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와 왕위에 등극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사육신의 단종 복위운동을 좌절시키고, 그들을 살해하는데 가담했던 인물이다. 그의 조부는 한상질로 조선 개국공신이며, 부친은 한기이다. 한명회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젊어서 여러번 과거에 응시했는데 번번히 낙방하자 40세가 다되어 1452년(문종2) 음보 경덕궁직을 얻었다. 권람의 주선으로 수양대군을 만나게 되고, 수양대군에게 무사 홍달손, 양정 등 30여 명을 추천하여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왔다.
한명회는 1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보잘것 없는 인물이었고, 일찍 죽었다.
한명회의 네 딸들은 모두 좋은 집안으로 출가하는데 첫째 딸은 세종의 딸 정현옹주의 아들 윤반과 혼인시켜 왕실과 인연을 맺었고 둘째 딸은 신숙주의 맏아들 신주와 혼인을 하였다.
셋째 딸은 세조의 둘째아들 해양대군(훗날 예종)과 혼인한 장순왕후 한씨이다. 1460년 세자빈으로 책봉되어 인성대군을 낳았으나 산후 5일만에 죽었고, 얼마 후 원자도 3세가 안되어 사망하였다. 1472년(성종3년) 왕후로 추존되었다. 파주 공릉에 장순왕후의 능이 위치했다.
1467년 영의정으로 있을 때, 막내딸을 세조의 첫째 아들이던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에게 시집보냈다. 당시 첫째 의경세자는 요절해서 죽고 없었고, 인수대비가 월산군과 자을산군을 키웠다.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가 낳은 제안대군도 있었지만 예종이 죽고 나자 한명회와 인수대비는 자을산군을 보위에 올렸다. 공혜왕후는 1469년 성종이 보위에 오르며 왕비가 되었지만 성종 5년 1474년에 소생없이 죽었다. 공혜왕후는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왔으나 예의 바르고 효성이 지극해 삼전(세조비 정희왕후, 덕종비 소혜왕후,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의 귀여움을 받았다. 성종이 연산의 어머니 폐비 윤씨를 왕궁에 들여도 개의치 않고 투기의 기색도 없이 직접 옷을 지어주고 패옥을 하사하는 덕을 보였다 한다. 공혜왕후 순릉은 파주에 위치하고 있다.
열한살 차이였던 장순왕후와 공혜왕후는 자매였지만 왕실에서는 시숙모와 조카며느리 관계가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한명회는 예종과 성종 두 임금의 장인인 셈이었는데, 한명회의 야심으로 두 딸을 왕후로 만들었으나, 한명회의 욕심만큼 왕비로 오래 누리지는 못했던 것이다.
한명회는 세조 대에 1462년 우의정, 1463년 좌의정, 1466년 최고의 자리인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세조는 한명회를 '나의 장자방'이라 하며 그를 아꼈는데, 장자방은 한나라 고조의 참모의 이름이다. 예종 즉위 후에는 원상이 되어 국정을 주도했고 성종이 즉위하는데 1471년 좌리공신 1등에 올랐다. 세조에서 성종에 이르는데 5번의 공신 책봉이 있었는데 한명회는 4번이나 이름을 올렸다.
한편 ‘한명회’ 하면 많은 사람들이 떠올리는 장소가 압구정이다. 현재의 ‘압구정동’은 한명회가 세운 정자 ‘압구정’에서 유래했다. 성종이 즉위한 후 국가 원로가 된 한명회는 조용히 여생을 보낼 장소로 한강변에서도 가장 풍광이 뛰어난 곳에 정자를 지었다. 중국 송나라 재상이었던 한기가 만년에 정계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갈매기와 친하게 지내면서 머물던 그의 서재 이름을 ‘압구정’이라 했던 고사에서 명칭을 따왔다.
압구정은 성종과 한명회의 힘겨루기의 공간이 되기도 했다. 명나라 사신이 방문해 압구정 관람을 청하자, 한명회는 성종에게 정자가 좁아 관람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이를 말릴 것을 청했다. 그래도 사신이 방문을 청하자, 한명회는 불편한 기색을 보이며 왕이 사용하는 ‘용봉차일’을 보내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성종은 좁다는 것을 핑계로 관람을 허락하지 않다가 왕의 차일을 요구하는 것을 무례하다고 여겨 제천정에서 행사를 할 것이라고 했다. 이에 한명회는 왕이 참여하는 제천정 연회에 아내의 병을 핑계로 나갈 수 없다고 버텼다. 사헌부의 탄핵이 이어졌고, 마침내 성종은 한명회의 추국을 지시했다.
갈매기로 벗을 삼아 조용히 여생을 보내려고 했던 한명회는 압구정을 두고 사위인 왕과 힘 싸움까지 했지만, 결국은 쓸쓸히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성종이 한명회의 힘으로 왕이 된 ‘사위’가 아니라,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훈구대신까지 견제하는 조선의 ‘왕’으로 홀로서기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한명회는 73살까지 장수하고 죽었으나 후에 연산군때 폐비 윤씨 사사 사건의 관련 인물로 1504년 무덤에서 꺼내져 목이 잘리는 부관참시를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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