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 2년(1452)
5월 3일 어의가 문종의 허리 위에 종기가 났다고 알려주어 대신들은 문종에게 잠시 정사를 쉬라고 권유했다. 종기에는 안정이 제일이므로 잠시 국사를 놓고, 둘째 동생 안평대군을 대자암에 보내 완쾌를 비는 기도를 올리게 했다.
5월 5일 문종의 환후를 살피는 당대 최고의 명의 전순의는 종기난 곳에 농즙이 흘러나왔고 콩죽을 드셨으니 괜찮다 하였고, 전순의의 진단을 믿었다.
단종실록에서는 전순의에 대해 "계통이 본래 용렬하고 천하다"라고 전하고 있다. 전순의가 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세종 22년 6월 금성대군의 병을 낳게 하는데 일조했던 일로 나온다. 전순의를 신뢰한 세종은 그에게 일본의 의술을 배울 기회도 제공했고, 조선 제일의 명의로 자리잡았다. 세종 27년에는 내의원의 대표 어의가 되었으며 문종의 주치의가 되었다.
그러나 세종이 세상을 떠나기 3개월 전에 전순의의 처벌을 의논했는데 "내의 노중례, 전순의 등은 동궁의 질병을 치료하는 데 삼가지 못했으니 참상 이상의 직첩을 빼앗고 조교로 삼는 것이 어떻겠느냐?" 이때 처벌받은 이유는 세자(문종)의 병을 치료할때 삼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세종은 준순의의 세자 치료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두 내의는 조교로 근무하다가 문종 즉위하던 해에 복직시켰다. 이때도 세자의 병은 종기가 문제였고, 방서대로 치료하지 않고 마음데로 처방했던 일이 문제시되었다.
5월 6일에는 문종의 빠른 쾌유를 위해 기도를 올리게 했는데, 문종의 맏동생인 수양대군도 포함되어 있었다. 수양대군은 도승지 강맹경을 데리고 갔는데, 도승지는 사실상 모든 치료 절차를 도맡아야 함에도 종친과 절에 동행했다. 평상시에도 이상했을 일인데 문종이 와병중인데 곁을 떠나 종친을 따라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의정부에서 사람을 보내 강맹경을 꾸짖었다고 한다. 그러지 도승지는 우도승지에게 자신을 다신하게 했다.
5월 8일 전순의는 대신들에게 종기의 농즙이 흘러나와 저절로 뽑혀졌고, 오늘부터는 아프지 아니하고 예전과 같다고 말하여 대신들은 안도하게 되었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전순의의 말과 달랐고 문종은 일어나지 못했다.
5월 10일에는 조관들을 여러 도의 명산대천으로 보내 기도하게 하였다. 영의정 황보인을 종묘로 보내고 우의정 김종서를 사직으로 보내고, 공조판서 정인지를 소격전으로 보내 기도하게 했다.
5월 12일 의정부 우참찬 겸 이조판서 허후가 문종을 만났다. 의학에 일가견이 있던 허후는 실제로 문종의 환부를 보지는 못했으나 임금이 갈증이 나서 냉수를 찾았다고 말했다. 종기가 갈증을 당기는 법인데, 냉수가 아니라 속을 덥게 하는 것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말하였다.
5월 14일 상황이 급변했다. 도승지 강맹경은 임금의 병세가 위급하다 전하였다. 남쪽 회랑에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강맹경과 직집현 김예몽, 전순의 등 어의들이 모여있었다. 그때 대신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는데 '문종실록'에는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무릇 의료에 관한 모든 일과 기도하는 모든 일은 강맹경이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에게 여쭌 후 두 대군의 말을 받아 의정부에 고한 후에 시행했다.
수양대군이 치료를 주도했다는 이야기인데 조선의 국법은 종친들의 정사 개입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있어서는 안될 일이었다.
문종은 5월 14일 유시(오후 5-7시)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문종은 학문을 좋아하여 학자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했고, 서예에도 능했다. 세종 25년부터 대리청정을 하면서 세종과 함께 정사를 처리하면서 현군의 자질을 드러냈다.
'문종실록'에는 "사왕(단종)이 나이가 어려서 사람들이 믿을 곳이 없었으니, 신민의 슬퍼함이 세종의 상사 때보다 더하였다" 고 전하고 있다.
문종 사망 정황을 전하는 사관들이 먼저 의혹을 제기했는데
"유시에 임금이 강녕전에서 서거하시니 춘추가 39세셨다. 이때 대궐의 안팎이 서로 통하지 않은 가운데 오직 내의 전순의, 변한산, 최읍만이 날마다 나아가 진찰했지만 모두 용렬한 의원들이어서 병세가 어떤지도 알지 못하고 해롭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서 임금에게 활 쏘는 것을 구경하게 하고 사신에게 연회를 베풀게까지 했다" 라고 문종실록에서 말하고 있다.
종기 환자는 과로가 좋지 않음을 명의 전순의가 몰랐을 리 없는데 연회를 베풀었다는 것에 "용렬한 의원들"이라고 비난했다.
또한 전순의는 옥체가 날마다 좋아지고 있다고 답하다가 승하하는 날 아침에야 위독하다고 알렸다.
3년 후인 세조 1년 수양대군의 즉위에 공을 세운 공신들의 명단을 적은 맹족을 바치는 자리에서 세조는 임영대군 이구에게 장난삼아 이계전과 신숙주를 때리게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만약 손으로 때린다면 전순의 임원준 같은 명의가 좌우에서 서로 교대로 구호해도 끝내 효험이 없을 것이다"
전순의는 문종이 세자 시절에도 종기 치료를 방서대로 하지 않다가 처벌받았고, 문종의 종기 치료도 방서대로 하지 않다가 문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전순의는 문종2년 세종과 신빈 김씨 사이에 낳은 밀성군 이침의 병을 완쾌시키고 안마(안장을 얹은 말)을 하사받았는데, 어린아이의 병도 잘 고치는 전순의가 유독 문종의 병에서만 거듭 문제를 일으켰다.
5월 15일 문종 승하 다음날 대간(사헌부, 사간원)에서 문종 치료 과정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전순의 등의 국문을 요청했다. 세종이 아플때 의정부 대신들과 상세히 의논해서 약을 썼는데 전순의 등은 대신들에게 아무것도 상의하지 않았다는 것이 의혹의 핵심이었다. 의금부는 사흘만에 수사 결과를 발표했는데 전순의는 주범이니 중하게 목을 베고, 변한산, 최읍은 종범이니 장 100대에 유비 3000리에 처하라 하였다.
하지만 단종은 전순의의 목을 베는 대신 전의감 청지기로 변한산 최읍은 전의감 영사로 강등시켰다. 전의감 역시 어의들이 근무하는 곳이었으므로 같은 업종이 종사하게 된 것이다. 대간에서는 법대로 처리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도승지 강맹경이 나서 단종에게 선왕의 죽음에 의혹이 있다고 판단한 언관을 꾸짖어라 주장했다.
단종은 전순의를 전의감의 청지기로 강등시켰다가 8개월 후에 전순의, 변한산, 최읍을 모두 방면했다.
사헌부에서는 3개월동안 문종 치료 과정의 의혹을 하나하나 조사했는데, 단종 1년 4월 27일 아래와 같은 사실을 발표했다.
"허리 위에 종기는 비록 보통 사람이라도 삼가고 조심하는 것이 마땅하다. 종기에는 움직이는 것과 꿕 고기는 금기이다. 그러나 전순의는 문종이 처음 종기가 났을 때 사신을 접대하게 하고 관사하게 하는 등 여러 운동을 다 해로움이 없다고 여겼다"
"또한 구운 꿩 고기를 기피하지 않고 올렸다"
꿩이나 닭, 오리 등은 껍질에 기름이 많아서 종기 환자에게는 절대 처방하면 안되는 음식이었고, 한의학에서는 종기 환자에게 꿩을 처방하는 것을 독살의 증거로 삼기도 했다.
문종이 종기로 누웠을 때가 음력 4월인데 꿩고기는 겨울철 대지가 얼었을때 올려야 하는데 전순의는 이를 무시하고 문종이게 올렸다.
"또 종기가 화농하면 침으로 찌를 수 있으나 화농하지 않으면 침으로 찌를 수가 없는데도 전순의는 침으로 찌르자고 하외어서 끝내 죽음에 이르게 했다"
전순의는 화농되지 않은 종기에 고의적으로 침을 써 증상을 악화시켰다는 것이다.
사헌부는 의원이 아니더라도 방서를 펴 보면 알 수 있는것을 의원인 전순의가 몰랐을 수 없다며 극형에 처해야한다고 했지만, 의정부 대신들은 전순의의 실력 부족으로 발생한 일이라고 두둔했다. 5월 1일 대사헌 기건이 다시 전순의의 혐의를 4가지로 정리하여 처벌을 주장했는데, "첫째 등의 종기는 독이 있는데 해가 없다고 했다. 둘째, 몸을 움직이는 것은 종기에서 가장 크게 금하는 것인데 어겼다. 셋째, 꿩 고기 같은 것은 등창에서 큰 큼기로 치는데 매일 꿩 고기를 드렸다. 넷째, 등창에서 화농하여 터지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데 화농되기도 전에 침으로 찔렀다" 라고 하였다.
사헌부에서 전순의의 처벌을 요구하자 단종은 전순의를 내의원에 출사하지 못하게 했다. 이때 의정부 우참찬 이사철이 전순의를 옹호하였는데,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에서 이사철은 정난 1등 공신에 올랐다.
계유정난 이후에 전순의의 행보는 달라지는데, 내의원에 쫓겨났던 전순의는 세조 즉위 후에 공신 79명 중 한명을 책봉되었다. 세조 2년에는 정3품 당상관인 첨지중추원서로 승진했고, 세조 3년에는 상왕 복위 기도 사건, 사육신 사건을 진압한 후 난신들의 가족과 전지를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전순의도 이 대열에 합류했다.
세조 때 전순의는 최고 명의로 대접받았다. 전순의는 세조 앞에서 의서를 강의하는 최고의 의원이었다.
세조 7년에는 당시 영의정 강맹경이 종기가 발생하여 죽었는데, 세조는 강맹경의 약이 듣지 않았다는 이유로 당대 최고 어의인 전순의 임원준을 의금부에 하옥시켰다. 이때 세조는 전순의를 비난하기를 방서에 의거하지 않고 약을 썼다 하였다. 세조는 전순의가 평위산에 인진(말린 사철쑥)을 더해 양정의 종기를 다스렸는데 이는 방서에 없는 처방이라 하였다. 세조는 세자에게도 조심시키기 위해 이 일을 주지시켰다.
그러나 강맹경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전순의는 세조 8년 종2품 동지중추원사로 승진했다. 세조 10년에는 세조의 병을 고치는 데 공이 있다 하여 정2품 자헌대부 동지중추원사로 승진시켰다. 전순의는 세조의 최측근으로 대접을 받으며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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