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1595-1649
재위 1623-1649
인조는 선조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정원군 어머니는 인헌왕후이다.
선조의 가계도로 보면 인빈 김씨의 3남이 정원군이고 후에 원종으로 추존되었다.
1623년 김류 김자점 이귀 이괄 등 서인의 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랐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왕은 중종과 인조인데, 중종은 정변을 일으킨 공신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고, 인조는 왕이 되고자 직접 정변을 준비하고 앞장선 인물이다.
인조는 선조의 다섯째 아들인 정원군과 좌찬성 구사맹의 딸 인헌왕후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왜구의 침입으로 왕족들이 해주에 피신 중이었는데 피신 중에 태어났다. 선조는 14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영창대군 외에는 모두 후궁의 소생이었다. 과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 인조의 부친인 정원군은 광해군의 견제를 받았다.
정원군은 4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인조(능양군) 외에도 능원대군, 능창대군, 능풍군이 있었다. 정원군은 아들 능창군이 모반죄로 모합을 받아 17세의 나이로 죽임을 당하고, 40세에 세상을 떠났다. 이들의 죽음은 인조가 반정을 일으키는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평소에 무예에 능하고 인망도 높았던 능창군은 역모로 죽게되었는데, 능양군은 어려서부터 말이 별로 없고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았다. '인조실록'에 따르면 능양군의 넓적다리에 검은 점이 무수히 많았는데 선조는 이것이 한나라 고조의 상이니 누설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왕이 된 이후에도 인조는 매우 무겁고 말이 없어 측근에 모시던 궁녀들도 왕이 하루 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아 목소리를 잘 듣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신하들의 상소문에 대답하는 미답도 내시에게 베껴서 쓰게 하여 자신의 필적을 남기려 하지 않았다. 아들과도 거리를 두어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이 장성하여 출궁한 뒤 입궐해 들어오면 젊은 궁녀들을 피신시켜 자식 앞에서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인조의 부인은 인열왕후 한씨인데, 1610년 능양군과 결혼하였고 1623년 인조반정으로 능양군이 왕이 되자 왕비가 되었다. 청주 한씨 한준겸과 어머니 황씨 사이에서 태어난 인열왕후 한씨는 17세에 능양군과 혼인한 후 4남을 낳았다. 서인 세력이 득세하던 상황에서 소현세자의 세자빈 간택조차 조정의 뜻에 따라야만 했다. 인열왕후는 용성대군을 낳다가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인조반정의 주모자는 인조와 인조의 외척세력 신경진, 구굉 그리고 서인 문신집단인 이귀, 이서, 김류, 장유, 심기원, 김자점 등이었다. 광해군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서인들과 힘을 함께 한 것이었다. 반정군은 도끼로 돈화문을 부수고 궁궐로 쳐들어 갔고 궁궐에 불을 질렀다.
인조는 할머니인 인목대비의 윤허가 없다면 왕위에 오를 수 없었고, 인조의 측근들은 대비가 있는 서궁으로 달려갔다. 대비는 광해군을 데리고 오라 하였고 인조는 직접 광해군을 데리고 대비에게 갔다. 대비는 옥새를 가져오라 명한 후 인조에게 옥새를 내리고 왕위에 오르도록 하였다.
광해군의 패륜행위를 명분으로 세운 인조 반정이었지만, 인조는 광해군에 대한 원한으로 왕위까지 올랐다고 할 수 있다. 인조는 반정을 도운 서인을 권력에서 소외시켰다. 당시 백성들은 인조에게 호의적이지 못했고, 이괄이 일으킨 난에서 백성들은 이괄을 환영했다. 이괄의 난으로 인조가 서울을 떠나던 날 백성들은 인조가 탈 배를 숨겨놓기도 했다.
이괄의 난이 실패하고 인조가 서울로 돌아왔는데 정당한 왕위 계승권자가 아니라 불안했던 인조는 자신의 생부인 정원군을 원종 으로 추존해 권력의 기반을 다지고자 하였다.
16세기 말, 명청 교체라는 큰 변화가 있었는데 명은 기울고, 이 틈을 타 후금이 세워졌다. 광해군은 후금과 원만하게 지내고자 하였으나 인조는 명과의 의리를 중시하였다. 인조5년(1627) 후금이 조선을 침략하는 정묘호란이 일어났고, 후금과 조선은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 조선은 후금의 요구를 들어 1628년 이후 무역을 통해 조선의 예폐 외에도 필수품을 공급해주었다. 후금은 식량을 강청하고 병선을 요구하는 등 압박을 가하고 압록강 건너 민가에 침입해 약탈을 자행하여 변방의 백성과 수장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다. 이러한 후금의 행위로 조선의 여론은 후금을 치자는 척화배금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격증하게 되었다.
인조14년(1636)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조선에 군신관계를 강요했다. 병자호란의 시작이었다. 병자년에 일어나 정축년에 끝났기에 병정노란이라 부르기도 한다. 인조는 청의 무리한 요구에 사신의 접견을 거절하고 국서를 받지 않고 후금 사신을 감시하게 했다. 청은 왕자를 볼모로 보내서 사죄하지 않으면 대군을 일으켜 조선을 공략하겠다고 협박했으나 조선은 그들의 요구를 묵살했다. 11월 청나라는 조선에 2차 침입을 했다. 청군은 압록강을 넘고 서울 근교까지 진출하였고, 세자빈 강씨, 원손, 봉림대군, 인평대군을 강화도로 피하도록 했다. 그후 인조도 강화도로 향했으나 청군은 강화로 피신하지 못하도록 서울과 강화도를 연결하는 길을 차단했다. 인조는 세자와 남한산성으로 들어갔고 12월 15일부터 다음해 1월 30일까지 45일간의 남한산성 항전이 시작되었다. 각지에서 구원오는 군사가 청군에 의해 붕괴되었다. 1월 23일 청군은 남한산성과 강화도를 함께 공격해서 강화도를 점령했다. 청군은 숙의와 빈궁, 봉림, 인평 두 대군 및 대군의 부인을 협박해 나오게 하고 군사를 풀어 약탈하고 관가와 사가에 불을 질렀다. 강화도 함락 사실을 확인한 인조는 11개의 조문에 합의했다. 1월 30일 인조는 세자를 비롯한 500명의 신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청태종을 향해 삼배고두의 예를 올렸다. 삼배고두는 여진족이 천자를 뵈올때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이었다. 이때부터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었는데 이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할 때까지 계속 되었다. 인조는 예식이 끝난 후 소파진을 경유하여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넜는데, 배가 두척만 남아있어 서로 건너려는 신하들이 몸싸움을 일으키고 왕의 옷소매까지 붙잡았다고 한다.
인조의 왕위등극과 함께 백성의 고난이 시작되었는데, 인조 또한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에는 정통성 문제로 고민을 겪었고, 병자호란 뒤에는 청국의 요구로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게 될까 두려웠다. 8여 년의 인질생활을 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귀국했을 때 인조는 세자에게 냉담하게 대했고, 귀국한지 두달만에 소현세자는 돌연사했다. 인조의 뒤를 이은 봉림대군은 효종으로 왕위에 오른 후 볼모 생활의 굴욕을 되새기며 재야의 인사를 발탁하고 군비를 확장하는 등 북벌의 원대한 계획을 세웠는데 재위 10년만에 세상을 떠나면서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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