권력을 원로원에게 돌려주겠다고 한 아우구스투스는 여전히 집정관 자리에 앉아 권력을 차지하고 있었다. 건강이 좋지 않아 권력을 위임하였고, 건강이 회복 아우구스투스는 재정적 성공과 원정에서 얻은 물자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절대 권력을 누렸다. 아우구스투스의 로마 군대 통제 권한으로 원로원의 결정을 억압하였고, 원로원 정적들을 제거하여 자신에게 복종하도록 하였다.
총 4번의 결혼을 하였으나 친아들은 얻지못하였고 딸도 단 한명 뿐이었다. 아내의 본가, 누나의 시댁, 두 양자의 본가인 클라우디우스 가문들과 결합하여 자신의 새로운 가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인 카이사르 가문을 완성했다.
누나의 아들 마르켈루스와 자신의 딸 율리아를 결혼시켰으나 마르켈루스는 20살의 나이로 사망했고, 미망인이 된 율리아를 아그리파와 혼인시켜 5명의 아이를 낳았다. 외손자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를 양자로 삼았고, 리비아의 의붓아들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 형제 또한 아꼈다고 한다. 아그리파가 죽은 후 딸 율리아를 티베리우스와 결혼시켰으나 5년 후 이혼했다. 율리아는 율리우스 안토니우스와 불륜을 저지른 죄로 유배되었다가 유배지에서 죽었다.
총 9명의 후계자를 두었으나 7명이 일찍 죽었고, 아그리파 포스투무스(외손자)는 파양되었고, 티베리우스가 제위를 물려받았다. 티베리우스는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장남으로 아우구스투스의 양자가 되었다.
티베리우스
기원전 42~37 재위 14~37
티베리우스는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리비아 드루실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아버지 클라우디우스 네로는 반 아우구스투스파였기에 어린 시절 도피 생활을 했다. 사면령이 내려지며 가족들은 로마로 귀환하였는데 옥타비아누스가 리비아의 미모에 반해 티베리우스 네로에게 이혼 압벽을 넣어 둘은 이혼을 하고 티베리우스는 네로의 둘째 아이를 임신한 몸으로 옥타비아누스와 결혼했다.
티베리우스는 아그리파의 첫번째 아내 폰포니아가 낳은 딸 아그리피나와 결혼하였다. 딸 율리아가 마르켈루스와 결혼했다가 미망인이 되고 아그리파와 두번째 결혼을 하여 5명의 아이를 낳고 다시 미망인이 되자, 아우구수투스는 티베리우스를 이혼시키고 딸 율리아와 결혼하도록 만들었다. 둘 사이가 좋지 않아 사이가 악화되자 티베리우스는 자진하여 로도스섬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는데 이때 율리아는 율리우스 안토니우스와 불륜을 저질러 이혼을 당하며 로마에서 추방되어 유배되었다. 후계자 후보인 외손자 가이우스와 루키우스가 요절하며 티베리우스가 후계자가 되었다.
티베리우스는 기원전 13년에 공동왕이 되었으며 14년부터 단독 왕이 되었다.
기원전 4년 티베리우스가 아우구수투스의 양아들이 되는데, 친아들 소 드루수스가 있었으나 게르마니쿠스를 양아들로 삼게 되었다. 게르마니쿠스는 동생 드루수스의 아들이자 아우구스투스 누나 옥타비아의 외손자이다.
이후 동생 드루수스가 사망하자 그의 손자이자 게르마니쿠스의 아들 네로 카이사르와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입양시켜 후계자로 만들었다. 그러나 게르마니쿠스의 아내 대 아그리피나와 티베리우스의 갈등이 있었고 이를 이용한 세야누스의 반역죄 고발로 대 아그리피나와 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는 결국 처형당하였다.
전차 경기대회와 검투사 경기를 중지시키는 등 재정 낭비 중단 정책을 단행하여 로마 시민들에게 인기가 없었으며 26년부터 37년까지 근위대장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세야누스를 통해 로마를 통치하고 카프리섬에 은거하며 지내다 병에 걸려 7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12~41 재위 37~41
티베리우스의 조카이자 양아들인 게르마니쿠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손녀 대 아그리피나의 아들이다. (대 아그리피나는 율리아와 두번째 남편 아그리파 사이에서 낳은 딸이다)
아버지 게르마니쿠스는 게르마니아 방면군 사령관직을 맡고 있었는데 게르마니아 군단 병사들이 아들을 귀여워하여 붙여준 '꼬마 장화' 라는 별명이 있어 카리굴라 로 불린다. 티베리우스의 후계자 후보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면서 티베리우스가 죽기 전 게르마니쿠스를 사촌동생 티베리우스 게메루스와 함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원로원은 공동상속인을 무시하고 게르마니쿠스를 단독상속인으로 취임시켰다. 게르마니쿠스는 재정 낭비 방지 정책을 중지시켜 검투사 시합을 부활시켰다. 즉위 7년만에 고열로 인한 정신이상이 생겨 광적인 행동을 많이 하였다. 검투사 시합을 과격하고 참혹한 내용으로 바꾸고 도박을 일삼으며 국고를 탕진했다. 자신과 누이 드루실라를 신격화시키고, 누이들과 근친상간을 맺는 등 비정상 행동을 많이 하였다. 게르마니쿠스의 여동생 소 아그리피나는 훗날 5대 황제 네로의 어머니이다.
41년 게르마니쿠스는 근위대장 카시우스 카이레아 등에 의해 가족과 함께 살해당했다.
클라우디우스
기원전 10~54 재위 41~54
아우구수투스의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손자이며 티베리우스의 조카이다. 3대 황제 게르마니쿠스(칼리굴라)의 친삼촌이기도 하다.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와 소 안토니아 사이에서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병약하고 말을 더듬고 한쪽 발을 끄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삼촌 칼리굴라 치세에 원로원에 의해 집정관으로 취임되었으며 칼리굴라가 암살된 후 황제에 올랐다.
45년 이탈리아의 유대인들을 강제추방하는 반유대주의 정책을 실시하여 그리스 코린토스로 이주시켰다.
일생동안 네번의 결혼을 하였는데, 플라우티아, 아일리아, 발레리아 메살리나, 소 아그리피나가 그의 부인들이다. 그녀들은 남편을 무시하고 권력의 도구로만 사용했다. 첫 부인 플라우티아 우르굴라닐라는 첫 아들을 낳았으나 요절했고, 그 후 여러 남성과 바람 피운것이 들통나면서 이혼을 하게 된다. 두번째 부인 아일리아는 장녀 클라우디아 안토니아를 낳았으나 그녀의 양동생 세야누스로 인해 강제이혼을 당했다. 세번째 부인은 메살리나이다. 차녀 클라우디아 옥타비아와 아들 브리타니쿠스를 얻었는데, 황후가 된 메살리나는 사치와 부정행위(간통과 중혼) 등에 의해 파탄나게 된다. 마지막 아내는 조카인 소 아그리피나로 율리우스 가문의 유일한 여성이었다. (형 게르마니쿠스는 티베리우스에게 입양되어 율리우스 가문이었지만 클라우디우스는 그렇지 못했다)
54년 독버섯에 중독되어 사망하였다고 하는데 네번째 아내이자 네로의 어머니 소 아그리피나에게 암살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클라우디우스는 후계를 명확히 하지 않고 죽었는데 친아들 브리타니쿠스와 장녀 클라우디아 안토니아와 그녀의 남편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가 있었지만, 사망하기 4년 전 양자로 삼은 아그리피나의 아들 네로가 즉위하게 된다. 네로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차녀 클라우디아 옥타비아의 남편이므로 클라우디우스의 사위도 된다.
네로
37~68 재위 54~68
가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소 아그리피나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대 안토니아의 아들이며, 소 아그리피나는 아우구스투스의 증손녀이다. 태어난지 얼마 안돼 아버지가 사망하였고 어머니 아그리피나는 숙부인 황제 클라우디우스와 결혼하였다. 클라우디우스의 네 번째 부인이었던 아그리피나는 자신의 아들 네로를 클라우디우스의 양자로 입양시킨다. 아그리피나는 율리우스 가문의 유일한 여성이었으며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율리우스 가문이 아니었기에 정치적으로 결혼이 성사되었다.
양부인 클라우디우스가 죽자 친아들인 브리타니쿠스를 제치고 네로가 황제 자리에 올랐다. 네로는 로마의 문화와 건축을 발전시켰으며 지금도 네로 시대 지어진 건축물이 남아있다.
처음 5년간은 황금기로 불릴만큼 평이 좋았는데, 활달하고 발랄한 성격, 총명함으로 인기가 좋았다.
네로는 5번의 결혼을 하였는데 첫번째 부인이자 조카인 클라우디아 옥타비아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네로는 그녀를 무시하였고 이미 두번이나 결혼한 적이 있는 포파이아와 불륜을 저질렀다. 이 일로 어머니와 아내는 네로와 대립하게 되었다.
의붓동생인 브리타니쿠스를 독살하였고(어머니 아그리피나의 소행이라는 주장도 있음), 59년에는 어머니 아그리피나를 살해, 62년에는 아내 클라우디아 옥타비아를 유배보냈다가 처형했다.
포파이아와 혼인한 후에는 둘째를 임신한 포파이아를 발로 차서 죽여버리는 일도 있었다. 그 다음해 스타틸리아 메살리나와 세번째 결혼을 하였는데, 그녀는 이미 결혼을 했었는데 네로는 그녀의 남편을 죽이고 메살리나와 결혼을 했다.
64년 로마 대화재가 발생하여 민심이 혼란하자, 기독교에 책임을 씌워 기독교도들을 대학살하였다. 이는 네로 황제가 로마 최초 기독교 박해자로 기록되게 한다. 65년 스승이자 철학자, 정치가인 세네카에게 자살 명령을 내렸다. 네로는 뿐만 아니라 얼마 남지 않은 아우구스투스의 후손들도 여럿 살해하여 친혈육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이러한 친족 살인으로 인해 그는 오늘날까지도 폭군의 대표자가 되어버렸다.
68년 타라콘네시스 속주 총독 갈바가 일으킨 내전이 일어나며 원로원으로부터 '국가의적' 선고를 받았다. 그해 네로는 로마를 탈출하여 노예 파온의 별장에서 자살하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마지막 왕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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