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은 세조 3년 영월에서 자살을 강요당하여 목을 매어 죽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1452년 5월 18일.
문종이 14일 승하한 후, 18일에 단종 이홍위가 경복궁 근정문에서 즉위했다. 미성년의 임금이 즉위할 경우 대비가 수렴청정을 해야 했으나 세종 비 소헌왕후 심씨와 모후 현덕왕후 권씨 모두 세상을 떠났고, 문종은 부왕 세종의 삼년상이 끝나지 않아 계비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종을 낳고 얼마 안있어 세상을 떠난 현덕왕후 권씨 대신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가 세자를 키웠으나 후궁은 수렴청정을 할 수 없었다.
의정부의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 우의정 정분이 단종을 보좌하는 비상 체제가 선언되었다. 36세의 수양대군 뿐 아니라 7명의 대군들이 생존해 있었다.
이때 분경 금지 조항이 선언되었는데 분경은 인사권자를 찾아다니며 관직을 얻으려 하는 것을 말한다. 이조, 병조의 인사권자 뿐 아니라 의장부 대신들과 대군들로 분경 금지를 확대하였다. 이 때 수양대군이 즉각 반발하였는데 안평대군과 도승지 강맹경을 불러 대군들을 의심한다며 의정부에 항의했다. 수양대군은 어린 단종이 대군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였는데, 대군들은 정사에 관여하는것이 국법으로 금지되고 있었으므로 수양대군의 반발은 이치에 맞지 않았다.
이때 의정부 대신들은 수양대군에게 강하게 질책하지 못하였고, 분경 금지를 시킨것은 사헌부라며 책임을 돌렸다. 도승지 강맹경은 "의정부의 의견은 대군 집의 분경은 금하지 말게 하는 것이다" 라고 단종에게 고했다. 이렇게 단종은 대군의 분경은 금지하지 못하게 되었다.
단종실록은 숙종 24년 노산군이 단종으로 복위되기 전까지는 노산군일기라고 불렸는데, 이는 수양대군 측에서 작성했다. 이때 후세의 비난이 두려워 편찬자들의 이름도 써 넣지 못했다고 한다.
단종실록 즉위년 6월 8일
강맹경이 와서 국사를 의논할 떄 사관이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돌아와 앉아서 일을 의논하다가 한참 만에 파했다. 강맹경이 항상 이렇게 일하기 때문에 조정의 큰 의논을 사관이 얻어듣지 못하였다.
단종실록에서도 강맹경은 기록을 피하기 위해 사관들을 피해 일했다고 되어있다.
세종 23년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 권씨가 산후 사흘만에 사망했을 때 목효지라는 풍수에 능한 종이 있었다. 당대의 풍수가 최양선이 권씨의 장지 선정을 맡았는데 산가에서 꺼리는 바닷가 안산 고읍으로 정했다. 그러자 목효지가 세종에게 "그 산은 내룡이 얕고 약하며 길 떄문에 끊어진 곳이 0여 군데나 됩니다. 내룡이 약하면 낳은 아이가 녹아 버립니다. 장자와 장손이 일찍 죽는 악지이오니 다른 길지로 이장해야 합니다" 라고 문제를 제기하였다. 세종은 풍수 대가들에게 다시 조사를 시켰는데 그때 풍수에 지리가 밝은 수양대군도 조사단에 들어갔다. 수양대군은 목효지의 말이 근거 없는 말이라고 비난했는데, 목효지는 자신의 견해를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권씨의 능 자리는 그대로 쓰고 장혈(시신이 놓이는 구덩이)의 위치만 바꾸게 되었다.
문효지는 문종의 능을 쓸 때도 다시 등장하는데, 문종 능의 위치가 "정룡, 정혈이 아닙니다" 라고 단종에게 비밀리에 전달했다. 풍수가에서는 정룡, 정혈이 아닌 곳에 무덤을 쓰면 장자나 장손이 잘못되는 것으로 파악한다. 어린 단종은 도승지 강맹경에게 전달받은 쪽지를 보이는 실수를 하였고, 강맹경은 강하게 반발했다.이 때 수양대군은 영의정 황보인에게 말하길 "이번 산릉은 조정 대신 여러 사람이 의논하여 살펴 정하였는데, 어찌 공을 바라는 한 소인의 사설을 듣고 경솔하게 다시 의논하겠소?" 라고 반발했다.
영의정 황보인은 풍수에 능한 이현로, 윤통 등 10여 명을 목효지에게 보내 묻게했는데 "마전현 북쪽과 장단현 북쪽이 낫다" 라고 답하였다. 수양대군과 의정부 대신들은 목효지를 강하게 비난하며 국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목효지는 엄한 국문을 받고 경기 안성참 서리로 근속하다가 4개월 후에 석방되었다.
목효지의 제안이 거부되었고 문종의 장지는 수양대군의 뜻대로 되었다. 그러나 무덤 구덩이를 9척쯤 파니 물이 솟아 나오는 악지 중 악지였다. 그러나 장지를 새로 정하지 않고 그 옆자리로 결정되었는데 단종실록에는 세조가 손수 장서를 쥐고 혼자서 가부를 독단했다고 기록되었다. 이때 수양대군을 도운 사람이 정인지였다.
단종실록 즉위년 7월 25일
능의 남쪽에서 물이 솟아 나오는데도 정인지는 수원이 없으므로 장차 염려할 것이 없다면서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배격하고 이곳에 장지를 쓰려고 했기 때문이다.
후에 목효지는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기 직전인 단종 3년 2월 죄명이 분명치 않은 채로 극변의 관노로 떨어졌다가 9개월 후에 교수형에 처해진다.
단종 즉위년에 유명한 풍수가인 이현로 라는 문신은 "백악산 뒤에 궁을 짓지 않으면 정룡(종손)이 쇠하고 방룡(지손)이 발한다" 라는 말을 했는데 방룡은 수양대군을 의미했다. 이 말을 한 이현로는 단종 즉위년에 수양대군에게 구타당했다가 목효지보다 더 일찍 수양대군에게 사형당했다.
수양대군은 단종 즉위년에 스스로 고명 사은사로 가겠다고 자청했다. 이 일로 두가지 해석이 나오는데 대왕대비가 수양대군을 보내며 몰래 매일밤울었고, 수양대군도 비통하게 울면서 나의 충성을 알아주길 원한다고 말했다고 하며 힘든 길을 갔다는 단종실록의 기록이 있다. 한편으로는 관례에 따라 국왕 책봉 고명 사신으로 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 아니며 수양대군이 스스로 택한 일이며 명의 지지를 받기 위해 갔다는 해석이 있다. 수양대군은 황보인의 아들 황보석과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를 인질로 데리고 갔는데 일종의 인질이었다.
단종1년 10월 10일
수양대군은 권람, 한명회를 집으로 불렀다. "김종서가 먼저 알면 일은 성사되지 못할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수양대군은 수십 명의 집으로 무사들을 불러 활을 쏘게 하고 술을 마시게 했다. 저녁 무렵 수양대군은 후원에 나와 "김종서를 베어 없애서 종사를 편안히 하고자 한다" 고 무사들에게 선언하였는데 송석손, 유형 등은 조정에 먼저 아뢰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 때 수양대군의 말을 듣고 북문으로 도망가는 자도 있었다고 한다.
무사들이 도망갔으나 한명회와 홍윤성은 결행을 촉구했고, 수양대군은 부인 윤씨가 갑옷을 갖다 입히자 양정 등을 거느리고 김종서 집으로 갔다. 김종서를 철퇴로 내리치고 아들을 칼로 찔렀다. 계유정변의 시작이었다.
단종실록은 이때 "노산군이 환관 엄자치에게 명해 궁중의 술과 음식으로 세조 이하 여러 재상을 먹였다"고 전하고 있는데 수양대군의 계유정변을 지지한듯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본조선원보록" 에서는 수양은 궁으로 가 단종을 협박하고 대신들을 궁으로 부르게 하고 한명회가 살생부를 들고 있다가 대신들이 들어오면 무사들에게 때려죽이게 했다고 전한다. 영의정 황보인, 우찬성 이양, 병조판서 조극관 등이 입궐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다음날 수양대군은 영의정부사, 영경영서운관사, 겸판이병조사가 되었다. 혼자서 이조, 병조를 모두 차지한 것이다. 이때 안평대군, 산공부정 이명민, 허후, 조수량, 안완경, 지정, 이보인, 이의산, 김정, 김말생 등이 수양대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10월 15일 수양대군 정인지 한확 한명회 권람 등 14명을 1등 공신, 신숙주 등 11명을 2등 공신으로 삼은 43명의 정난공신이 책봉되었다.
단종은 재위2년 2월 수양대군에게 교지를 내리는데 "숙부는 과인을 도와 널리 서정을 보필하고... 희공으로 하여금 주나라에서 있었던 아름다운 이름을 독점하지 말게하라" 라고 하였다. 조카 성왕의 왕위를 뺴앗을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으나 끝까지 조카를 보좌해 공자로부터 성인으로 추앙받았던 주공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이때 양녕대군과 세종의 4남 임영대군은 수양대군을 지지했고 세종의 6남 금성대군과 세종의 서자 한남군, 영풍군은 단종을 지지했다. 한남군과 영풍군은 단종을 키웠던 혜빈 양씨의 아들들이다.
단종 3년 3월 "금성대군 이유가 몰래 양씨와 결탁했다"고 기록했다. 단종의 왕위를 보호하기 위해 위험을 자초한 것이다. 수양대군은 금성대군과 혜빈 양씨, 양씨의 두 아들을 귀양 보냈다. 이날 단종은 수양에게 왕위를 넘기겠다고 선언했다.
세조실록은 "세조가 엎드려 울면서 굳게 사양하였다"고 기록했고 "윤신록"에서는 수양대군이 철퇴를 소매에 넣고 들어가자 단종이 용상에서 내려와 물러났다"고 기록했다. 그날 수양대군은 왕위에 올랐다. 세조의 왕위찬탈로 집현전 유학자들은 강력히 반발했다.
세조2년 6월 1일
상왕 단종은 호조참판이자 외삼촌인 권자신의 절을 받았다. 단종은 권자신에게 긴 칼을 내려 주었다.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같은 문신들과 유응부 박쟁 성승 같은 무신들이 금상을 베고 상왕을 복위시키기로 했다. 상왕 단종과 세조가 창덕궁 광연전에서 명나라 사신 윤봉에게 연회를 베푸는 날이었다. 수양대군을 임금으로 책봉한다는 명 대종의 고명을 가지고 온 데 대한 답례였다. 성승 유응부 박쟁이 세조를 호위하는 별운검이었다. 그런데 세조가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별운검을 들이지 않기로 했다는 갑작스럽게 결정이 되었다.
유응부는 거사를 주장했고, 박팽년과 성삼문은 말렸다. 계획은 연기되었는데, 성균관 정4품 사예 김질은 장인인 의정부 종1품 우찬성 정찬손과 함께 대궐로 달려갔다. 그들은 세조에게 말을 전했다. "좌부승지 성삼문이 사람을 시켜서 만나자 청하여 그 집에 갔었습니다. 성삼문은 상왕께서 창덕궁 북쪽 담장 문을 열고 금성대군의 옛 집에 왕래하시는데 이것은 반드시 한명회 등이 헌책을 올리는 것 때문이다 말하였고, 그 헌책이라는 것이 자세한 것은 아직 알 수 없으나 상왕을 좁은 곳에 두고 역사 한두 사람을 시켜 담을 넘어 들어가 불궤한 것을 도모하려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역사를 시켜 상왕을 죽이려 한다는 말이었다. 김질은 당초 성삼문과 뜻을 같이 하기로 한 동지였다. 김질의 장인 정찬손의 동의를 얻기위한 것이었으나 그것이 실수였다. 정찬손은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죽이고 정권을 잡은 직후 이조판서로 임명된 인물이었다. 김질은 이개 하위지 유응보도 뜻을 같이 한다고 세조에게 고했다. 세조는 성삼문 박팽년 등을 잡아들이고 직접 심문했다.
박팽년은 "성삼문 하위지 유성원 이개 김문기 성승 박쟁 유응부 권자신 송석동 윤영손 이휘와 아버지 박중림" 을 고하였는데, 세조실록에서는 자신을 '신'이라고 했다 하지만 육신전에서는 반드시 나으리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나는 상왕의 신하인데 어찌 나으리의 신하가 되겠소? 전일에 충청 감사로 1년간 있을 때도 신이라 일컬은 사실이 없소"라 하였고 충천감사 때 올린 계목을 조사해 보니 신(臣)자가 아니라 비슷한 거(巨)자로 써 있었다.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이개 하위지는 사형 당하였고 유성원은 일이 발각되자 자결했다. 이 사건으로 사형당한 인물은 사육신 뿐 아니라 성삼문의 부친 성승, 형제 성삼고, 성삼성, 박팽년의 부친 박중림, 형제 박대년, 박인년, 박기년 등 가족들도 사형당했다. 현덕왕후 권씨의 모친 최아지, 그 아들 권자신까지 사형당했다. 뿐만 아니라 친자식들은 모조리 교수형에 처하고 어미와 딸, 조손, 형제 자매는 노비로 만들었다.
사육신의 묘지가 노량진에 있는데 묘지는 일곱개의 분이 있다. 사육신은 박팽년, 하위지, 이개, 성삼문, 유성원, 유응부 이렇게 여섯인데, 유응부 대신 김문기를 넣어야 한다는 김녕 김씨의 주장으로 한 때 기계 유씨와 김녕 김씨 간에 분쟁이 있어 누굴 넣고 누굴 뺄 수 없어 일곱개의 분이 있다.
세조 3년 6월 21일에는 단종 비 송씨의 부친 송현수와 돈녕부판관 권완이 역모를 꾀했다고 고변되었다. 세조에 대한 저항은 이렇게 계속 되었다. 세조는 단종이 살아있으면 같은 사건이 계속 반복될거라고 생각했다. 세조는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하고 영월로 귀양 보냈다. '윤신록'에서는 영월 거처에 대해 풀로 엮은 집이요 사면에 가시 울타리를 둘렀다 라고 되어 있다. 단종을 지지하는 종친들도 모두 유폐시켰는데 금성대군은 경상도 순흥, 한남군은 함양, 화의군은 전라도 금산, 영풍군은 임실, 문종의 부마 정종은 광주에 안치하고 난간과 담장을 높게 쌓아 올렸다.
금성대군은 순흥 부사 이보흠과 의병을 일으키기로 계획했으나 안동의 관노 이동이 역모를 고변하였다. 그러자 이보흠도 마음을 바꾸어 함께 고변하였다. 금성대군은 거사하기 전에 실패하였고, 이 일로 의정부 대신들과 종친들이 노산군의 죄를 여러번 반복하여 청하니 세자는 마지못한 듯 금성대군을 사사하고 단종의 장인 송현수를 교수형에 처했다.
금성대군은 영월에 계신 북쪽을 향하여 통곡하며 사배하고 사약을 받았다 한다.
세조실록은 '노산군이 이를 듣고 또한 스스로 목매어서 졸하니 예로써 장사 지냈다'라고 기록했다. 신숙주와 한명회 등이 편찬을 총괄했던 것이 세조실록이기에 이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육신록이나 단종출손기의 기록을 따르는데, 그에 따르면 10월 세조가 금부도사를 보내서 노산군을 죽이라고 하니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가지고 영월 땅에 이르렀다고 한다. 사약이 내려지자 단종은 계속 호통을 쳤다.
"나는 선왕의 장손이고 왕실의 적파다. 선왕의 교명을 받아 한나라의 임자가 되었으니 수양대군은 종실의 신하일 뿐이다. 지친의 정을 두터이 하여 내 깊이 믿는 바였는데 어찌 차마 이에 이를 줄 알리요! 나에게 이렇게 함은 만고에 하나밖에 없는 일이다. 너 또한 사람의 마음이러니 능히 평안히 여기느냐? 지하에 가서 어느 면모으로 선조를 뵈려 하느냐? 이제 수양이 죽인 여러 신하는 만고에 빛나는 것이 그치지 아니하겠지만 일시에는 불쌍하게 되었구나. 찬역지신은 빨리 물러가라"
단종이 말을 마치고 누각에 올라가니 금부도사가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엎드려 눈물을 흘렸다. 그때 관가에서 심부름하는 공생이 나섰다. "왕명을 받아 왔으니 그냥 돌아갈 수 없으리라"
10월 24일 유시, 그가 활시위로 목을 조르니 얼굴의 일곱 구멍에서 피를 흘리고 죽었다고 전한다.
세조 3년 10월 22일에는 9월 24일 본궁의 종 독동과 전농시의 종 윤생 등이 선수(밥과 반찬)을 가지고 노산군에게 갔다는 기록이 있다. 서울의 종들이 음식을 싸 가지고 영월의 노산군에게 간 것이다. 형조에서는 그 죄로 능지처사 하고 재산을 적몰하고가족을 모두 연좌시켜야 한다고 청했으나 세조는 장 100대를 때리도록 명했다. 이 기록은 사육신 같은 사대부들뿐 아니라 독동 같은 관노들까지도 단종을 왕으로 여겼음을 보여준다.
귀양간 단종의 이야기는 많이 남아있는데, 아래의 시는 금부도사 왕방연이 돌아갈 때 강가에 앉아 지은 시다.
천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고
이 마음 둘 데 없어 물가에 앉았더니
흐르는 물이 내 맘 같아서 쉬지 않고 우누나
단종의 시신이 강물에 던져져 옥체가 둥둥 떠다니니 모두들 화를 당할까 거두지 않았는데 엄흥도가 관까지 준비하여 장례를 치뤘다고 한다. 그 후 엄흥도의 자식이 크게 되어 사대부가 되었다고 전한다.
커다란 한을 품고 죽어간 비운의 국왕이 영월에서 죽고, 영월현의 사또가 거듭 죽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졌다. 육신록에서는 고을 원이 연달아 여덟명이 죽었다고 하고, 인조의 장인인 서원부원군 한준겸이 쓴 유천차기에는 일곱 명이라 전하기도 한다. 중종실록에는 '영월 군수가 7개월 안에 3인이 잇달아 죽어서 관청의 사무가 형편없이 어지러웠습니다'라는 기록도 남아 있다.
명종실록의 기록으로 영월 군수를 박충원이라 전하고 있는데, 중종 36년 영월 군수 3인이 잇달아 죽은지 4년 후이다. 박충원이 영월 군수가 된 후 첫날 밤 꿈에 대궐에 들어갔다. 꿈 속에서 단종이 용상 위에 오르는데 활시위가 목에 들러 있었고 그 아래 사육신이 시위하고 있었다. 박충원이 머리를 조아리며 네번 절하자 단종이 말했다 "내 시신이 든 관을 엄흥도가 처리했으나 지형이 아주 습하고 소나무 뿌리가 침노하니 특별히 경 등에게 개장 하라고 이르고자 나타났으나 이전의 여러 사람들이 정신이 굳세지 못해서 여럿이 기절했다. 내 오늘 다시 이르니 삼가 태만하지 말라" 박충원은 단종의 분묘를 수리하고 제문을 지어서 제사 지냈다. 이후 박충원은 승정원의 승지로 승진했다가 명종 13년 병조참판으로 승진했으며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가 명종 19년 형조판서까지 승진하고 선조 때도 이조판서까지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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